깊고 투명한 물의 계시
깊고 투명한 물은 어둠을 밀어내는 새벽의 빛이다.낮과 밤의 경계선이며 시작과 끝의 분계선이다.어둠을 밀어내며 그 자리에 빛을 채우는 새벽은 사위를 부드럽게 감싸안는다. 그 희망의 빛에 나무잎은 눈뜨며 사람들은 노곤한 어제에서 깨여나 오늘를 향해 눈 뜬다.낮과 밤은 남자와 여자처럼 상이한 것이면서 또 둘중 어느 하나가 없어도 온정한 하루를 이룰수 없다.빛이 있음과 없음의 차이, 그것이 밤과 낮을 만들면서 그 밤과 낮의 교차점, 밤의 끝과 낮의 시작은 곧바로 한점이라는데에 새벽의 오묘함이 있으며 물위와 물아래의 분계선인 수면이 그처럼 다른 두 세계의 교차점은 어쩜 위에도 아래에도 다 통한다는 그것이 물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한다.이렇게 낮과 밤은 어울려 하루를 이룬다.
깊고 고요한 수면은 일상과 꿈의 교차점이다.일상에 처해있을때 우리는 의식한다.꿈속에 있을때 우리는 의식하지 않는다.깨여있는 나와 잠자는 나의 교차점은 두개의 세계다.수면위에 있을때 우리는 호흡이 자유롭다.수면아래에 머리까지 있을때 우리는 숨을 내뱉을수 있을뿐 들이쉬지 못한다. 우린 공기속에서 숨쉬게 만들어진 존재이기때문이다.의식하는 우리는 이것이 아니다 하면 절제를 한다. 하지만 꿈속에서 우리의 행위는 그 어떤 절제도 구속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속에서 구속을 했던것일수록 무의식속에서 그 형상이 한결 뚜렸하다.일상에서는 상상할수도 없는 끔찍한 일을 꿈속에서 부끄럼없이 행하는게 인간이다.꿈이기에 또한 그것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하지만 꿈은 어쩜 의식의 거울이다.꿈은 내가 행하고펐던 그 어떤 욕구의 반사일수도 있다.이처럼 일상과 꿈의 화합속에서 삶은 비로서 실체를 이룬다.
깊고 맑은 물은 삶과 죽음의 변계선이다.물속에서 수면을 올려다보면,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이 삶과 작별하는 느낌 그것이다.수면과 내 머리가 아주 작은 거리일지라도 물위에 솟지 못하는한 죽음은 수면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있다.물을 너무 쉽게 보았기에 물앞에서 겸손을 잃었고 그 대가는 생명을 노리는것이다.너무도 큰 물앞에서 인간은 정신이 죽는다. 정신만 살아있어도 우리는 물과 하나로 물의 생명력을 느끼며 물과 호흡을 맞출수 있다.물은 인간을 어찌하지 않는다.인간이 물앞에서 겸허함을 잃을때 물은 그렇게 인간의 교만함을 꺾나보다.발다닥이 바닥에 닿지 않는 그 깊이, 그 고요함, 그 투명함을 대하느라면 내 삶이 끝나는 날, 내 령혼이 육체의 껍질을 벗어버리는 순간의 고요와 깊이와 짙은 고독을 상상해본다.깊은 수면을 내려다볼때면 난 왜 죽음은 삶과 그렇게 가까이 껴안고있는지 생각해본다. 죽음은 결국 삶의 일부임을 승인치 않을수 없다.이처럼 삶과 죽음이 조화를 이루는속에 완정한 삶은 존재한다.
맑고 조용한 수면은 육안과 마음의 눈의 교차점이다.그 어떤 삶의 질서를 위해서 눈이 필요하다.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느끼고 나갈 길을 찾는다.우리의 육체를 위하여 눈은 너무도 필요한 물건이다.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것은 마음의 눈을 뜨는것이다.자기 내면을 향해 열려있는 눈을 우린 가져야 한다.엄동설한,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날, 깊은 호수는 두텁게 얼어붙었다. 수면이 그대로 얼어붙은 호수는 없는듯이 투명했고 지상을 향해 일제히 솟구쳐오르던 무수한 기포는 최면에 걸린 생령체처럼 응고된채 나를 쳐다보고있었다.너무도 투명한 얼음위에서, 그 깊이가 들여다보이는 언 수면위에서 난 왜 공포가 전신을 휩싸여오는지 몰랐다.자동차의 무게를 받아내는 얼음언 호수위를, 있는듯 없는듯 내려다보이는 물밑의 세게, 그 고요함과 투명함과 깊이앞에 난 경외감을 느낀다. 어느날, 그 언젠가, 솟아오르다 멈춘 저 물밑 얼어붙은 기포들처럼, 나의 일상이 어느날 갑자기 한단면이 응고가 된다면, 난 저렇게 얼어붙는다면, 그때 나는 정녕 저렇게 찬란하게 웃는 모습일수가 있을가!육체와 령혼은 어울려 온정한 나를 만든다.수면은 공기의 세계인 동시에 물의 세계이기도하다.이렇게 육체의 눈과 영혼의 눈을 다 떠야 비로서 우린 세상을 향해 눈을 떴다고 할수 있으리라.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것도 있다.자기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것은 인간만이 할수 있는 어리석은 짓이다.
물밑에 들어가보지 않은 사람은 물밑 세게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고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죽음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다.
단지 죽음은 삶이 끝나는 자리에서 우리와 꼭 만나는 피치 못할 부분임을 인정할뿐이다.이 세상 어느 생령도 죽음을 비껴가진 못함을 우린 알고있기에 깊고 고요한 물빛에서 우리 령혼의 빛과 죽음과 빛과 우리 삶이 그것들과의 어울림의 교차점을 볼뿐이다.
빛이 물위 하늘과 물밑 깊은곳까지 속속들이 비추듯이 우린 어둠을 껴안고 꿈을 포용하며 죽음조차 삶처럼 편히 바라볼수 있는 청정한 마음으로 우리 내면의 깊은 성찰을 거듭해야할것 같다.그래야 신비스런 물과 자연과 우리 삶은 조화로움을 이룰것이 아닌가! 그때에야 비로서 자연은 자연답고 인간은 인간답고 세상은 세상다우리라!
깊고 투명한 물은 어둠을 밀어내는 새벽의 빛이다.낮과 밤의 경계선이며 시작과 끝의 분계선이다.어둠을 밀어내며 그 자리에 빛을 채우는 새벽은 사위를 부드럽게 감싸안는다. 그 희망의 빛에 나무잎은 눈뜨며 사람들은 노곤한 어제에서 깨여나 오늘를 향해 눈 뜬다.낮과 밤은 남자와 여자처럼 상이한 것이면서 또 둘중 어느 하나가 없어도 온정한 하루를 이룰수 없다.빛이 있음과 없음의 차이, 그것이 밤과 낮을 만들면서 그 밤과 낮의 교차점, 밤의 끝과 낮의 시작은 곧바로 한점이라는데에 새벽의 오묘함이 있으며 물위와 물아래의 분계선인 수면이 그처럼 다른 두 세계의 교차점은 어쩜 위에도 아래에도 다 통한다는 그것이 물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한다.이렇게 낮과 밤은 어울려 하루를 이룬다.
깊고 고요한 수면은 일상과 꿈의 교차점이다.일상에 처해있을때 우리는 의식한다.꿈속에 있을때 우리는 의식하지 않는다.깨여있는 나와 잠자는 나의 교차점은 두개의 세계다.수면위에 있을때 우리는 호흡이 자유롭다.수면아래에 머리까지 있을때 우리는 숨을 내뱉을수 있을뿐 들이쉬지 못한다. 우린 공기속에서 숨쉬게 만들어진 존재이기때문이다.의식하는 우리는 이것이 아니다 하면 절제를 한다. 하지만 꿈속에서 우리의 행위는 그 어떤 절제도 구속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속에서 구속을 했던것일수록 무의식속에서 그 형상이 한결 뚜렸하다.일상에서는 상상할수도 없는 끔찍한 일을 꿈속에서 부끄럼없이 행하는게 인간이다.꿈이기에 또한 그것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하지만 꿈은 어쩜 의식의 거울이다.꿈은 내가 행하고펐던 그 어떤 욕구의 반사일수도 있다.이처럼 일상과 꿈의 화합속에서 삶은 비로서 실체를 이룬다.
깊고 맑은 물은 삶과 죽음의 변계선이다.물속에서 수면을 올려다보면,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이 삶과 작별하는 느낌 그것이다.수면과 내 머리가 아주 작은 거리일지라도 물위에 솟지 못하는한 죽음은 수면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있다.물을 너무 쉽게 보았기에 물앞에서 겸손을 잃었고 그 대가는 생명을 노리는것이다.너무도 큰 물앞에서 인간은 정신이 죽는다. 정신만 살아있어도 우리는 물과 하나로 물의 생명력을 느끼며 물과 호흡을 맞출수 있다.물은 인간을 어찌하지 않는다.인간이 물앞에서 겸허함을 잃을때 물은 그렇게 인간의 교만함을 꺾나보다.발다닥이 바닥에 닿지 않는 그 깊이, 그 고요함, 그 투명함을 대하느라면 내 삶이 끝나는 날, 내 령혼이 육체의 껍질을 벗어버리는 순간의 고요와 깊이와 짙은 고독을 상상해본다.깊은 수면을 내려다볼때면 난 왜 죽음은 삶과 그렇게 가까이 껴안고있는지 생각해본다. 죽음은 결국 삶의 일부임을 승인치 않을수 없다.이처럼 삶과 죽음이 조화를 이루는속에 완정한 삶은 존재한다.
맑고 조용한 수면은 육안과 마음의 눈의 교차점이다.그 어떤 삶의 질서를 위해서 눈이 필요하다.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느끼고 나갈 길을 찾는다.우리의 육체를 위하여 눈은 너무도 필요한 물건이다.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것은 마음의 눈을 뜨는것이다.자기 내면을 향해 열려있는 눈을 우린 가져야 한다.엄동설한,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날, 깊은 호수는 두텁게 얼어붙었다. 수면이 그대로 얼어붙은 호수는 없는듯이 투명했고 지상을 향해 일제히 솟구쳐오르던 무수한 기포는 최면에 걸린 생령체처럼 응고된채 나를 쳐다보고있었다.너무도 투명한 얼음위에서, 그 깊이가 들여다보이는 언 수면위에서 난 왜 공포가 전신을 휩싸여오는지 몰랐다.자동차의 무게를 받아내는 얼음언 호수위를, 있는듯 없는듯 내려다보이는 물밑의 세게, 그 고요함과 투명함과 깊이앞에 난 경외감을 느낀다. 어느날, 그 언젠가, 솟아오르다 멈춘 저 물밑 얼어붙은 기포들처럼, 나의 일상이 어느날 갑자기 한단면이 응고가 된다면, 난 저렇게 얼어붙는다면, 그때 나는 정녕 저렇게 찬란하게 웃는 모습일수가 있을가!육체와 령혼은 어울려 온정한 나를 만든다.수면은 공기의 세계인 동시에 물의 세계이기도하다.이렇게 육체의 눈과 영혼의 눈을 다 떠야 비로서 우린 세상을 향해 눈을 떴다고 할수 있으리라.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것도 있다.자기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것은 인간만이 할수 있는 어리석은 짓이다.
물밑에 들어가보지 않은 사람은 물밑 세게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고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죽음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다.
단지 죽음은 삶이 끝나는 자리에서 우리와 꼭 만나는 피치 못할 부분임을 인정할뿐이다.이 세상 어느 생령도 죽음을 비껴가진 못함을 우린 알고있기에 깊고 고요한 물빛에서 우리 령혼의 빛과 죽음과 빛과 우리 삶이 그것들과의 어울림의 교차점을 볼뿐이다.
빛이 물위 하늘과 물밑 깊은곳까지 속속들이 비추듯이 우린 어둠을 껴안고 꿈을 포용하며 죽음조차 삶처럼 편히 바라볼수 있는 청정한 마음으로 우리 내면의 깊은 성찰을 거듭해야할것 같다.그래야 신비스런 물과 자연과 우리 삶은 조화로움을 이룰것이 아닌가! 그때에야 비로서 자연은 자연답고 인간은 인간답고 세상은 세상다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