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목요일 나는 서울에 올라가 시민단체 사람 몇몇과 만나
이런 저런 어수선한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내가 만든 한우리 연극 영화 비평회에
오리엔테이션이 있어 잠깐 참석 인사를 마치고
바로 문학등산반이라는 모임의 계룡산 산행에 동참 하기로 하였다.
대학로에서 출발하기전 반갑게 맞아준 선 후배와의 만남은 언제나 정겹다.
우리 일행은 주말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비는 대학로를 외면하고
충남 계룡산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나는 이효영 선배와 모처럼 단둘이
이런 저런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도 곁들이면서...,
계룡산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여장을 풀고나서 곧바로 문학토론이 진행되었다.
토론이 진행되기 10분전이나 되었을까?
이효영 선배와 문학등산반 회장이 이야기를 나눈 후,
내게 짧은 시간 문학 강연을 해줄 것을 청했다.
마치 내가 사주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효영 선배와 함께 현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나는 왠지 찜찜했다.
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청이었다.
그래서 짧게 하기로 하고 강의를 준비했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짧은 시간의 강의 일수록 엑기스가 있어야 할 터인데,
걱정스러웠지만,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문학일반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자족하기로 했다.
그냥저냥 토론이 끝나고 짧은 토론에 한마디 곁들여두고
나는 곧 선배들 소개에 이은 강의를 시작했다.
"도발하라! 도발하지 않은 자는 죽은 자다."는 주제의 강의였고,
그것은 내가 활동하며 느끼는 문학적 편린이 곁들여 설명되었다.
후배들에게 미안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뭐 사실 특별히 미리 준비한다고 다를 것도 별반 없는 것이 아닐지.
아무튼 적극적으로 문학활동을 해 나갈 것을 독려하는 의미의 강의였다.
그렇게 주어진 시간을 마치고 준비된 저녁식사를 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취기가 감돌아 잠을 청하고 잠에서 깨어난 시간은 새벽 3시40분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그냥 잠이나 잘 것을...,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생리적 현상을 참아낼 수 없었으니 어쩌랴!
선 후배간에 극단적 교섭이 시작된 것이다.
극단적 협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괴로움을 덜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을 어쩌랴!
아침이 어수선하게 정리되고 남후
산신께 밤의 무사치 못한 진실에 대해 사죄를 올리고
선 후배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이어서 산행길로 이어졌다.
오랫만의 산행이라서 그런지 낯설다.
산수유 꽃이 봄빛을 드러내는 계룡산 자락을 거슬러 오르며
100년만에 눈사태로 어수선한 절망처럼 꺾인 아름드리 나무들을 보면서
자연의 무사함이 인간에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급하게 발길을 옮기며 가능한한 봄산의 기운을 찬찬히 더듬거려 올랐다.
일행과의 대화는 밤의 원죄 때문에 가급적 멀리했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한 사고를 친 것은 아니지만,
선배라는 입장이 이토록 불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생소한 경험이다.
아무튼 산행길에 대구에서 전통무예 기천문을 수련하고 있는
친구 김병권에게서 울려온 손울림통을 받아들고 이야기 나누다
민박집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발길을 되돌렸다.
그렇게 내리막길을 재촉하여 하산도중
한 아이가 서글피 울고 있는 것을
산에 오르던 할아버지 일행이 달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알고보니 아이가 어머니를 잃고 울고 있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일행은 그냥 오르던 산길을 그만 두고
아이 엄마를 찾아주려고 하산 하시려 했다.
그래서 내가 자청하여 아이를 데리고 하산하였다.
다행히 20분 정도 하산 하던 도중 아이의 어머니가 나타난
흡족한 기분으로 하산을 재촉하였다.
30분 후 다시 민박집에 도착하여 친구를 만났고,
실향민이 경영한다는 북한식 만두집에서 만두국으로 식사를 마치고
그 동안 친구가 지내온 이야기며 내가 지내온 이야기 들을 주고 받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 들에 대해서 심중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곁들여 이야기를 나눈 후,
근처에 전통 찻집을 찾았다.
주모라 해야할 지
차 시중을 드는 다모라 해야할 지
아무튼 그날은 차를 마셨으니 다모라 하자.
다모의 정겨운 말수발까지 받아가며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에 대한 반가움을 갔고 헤어졌다.
다시 민박집에서 후배들이 술 한잔을 청해서 이래저래
다시 대통주라는 입맛 좋게 목구멍을 채우는 술기운에
몸이 풀어지고 마음도 풀어져서 후배들과 선배들에게 너스레로 인사를 더했다.
모두에게 커피한잔씩!
그렇게 시산제를 곁들인 문학등산반과의 일정을 마쳤다.
인사치레로 시 한편
험한 산처럼
김형효
산은 멀었다.
사람 마음만큼 어렵지는 않지만,
산은 멀었다.
사람의 마음 속을 헤아리지 못하지만
버거운 산길
사람들은 무난히 걸어왔다가 말없이 돌아간다.
사람은 멀었다.
산만큼은 아니지만
눈 앞에 어른거리는 불가시적인 것들에 갇혀
사람은 멀었다.
눈 앞에 가물거리는 불가해한 것들에 갇혀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과 자신 속에 갇혀
목메일 줄 모르고 거친 비바람 눈보라에 꺾인 소나무를 보고서도
사람들은 여유만만 성질만 부리다 하루 해를 넘겼다.
아깝다.
벗처럼
김형효
먹물 두 방울이 박혀 있다.
그녀의 흰 저고리와 검은 몸통바지가 꼿꼿하다.
먹물 두 방울이 찬란하게 빛났다.
한 마디 두 마디 살결처럼 부드럽게
내 마음 안에 감겨든다.
그녀의 입말을 보면서
그녀의 눈말을 보면서
그녀의 몸말을 보면서
그렇게 나의 말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겁주지 않은 말에 진정으로
나의 말도 행복을 추구하며 편했다.
그렇게 나는 차보시를 받았다.
나는 그렇게 산행 후의 행복을 추구하였다.
이런 저런 어수선한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내가 만든 한우리 연극 영화 비평회에
오리엔테이션이 있어 잠깐 참석 인사를 마치고
바로 문학등산반이라는 모임의 계룡산 산행에 동참 하기로 하였다.
대학로에서 출발하기전 반갑게 맞아준 선 후배와의 만남은 언제나 정겹다.
우리 일행은 주말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비는 대학로를 외면하고
충남 계룡산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나는 이효영 선배와 모처럼 단둘이
이런 저런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도 곁들이면서...,
계룡산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여장을 풀고나서 곧바로 문학토론이 진행되었다.
토론이 진행되기 10분전이나 되었을까?
이효영 선배와 문학등산반 회장이 이야기를 나눈 후,
내게 짧은 시간 문학 강연을 해줄 것을 청했다.
마치 내가 사주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효영 선배와 함께 현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나는 왠지 찜찜했다.
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청이었다.
그래서 짧게 하기로 하고 강의를 준비했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짧은 시간의 강의 일수록 엑기스가 있어야 할 터인데,
걱정스러웠지만,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문학일반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자족하기로 했다.
그냥저냥 토론이 끝나고 짧은 토론에 한마디 곁들여두고
나는 곧 선배들 소개에 이은 강의를 시작했다.
"도발하라! 도발하지 않은 자는 죽은 자다."는 주제의 강의였고,
그것은 내가 활동하며 느끼는 문학적 편린이 곁들여 설명되었다.
후배들에게 미안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뭐 사실 특별히 미리 준비한다고 다를 것도 별반 없는 것이 아닐지.
아무튼 적극적으로 문학활동을 해 나갈 것을 독려하는 의미의 강의였다.
그렇게 주어진 시간을 마치고 준비된 저녁식사를 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취기가 감돌아 잠을 청하고 잠에서 깨어난 시간은 새벽 3시40분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그냥 잠이나 잘 것을...,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생리적 현상을 참아낼 수 없었으니 어쩌랴!
선 후배간에 극단적 교섭이 시작된 것이다.
극단적 협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괴로움을 덜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을 어쩌랴!
아침이 어수선하게 정리되고 남후
산신께 밤의 무사치 못한 진실에 대해 사죄를 올리고
선 후배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이어서 산행길로 이어졌다.
오랫만의 산행이라서 그런지 낯설다.
산수유 꽃이 봄빛을 드러내는 계룡산 자락을 거슬러 오르며
100년만에 눈사태로 어수선한 절망처럼 꺾인 아름드리 나무들을 보면서
자연의 무사함이 인간에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급하게 발길을 옮기며 가능한한 봄산의 기운을 찬찬히 더듬거려 올랐다.
일행과의 대화는 밤의 원죄 때문에 가급적 멀리했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한 사고를 친 것은 아니지만,
선배라는 입장이 이토록 불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생소한 경험이다.
아무튼 산행길에 대구에서 전통무예 기천문을 수련하고 있는
친구 김병권에게서 울려온 손울림통을 받아들고 이야기 나누다
민박집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발길을 되돌렸다.
그렇게 내리막길을 재촉하여 하산도중
한 아이가 서글피 울고 있는 것을
산에 오르던 할아버지 일행이 달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알고보니 아이가 어머니를 잃고 울고 있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일행은 그냥 오르던 산길을 그만 두고
아이 엄마를 찾아주려고 하산 하시려 했다.
그래서 내가 자청하여 아이를 데리고 하산하였다.
다행히 20분 정도 하산 하던 도중 아이의 어머니가 나타난
흡족한 기분으로 하산을 재촉하였다.
30분 후 다시 민박집에 도착하여 친구를 만났고,
실향민이 경영한다는 북한식 만두집에서 만두국으로 식사를 마치고
그 동안 친구가 지내온 이야기며 내가 지내온 이야기 들을 주고 받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 들에 대해서 심중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곁들여 이야기를 나눈 후,
근처에 전통 찻집을 찾았다.
주모라 해야할 지
차 시중을 드는 다모라 해야할 지
아무튼 그날은 차를 마셨으니 다모라 하자.
다모의 정겨운 말수발까지 받아가며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에 대한 반가움을 갔고 헤어졌다.
다시 민박집에서 후배들이 술 한잔을 청해서 이래저래
다시 대통주라는 입맛 좋게 목구멍을 채우는 술기운에
몸이 풀어지고 마음도 풀어져서 후배들과 선배들에게 너스레로 인사를 더했다.
모두에게 커피한잔씩!
그렇게 시산제를 곁들인 문학등산반과의 일정을 마쳤다.
인사치레로 시 한편
험한 산처럼
김형효
산은 멀었다.
사람 마음만큼 어렵지는 않지만,
산은 멀었다.
사람의 마음 속을 헤아리지 못하지만
버거운 산길
사람들은 무난히 걸어왔다가 말없이 돌아간다.
사람은 멀었다.
산만큼은 아니지만
눈 앞에 어른거리는 불가시적인 것들에 갇혀
사람은 멀었다.
눈 앞에 가물거리는 불가해한 것들에 갇혀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과 자신 속에 갇혀
목메일 줄 모르고 거친 비바람 눈보라에 꺾인 소나무를 보고서도
사람들은 여유만만 성질만 부리다 하루 해를 넘겼다.
아깝다.
벗처럼
김형효
먹물 두 방울이 박혀 있다.
그녀의 흰 저고리와 검은 몸통바지가 꼿꼿하다.
먹물 두 방울이 찬란하게 빛났다.
한 마디 두 마디 살결처럼 부드럽게
내 마음 안에 감겨든다.
그녀의 입말을 보면서
그녀의 눈말을 보면서
그녀의 몸말을 보면서
그렇게 나의 말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겁주지 않은 말에 진정으로
나의 말도 행복을 추구하며 편했다.
그렇게 나는 차보시를 받았다.
나는 그렇게 산행 후의 행복을 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