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곡야경삼매

  • 김형효
  • 조회 3471
  • 2005.09.1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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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할 길(吉) 골 곡(谷) 마을 리(里);
길곡리를 따라가다보면 맑은 물이 흐른다.
그 곡을 이룬 산등성이를 바라보면
무한한 위엄을 느끼게 된다.
밤이 깊어지면 그 산과 곡을 따라
천지가 깊이 잠드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잠을 청하는 천지를 따라
세상살이 시름을 잊고 함께 잠드는 나를 본다.

나는 그 순간 길곡리 산아래서 천지가 된다.
천지가 어깨를 펴고 천지가 잠에 빠져들 때
나도 여지없이 어깨를 펴고 잠에 빠져들게 된다.
천지가 창조하면 나도 창조된다.
산 허리 어딘가에서 안개를 만들어낸다.
난 그 모습에 취해 나도 안개심을 따르고 싶어진다.

안개의 마음, 그 안개 바라보면 난 객이 된다.
그러나 길곡에서 안개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다보면
나는 절로 안개가 된다.
나는 안개의 중심이 되어 안개의 마음을 따라
산을 휘감는 안개의 속사정을 알아차릴 것 같다.
그러나 알아도 알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안개의 마음인 듯하다.

차분히 차분히 촌로의 마음처럼
지체된 걸음걸이 넌지시 바라보며
깊고도 깊은 사색에 잠겨든다.

그렇게 밤이 이슥해지며
산과 들이 계곡을 만나고 물을 이룬다.
달빛과 별빛이 창조하는 만남과 만남 속에
찬란한 환희의 절정을 만끽하고
산과 들과 계곡은 서로 서로 깊이 맺혀돌고
서로를 애무하며 안개를 이루고
물을 만들고 곡식을 영글게 하고
그렇게 가을을 풍요롭게 울긋불긋 물들인다.
청년도 따라 진홍빛 순정을 차지하려는 듯,
들녘의 풍요로움에 절정의 고독을 느낀다.

밤이 오면 어둠이 짙다.
밤이 오면 천지가 고요하다.
밤이 오면 음악소리 찬란하다.
밤이 오면 별과 달과 하늘이 하늘 길을 낸다.
그렇게 나도 짙어지고 고요해지고 찬란해진다.
그렇게 나는 나의 길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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