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寂)의 이야기

  • 허동식
  • 조회 9457
  • 기타
  • 2007.03.2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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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오랜 세월
비물이 흘러 개천이 되고
개천이 모여 하천이 되여
그 흐름에
험상궂게 침식된
깊고 깊은 협곡에 갔다

빛은 꽤나 밝았으나
해는 없고
좌우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만이
괴괴한 적을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무거워지는 마음을 달래려고
휘파람도 불고
발도 굴러보았지만
적은 깊어가기만 하였다

그래서 사방을 둘러보니
협곡이 끝나는 멀리에
검은 언덕이 하나 보이는듯 하여
나는 협곡을 떠나기로 하였다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무릎도 깨였고
피도 많이 흘렸다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가
굶주림과 피곤을 이겨내고
마침내 검은 언덕 아래에 이르러
환성을 길게 올렸다

하지만 그곳도 엮시
오랜 세월 바람에 조각된
밋밋한 호선의 흐름뿐이였다
풍화된 적의 계속이였다

이제는 어떻게 할가
어디로 가야할가
또 휘파람이나 불어볼가
발이나 굴러볼가
모진 실망끝에
나는 길게 망설이고 있었는데

바로 그 순간
적의 언덕 적의 나무 한그루에서
새 한마리가
적의 하늘을 푸드득 날아오르며
내 마음의
적의 이야기를
산산히 박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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