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의 노랫소리가 곧 울려 퍼질 것만 같은 광야에 정적

  • 김형효
  • 조회 3173
  • 2005.09.05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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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진국(?) 중국에 대한 환상을 가졌다는 생각을
 
 
동창이 밝다. 늦은 저녁이라 만나자 마자 잠자리에 들다시피 했다. 회포(?)를 풀기에는 모자랐다. 선생께서는 어제 못한 이야기를 바로 이어가신다. 조선족 시인선집이 출간된 이야기, 한시선집이 나온 이야기를 하였다. 말씀도중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

식사가 끝난 후, 연변대학교 조선어문계 권철 교수님과 전화로 인사를 나누었다. 조만간 틈을 내서 만나기로 하였다. 한결같이 깍듯하신 선생님들이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게 한다.

다시 이야기가 이어진다. 자살한 시인이야기,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족 시인들의 이야기를 하소에 가깝게 풀어놓으신다. 선생님의 말씀마다 아쉬운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계속 말씀을 이어가신다.

"제나라 황제가 화공을 불러 묻기를 무엇이 가장 그리기 어려운가? 질문을 던졌더니, 화공이 답하기를 사람이라 하고, 무엇이 가장 그리기 쉬운가 물었더니, 화공이 답하기를 도깨비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도 본적이 없는 도깨비는 아무렇게나 그려도 되지만, 사람의 마음속이란 보여주었다 해도 시시때때 그 사유의 영역과 깊이가 달라지기 때문에 감량이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이는 조용남 선생님 당신이 시의 이즘에 대한 나름의 해설의 방법으로 내게 들려주신 것으로 필자는 이해하였다.

이는 오늘날 시작현상에 대한 풍자를 반어적으로 하신 말씀인데, 작가란 사람들이 이즘이 어떻고 하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쓰고 있다는 말씀도 곁들였다. 심지어 자신조차 무슨 글을 어떤 의미로 써내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창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연변의 조선족 문단에서도 논쟁점이 되고 있다고 한다.

작가가 스스로 이미지즘에 매몰되어 허덕이느라 자신이 쓴 작품자체에 대한 의미해석조차 못하는 시적 현실에 대한 개탄스런 감정을 토로하시는 것이었다.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하염없다. 선구자의 노랫소리가 곧 울려퍼질 것만 같은 광야에 정적, 오늘은 마땅하게 가이드할 사람도 없고 해서 집에서 쉬기로 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선생께서 먼저 식후 아침 잠을 청하신다. 나도 따라 스멀스멀 감겨드는 눈꺼풀을 주체할 재간이 없어 잠을 청하였다.

선선한 날씨다. 창밖에 기차가 지나갈 때면 기적소리가 요란하다. 광야에 울려 퍼지는 기차의 기적소리는 정적을 가르는 선율로 그 길을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선이 굵게 들린다.

선생님은 아침 한나절의 낮잠에서 깨어나 바로 <조선족 20세기 시문학선집>을 가져다 주셨다. 수많은 작가들의 생소한 문학작품을 대면한다. 그들의 작품을 대하며 정갈한 마음의 깊이로 그들을 받아 안아야 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세안이라도 하고 작품을 읽어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작품을 대할 때마다 면면이 민족적 기개가 넘치고 강직한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연 많은 시인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보면서 애상에 젖는다.

눈에 빛이 나게 작품을 읽어가다가 2000년 여름 연변대학에서 만났던 학생들과 연락을 취했다. 마침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그들도 휴일을 맞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세 친구가 함께 연락해서 곧 선생님 댁으로 오기로 하였다. 보름간의 짧은 여행을 허비할 수 없어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지난 이야기도 나누고 학교에서 배우는 이야기도 나누기로 하였다. 물론 서점구경도 함께 할 요량이었다.

한시간이 채 못되어 학생들이 조용남 선생 댁에 도착하였다. 그들과 만나 이런 저런 인사를 나누고 선생님을 소개하였다. 선생께서는 학생들이 선생님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랫말을 기억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셨다. 어린 시절 세 학생들이 불렀던 동화에 선생님이 쓴 시편들이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과 선생님은 즉시 친근감을 갖고 한참을 이야기 나누었고, 선생님은 당신의 시집을 한 권씩 선물하였다.

비가 내리지만 그냥 하루를 허비할 수 없는 데 서로 동의하고 연길에서 제일 큰 서점인 신화서점을 향해갔다. 몇권의 책을 구입하고 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가슴 아픈 것은 "한국인이여! 상놈이 되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이 책은 오늘날 연변의 조선족 사회에서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필자가 책을 읽어본 바로는 책을 쓴 저자의 주관적인 경험을 지나치게 보편화, 일반화하여 한국사람들은 모두 다 못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우리들 입장에서 심각하게 그가 제기한 문제를 받아 안아야 하리란 생각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번 연재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연길시의 최고 냉면집으로 알려져 작년에도 들렸던 진달래 냉면집을 찾았다. 냉면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다시 선생님 댁으로 와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참 동안 대학 생활과 한국에 대하여 그리고 민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선생께서는 학생들을 민족 문학원에 초대하셨다.

연변민족문학원은 연변작가협회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조선족 직장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창작교실이다. 우리로 보면 문학아카데미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나는 그들을 나중에 만나기로 하고 배웅하였다.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인가? 그들을 배웅하고 나서 카메라와 메모한 수첩이 든 여행용 가방을 잊어버린 것을 알았다. 스스로 챙겨들고 나간 여행용 멜가방이었다.

조용남 선생님은 가방을 찾기 위해 알고 있는 방송국 관계자, 연변대학교 직원 등등 여러모로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마침 연길에 와있는 석화 시인에게 연락을 해서 경찰을 찾아가 사연을 전하기로 하고 찾을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런데 후진국 중국에 대한 환상을 가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화서점에서 만나 연길시 공안국을 찾아갔다. 근무경찰관은 청사 정문 초소 안에서 이불을 덮은 채 누워있는 것이다. 몇 차례 불러 깨우니 겨우 몸을 가누며 왜 귀찮게 구는가 싶은 표정으로 석화 시인과 알아들을 수 없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자리에 눕는다. 사실 우리를 쳐다보는 것도 아니다. 우리네 경찰의 불친절과 오만한 근무태도를 문제삼지만 중국 경찰만 하랴. 어이없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발길을 되돌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냥 멜가방을 찾는 일은 체념하기로 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연변사람 20여명의 모든 연락처가 다 거기 있는데 이 어찌할 것인가? 참으로 다행인 것은 여권과 비행기표는 집에 두고 나갔던 것이다. 참 다행이다. 그렇지만 카메라가 든 가방을 잃었으니, 이번 여행을 어찌할 것인가? 참으로 난감할 뿐이다. 이번 연변 여행은 제2의 목적이 취재를 할 생각이었는데 카메라도 없이 무엇을 할까? 의기소침이 지나쳐 금방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참으로 답답하고 막막하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모두가 나의 부주의한 탓인 것을, 그렇게 마음 정리를 하고 내일은 도문엘 가기로 했다. 도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두만강을 불러댈 때의 중국식 발음에 따른 표기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두만인 것이다. 그곳에 사는 김영춘 시인과 김경희 시인 그리고 함께 할 수 있는 시인이 있으면 함께 만나볼 생각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한국인이여! 상놈이 되라!>는 책에 대해서 소개하기로 하겠다. 우리가 민족에 대해 갖고 있는 허위의식을 우리를 경험한 조선족 젊은 청년의 눈으로 해부해 보는 기회라 생각해도 될 것이다. 때로는 가혹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편협한 경험에서 오는 것이지만 엄연한 현실은 현실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비쳐볼 그 무엇인가 분명 그의 문제제기에는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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