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 시인 시평/ 오이를 거꾸로 먹어도 제멋이라는데

  • 김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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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원시평
  • 2006.09.2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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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를 거꾸로 먹어도 제멋이라는데

                            * 김철 시인

나는 요즘《중국조선족명시》라는 책을 읽고 별난 느낌 하나를 적고싶다. 연변에 나가보니
이 책을 잘 펴냈다느니, 못했다느니 말썽이 많은데 나는 그런 시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참여도 하고싶지 않다. 왜냐 하면 시라는건 각자 제나름대로 평가하고 감상하는것이고 고
정된 척도가 없으니 말이다. 마치도 누구는 소고기료리를 좋아하는데, 또 누구는 돼지고기
료리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게가 질색이라는데, 또 어떤이는 일부러 비게만 골라먹고
곱을 많이 먹으면 단명이라는데, 세계에서 제일 오래 산 사람은 또 그 비상이라는 비게만
골라 먹는다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어야 할꼬? 

책을 읽고 느낌 그대로 솔직히 말한다면 앞부분, 그러니까 세상에 이미 널리 알려진 명시
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읽었는데 뒤부분, 그러니까 지금의 무명시인, 젊은 친구들이 쓴
시들에 나는 홀딱 반해버렸다. 그래서 절반쯤 읽고 시집을 덮어버리려 했다가 끝까지 탐독
했고 후반부는 두세번씩 다시 읽었다. 이것이 나의 진솔한 고백이다.

어떤 사람은 오늘의 우리 시가 30년대 수준이라기도 하고 또 어떤이는 그것도 과분하다고
까지 하는데 천만의 말씀!
속담에 오이를 거꾸로 먹어도 제멋이라는데 시를 보는것도 다 제멋에, 제나름대로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나는 한마디로 말해서 진정한 명시는 우리 젊은이들속에, 말
하자면 이제 솟아나는 무명시인들 손에 있다고 떳떳하게 말할수 있다. 시를 어떻게 비겨야
하는가. 오늘의 중국조선족시가 30년대수준이라 한다면 오늘의 한국시는 다 명작이란 말
인가.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는 한국의 여러 문학월간지들이 달마다 증정되여오는데 나는
그것들을 접수할 때마다 우선 시들을 골라본다. 그런데 어떤 달에는 한수도 맛있게 읽을
시감이 없어 실망하군 한다. 그럼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런데 우리의 문학
지들에서는 달마다 심심치 않게 맛있는 시들을 만나게 된다. 이건 누가 시켜서 하는것도
아니요, 아무런 선입감도 없는 상황에서 나타난 현상인걸 어찌하랴. 문제는 단도직입적으
로 말해서 오늘의 한국시들이 다 그렇게 수준이 높은것도 아니요, 우리의 시들이 모두 그
렇게 쓰레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시에도 명작이 있고 우리의 시에도 명작이 있다는 말이 되겠다. 여기에 변증법이라는게 필요한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30년대, 그리고 해방직
후에 인정받은 명작이라째孤?그때는 좋다고 보았는데 지금에 와 다시 보니 그것도 그저 그
래, 라고 생각되는걸 어찌하랴,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시대 시들을 부정하고싶은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다. 문제는 그 시대의 시도 반드시 그 시대에 맞춰, 그 시대의 다각적인 인
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충분히 긍정하거나 실제에 맞게 평가되여야 한다는 말이다. 여
기에 맹목적인 긍정이나 부정은 금물이다. 더구나 오늘의 자대로 옛것을 재거나 옛날의 자
대로 오늘을 부정하거나 해서는 안되는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시인이나 명작이란 그리
많지 않는 법이다. 그 일부의 명작을 가지고 오늘의 전반 수준을 평가하거나 절대적인 부
정, 또는 긍정해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시집을 읽고 신심과 희망을 갖게 된것은 우리의 시단, 특히는 젊은 시인들 손에서
명작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있고 이미 나왔다는 점에 있다. 평소에 나는 우리 잡지나 신문
들에 나오는 시들을 다 읽지는 못했는데 적지 않게 처음 접하는 시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적지 않게 이름을 모를 시인들이여서 뒤끝의 소개를 보니 많이는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
업한 젊은이들이였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고싶었고 고무해주고싶었다. 이 글을 쓴것도 바
로 그래서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에는 (특히 뒤부분) 혼자 무릎을 툭 치게 되는 시들이 많았다. 나는
여기서 우리 시단의 로시인이나 이미 많이 평가 받은 시들에 대해서는 다시 구구히 말하
고싶지 않고 새로 두각을 드러낸 젊은이들의 좋은 시 몇수에 대해 나의 천박한 소감을 피
력하고싶다.
 
나는 이 책에서 김영춘의 《8월의 호수가를 거닐며》, 허련화의 《가을산》, 남철심의 《우리들의 자화상》, 리범수의 《형씨 K의 자취방 소문》, 박설매의 《마지막 신화》, 전춘매의 《다조》, 윤영애의 《초불》과 《늙은 량주》, 박정웅의 《자화상》, 김영건의 《철쭉꽃》, 김선희의 《비》, 림금산의 《당신은 아십니까》, 석화의 《외로움》과 《옥수수밭에서》, 박문봉의 《과부》, 리임원의 《동해바다》, 류광철의 《남편》, 김일량의 《버드나무숲》, 최룡국의 《아버지 말소리》, 김학송의《갈대》, 리문호의 《자라곰탕》, 김문세의 《산》, 최기자의 《채소바구니를 들지 않는
건》, 김철학의 《학두루미》, 김동진의 《가을로 가는 나무》 등을 매우 감명깊게 읽었다
. 이 책을 펴낸 사람이 아주 잘 고른것 같다. 그외에도 우리의 로시인, 중견시인들의 명시
들도 많은데 여기에서는 략하겠다. 그래서 좋?시들을 례로 든것도 제일 뒤페지부터 든 까
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젊은이들의 시에는 몇가지 공동한 특점이 있는것 같다.
첫째, 그들의 시는 착상이 기발하다. 엉뚱하다는 말이다. 남이 생각지 못하는 시, 같은 제
목이라도 읽고나면 놀라게 하는 시, 그것이 진짜 시가 아닐가. 하늘의 달은 수천년동안,
수천명이 노래했어도 시인마다 그 감수가 다르다. 그래서 그것이 시가 되는것이다. 최기자
는 사람들이 날마다 들고다니는 《채소바구니》를 가지고 시를 썼는데 평범한 채소바구니
에 인생철학을 담았다.

함께 먹어줄이 찾기가 그렇게 어려울수가 있습니까/잠간 함께 먹어주는 그림자가/그토록
아프게 내 피를 말린다는걸 /당신은, 당신은 아십니까

이 대목에서 최기자라는 인간이 빤히 보인다. 절절한 하소연, 한 녀인의 고독과 외로움…
피말리는 인간의 그리움 이런것들이 너무나도 평범한 시구에서 평범하지 않은 체험을 진실
하게 잘 말해주고있다. 류광철의 《남편》을 보자.

여리디 여리였던/행화(杏花) 같은 꽃나이를 /그대의 이름자에

이것이 진짜 명시가 아닌가. 《밉고도 고운 그 이름을 먹고 사는》 녀자, 한국의 노래에는
사랑을 먹고 산다는 말은 있으나 《밉고도 고은 그 이름》을 먹고 산다는 말은 못들었다.
중국시단에서도 못보았다. 진짜 엉뚱한 소리다. 시는 남이 말하지 않은 소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시론에서는 시적발견이라 한다. 어쩌면 젊은 사람들이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을가? 나는 반세기 남짓이 시농사를 짓고있지만 이런 생각을 못해보았다.

석화의 《외로움》이나 《옥수수밭에서》도 그렇다.《외로움을 손가락사이에 끼워/불 붙여
물면/먼 기억은 가물가물 눈앞에 피여오르고/옛날은 하얗게/재털이에 쌓이다/손가락끝에
서 짧아지는 고독/빨갛게 타는 심사 비벼끄는》 사나이의 형상이나 《등에/그리고 가슴에/
아기를 업고 또 안고있는/내 엄마같은 옥수수》의 형상은 매우 생신하고 너무나도 진실하
다.
《눈에 띄우는/꽃잎 하나 피우지 못한채/벌써 오늘의 계절에/휘여질듯 서있는/옥수수…》
그것이 마치도 애기를 업고 서있는 어머니 같다는 말이다. 나는 아니 우리는 한평생 수없
이 옥수수를 보고, 옥수수밭을 지나다녔지만 누구도 그것을 애기를 업고있는 어머니에게
비유한 사람은 아직 없는걸로 알고있다. 이것이 바로 재치있는 시인의 눈이다. 범상한 일
상생활이나 사소한 사물에서 시의(詩意)를 발견할줄 아는 재간, 그것이 시인의 남다른, 독
특한 사고방식인것이다. 허련화의 《가을산》을 보자.

가을산은 언제든지 벗는다/못벗는건 나다//산은 벗어도 당당하고/나는 입고있어도 춥기만
하다.

이것이 시의 전부다. 모두 합쳐 4행시에서 얼마나 많은 사색을 자아내는가. 이것은 대단히
세련된 높은 수준의 시라 하겠다. 이런 시들을 어찌 수준이 낮은, 보잘것 없는 시라고 하
겠는가. 오늘 우리의 시단에는 이런 시들, 쟁쟁 소리나는 시들이 적지 않다. 더구나 이런
시들을 어찌 30년대 수준이라 하겠는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이 진짜 시
를 알고 하는 소리인지 의심하지 않을수 없다.

둘째, 이런 시들은 흔히 시적구상이나 발상이 기묘하다. 김영춘
의 《8월의 호수가를 거닐며》 같은 시는 진짜 명시라고 생각한다. 8월의 호수가를 거니는
《나》는 한마디 《은빛잉어》가 되고싶다고 한다. 《물속에 숨어 그대를 지켜보는/자그
마한 꿈이고싶다》고 한다. 《그러다 서글피 읊조리는 그대 사랑시/나를 부르는 예쁜 미끼
라 믿어질 때/그대 사랑의 낚시를 텀벙 물고/행복한 죽음으로 그대 손에 이르고싶다》고
한다. 행복한 죽음으로 그대 손에 이르고싶어하는 잉어의 심정, 매우 심각한 의미와 철리
를 내포하고있는 사랑시라 하겠다. 고금중외 수많은 시인들이 사랑을 노래했지만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지어는 비장한 사랑을 형상적으로 재치있게 노래한 시는 매우 드물다. 얼마
전에 나는 초청을 받고 세계시인대회에 참석한적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노벨상수상자도 있
고 각국의 저명한 대표시인들이였건만 각자 랑송하는 자작시들중에서 내 가슴을 쿡 찌르는
시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시란 절대로 미신할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
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좋은 시들을 쓰고있는가. 그들은 절대 얕잡아보아서는 안될것이다.
세계적인 수준이라는것도 상대적이지 결코 절대적인것은 아니다. 북데기속에 알맹이가 있
다는 농민들의 말은 실로 명언이라 하겠다. 우리의 평론가들은 이런 《알맹이》를 골라낼
줄 알아야 하고 그 싹을 부추켜 키워줄줄 알아야 할것이 아닌가!
이런 견지에서 나는 진짜 젊은이들의 《명시선》을 따로 하나 펴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언젠가 낚시군의 시를 시도해본적이 있는데 김영춘시인처럼 그렇게 심각한 시의를 발견하지 못하고 포기한적이 있었다. 낚시군과 물고기, 이는 본래 모순의 량극이다. 그런데 그것을 《행복한 죽음》으로 통합시켜 사랑이 주제를 고도로 승화시켰다. 이 얼마나 기묘한 시적전환인가. 실로 보통솜씨가 아니다. 우리가 얼마쯤 어떻게 써야 《세계수준》이라고 할수 있을가. 도대체 《세계수준》이란 어떤걸 두고 하는 말일가. 우리는 그런걸 쓸수 없단 말인가. 너무 허무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셋째로는 이 시들이 삶의 밑바닥을 훑고있다는 점이다. 진솔한 시들이 특징적이다. 시의
진짜 감칠맛은 생활의 밑바닥에 있다. 감정의 솔직한 고백이라 할가. 이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이는 시를 써본 사람만의 체험일것이다. 흔히 좋다는 시들은 솔직한 멋에 있다. 생
활의 진실, 인간 내면세계의 발굴, 진솔하고 소박하고 가식없는 시어의 고백, 고금중의 명
시들에는 이런 색채가 농후하며 복합적으로 표달되고있다. 시의 공명이란 왕왕 시인의 체
험이 독자 체험의 공감대에서 이루어지는것이다. 공명―공감―체험의 공감대, 이것들이 어
찌 보면 유기적인, 자연적인 통합에서 이루어질 때가 많다.
윤영애의 《늙은 량주》 참 실감이 나는 시라 하겠다.

《돌아보면 안해란/꼭 지난가을에 장독밑에 묻어/절인 무오가리 같은 존재/안해에게 난 무
엇일가/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본다/면도칼 갈던 성미에도 녹이 쓸어/흰수염 몇오리 턱밑에
말라붙어있고/아무렇게나 남은 이발 몇대/겨우내 이마를 벽에 쪼으며/처마에 매달려있는/
삶은 강냉이 같은 존재가 아닐가》

이 시에서는 군때 묻은 늙은 량주의 몸내가 진하게 풍긴다. 가식없는 삶의 묘사, 실감나는
생활의 향기, 누구나 보고 아, 그렇다! 하고 동감이 온다.
《싸― 하게 맞혀오는 매운 성미/먹은 뒤에도 오래동안/입안에 여춤이 남아돌게 하는 녀자
/언제나 귀벽을 긁어주는 칼칼한 목소리/까드득―까드득―/이발이 저리게 하는 녀자》누구
나 체험하고있는 늙은 량주다. 밉고도 고운, 싸움을 하면서도 헤여질수 없는 령감 로친,
한뉘 원쑤라고는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한시도 떨어질수 없는 사이, 《까드득―까드득》이
를 갈면서도 밤이면 등을 긁어주며 살아가는 늙은 부부… 삶의 밑바닥을 긁어대는 시란 명
시가 아닐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시는 현대 한국시에서도 찾기가 힘들다. 공연히 자
기걸 너무 얕잡아보지 말아야 할것이다.

박정웅의 《자화상》도 상당히 멋지다.
《그림자처럼/무시당하고 짓밟히는 사람/마침내 자신이/그림자로 되여가는 사람》이 세상
에는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외롭고 지쳐보이는 사람》… 불운한 사람, 많
고도 많은 서민층의 군상을 불과 8행밖에 안되는 단시에 매우 잘 개괄하였다. 많은 내용을
짧게 표달하는 재간, 이것이 시의 본질이 아닌가. 한족들은 이것을 함금량(含金量)이라
한다. 짧은 시행에 금싸락 같은 값진것이 많이 포함될수록 좋다는 말이다. 시는 되도록 짧
게 써야 한다. 튕기면 챙챙 소리나는 언어, 값비싼 금속품이라야 한다. 여위여진 하늘을
짜면서 내린다는 김선희의 《비》, 사랑이란 두글자는 한획만 틀리게 씌여져도 글자마다
아파한다는 림금산의 시, 단 3행 시에서 독자들은 많은것을 사색하게 된다. 《밤마다/그녀
의 깊어가는 방으로/발자국 한줄이 곧추 뻗어가건만/그녀의 옆 빈자리는 시종 메워지지 않
는다》는 박문봉의 《과부》, 모두 함축된 생활의 진실이다.

《명금의 시작은 굵고/끝은 가늘다》라고 시작한 리성비의 《손금》도 매우 철리적이다.
비늘 떨어진 상처투성이 몸으로 강을 거슬러 지느러미 젓는 연어의 삶을 통해 사람들은 많
은것을 생각하게 된다. 시인의 재간은 자기가 말하지 않은 깊은 함의를 독자가 생각하게
하는것이다. 이것을 만약 줄글로 쓴다면 아마도 긴 소설이 될것이다. 독자가 음미하도록
사색을 이끌어주는것이 시의 공능이라 할가. 아무튼 시는 하나의 공명통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명시집에 수록된 젊은이들의 시에 티가 없는것은 아니다. 많은 주옥속에 간혹 티도
보인다. 미숙한것들이 있다는 말이다. 발견은 잘했고 시작도 잘 뗐는데 그것을 더 깊이 피
지 못하고 파다가 만것 같은 아쉬움이 가끔 보인다. 좀더 사색을 무르익혔더라면 진짜 명
시가 될번한것들이 있어 읽는 사람은 안타깝게 한다. 좋기는 많이 생각하고 짧게 쓰는것이
상책이다. 그리고 내가 잡지들에서 본 젊은이들의 좋은 시들이 여기에 수록되지 못했음이
아쉽지만 그거야 사람마다 보는 각도와 취미가 다르니 하는수 없는거고. 문제는 우리 선
배들이, 평론계가, 그리고 전 사회가 원예사가 되여 두각을 나타낸 새싹들을 잘 키우는것
이다.

가끔 우리의 신문 잡지들에 젊은이들의 좋은 시가 선보이는데 사람들은 여기에 너무
무관심하고 반응이 없다는 섭섭한 생각이 든다. 망울을 터친 이쁜 꽃은 끝까지 가꾸어야
하고 튕겨진 불꽃은 거기에 불이 달리게 해야 한다. 흔히 기성작가에 대한 분촌 없는 지나
친 평가나 지어는 우상화하는 문장은 많아도 신진작가나 시인을 고무하고 보듬어주고 이끌
어주는 따뜻한 평론이 적은것은 하나의 유감이 아닐수 없다.

우리가 모두 원예사가 되자. 그리고 알심들여 새싹을 키우자. 없다고 낮다고 나무리지만
말고, 알짜를 골라서 키우는 작업 다 같이 하자. 오늘의 기성작가나 시인도 옛날에 다 그
렇게 한걸음한걸음씩, 남의 손목에 이끌려 자라나지 않았던가. 그래야 우리 민족의 문단에
희망이 있게 되고 21세기에 우리 민족시단에 새로운 명인이 나타나게 될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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