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북한의 국경선을 넘어 조국의 북방을 이야기 듣다

  • 김형효
  • 조회 3350
  • 2005.09.05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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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족 아주머니가 전하는 북한이야기
 


잠이 깬 시간은 여섯 시 삼십 분이다. 한국에서의 나태한 생활태도로는 꿈도 못 꿀 시간에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시차를 감안하면 한국 시간으로 다섯 시 삼십 분이다. 아침 식사를 하고 바삐 짐을 챙기고 도문행 버스를 타기 위해 조용남 선생님과 함께 연길역 앞으로 향했다.

연길역에서 도문역까지 버스로 한 시간 삼십 분, 도문을 가기 위해 한국돈으로 3만3천 원을 환전해주기를 청했다. 어느 곳에서라도 환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작년 여행을 통해 알고 있어서 현금을 어느 정도 지참하고 다녔다. 그런데 환전을 해주는 사람들이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환전꾼이 없어서 조용남 선생께서 갖고 있던 현금 200위엔을 맞바꾸었다. 도문행 버스표를 끊었다.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혼자 버스를 타고 떠나는 여행길이다. 설레고 불안하고 마음이 한층 복잡하다. 도문, 낯선 이방인에게는 아! 방법 없는 답답함이다. 마음속으로 되뇌인다. 공부해야 한다. 한마디 중국말도 못하면서 함께 타고 가는 조선족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길을 가는 것이다. 이것이 같은 민족에 대한 형체 없고 근거도 없는 신뢰감인가?

아무튼 도문역에서 김영춘 시인을 만나기로 하였다. 연길에서 도문까지는 한 시간 삼십 분이 걸린다. 그래 가자. 낯선 이방인으로 잠시 살며 선조들이 살았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땅을 함께 밟아보자. 찬찬히......

10원 50전! 두 장의 표를 받았다. 한 장은 버스표이고 다른 한 장은 승객보험용 영수증이란다. 조선족 아주머니께서 차에 타는 것을 보고 바로 함께 차에 탔다. 중국말을 할 수 없는 나로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고 그리 한 것이다. 낯선 여행지를 대하는 사람으로서 꼭 필요한 수단이었다.

아주머니는 54세이시며 연길에서 태어나서 결혼하여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신 분이란다. 그분의 따님은 한국의 부산으로 시집을 갔는데, 며칠 후에는 부산에 사는 시부모님과 7월 5일에 연길을 찾아온다고 했다. 그래서 당신이 백두산 여행이 가능하도록 백두산에 갈 버스표를 예매하러 오셨다가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전화로도 예매가 가능하지만 연길에 사는 친척들의 얼굴도 볼 겸해서 직접 오셨단다. 딸도 아들도 한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두 자식 모두 교원(선생님)으로 있다는데 딸은 부산으로 시집 가 살고, 아들은 지금도 도문(두만)에서 중고등 교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민족과 관계된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평범한 일반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민족이란 어떤 것인지 그 정체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북한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의 친척 분들이 마침 북한에 살고 계셔서 네 차례 북한에 다녀오셨다고 한다. 김일성 수상이 있을 때 갔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살기 힘들다고 한다. 그리고 전에는 친척집까지 가서 투숙도 하고 여러 가지 전해줄 것을 전해주고 온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회관 같은 데서 면회 형식으로 밖에 만날 수 없다고 전했다. 물건을 전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한다. 쌀은 가지고 가면 검사한다 하면서 기관원들이 한 됫박씩 자신들을 위해 빼돌리고 맥주라도 따로 그 기관원들의 몫으로 가져다주어야 쉽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스팔트, 시멘트 콘크리트, 비포장도로 등등을 지나치며 도문길을 간다. 한국에 마을 버스 같은 차편의 운전기사는 수 차례 추월을 거듭하며 승객들을 불안하게 했다. 버스 운전기사들의 운전 습성은 어디가나 똑같은가 보다. 낯선 가운데 혼자서 버스를 이용하고 있으니 그 불안은 더하다. 긴 강줄기를 따라 도문에 도착하였다. 한참을 지나온 그 강은 두만강이겠지. 내내 그리 짐작을 하고 차안에서 상념에 잠겨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강을 건넌다. 알고 보니 그 강은 중국에 큰 하천인 가야하(伽倻河)였다.

도문역 광장에 버스가 도착하였다. 참으로 드넓은 광장이다. 나는 한국에서 이렇게 넓은 역 광장을 보지 못했다. 서울역 광장은 길쭉하지만 이렇게 드넓지는 않다. 더구나 요즘에는 주차장까지 들어서 있지 않은가?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의 축구장 크기 만한 역 광장이다. 도문역에 나와 있을 줄 알았던 시인들이 보이지 않아 걱정이다. 금세 역 안으로 들어가 핸드폰 요금 50전을 지불하고 공중전화를 걸었다. 금세 연결이 된다. 바로 역사 앞에 와있다는 것이다.

김충(김영춘) 시인이 나타났다. 인사를 나누고 바로 도문으로 향했다. 변경, 두만강 다리,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을 밟고 선다. 잠시라도 선을 넘어 북한에 다녀왔다. 촌각의 시간 동안, 중국측에서 관광객들에게 돈을 받고 사진촬영 장소로 제공한 곳이다. 변경이라 쓰여 있는 입간판들을 보며 씁쓸한 감정에 갇힌다.

그러나 어쩌랴 이렇게라도 분단된 조국의 북방을 체감하고 싶은 것을. 50위엔을 주고 관람허가를 받는다. 사진촬영도 할 수 있다. 두만강 다리 중국편에는 높은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에서 옥반지 등의 관광상품을 팔고 있는 판매원 정아무개 씨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다. 22세의 조선족처녀다. 그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기념품을 팔아 그 성과급을 받는다고 했다. 아침 5시 30분에 출근해서 저녁 6시가 되어야 일을 끝마친다고 하니 그리 편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니다. 참으로 고된 일과다. 그러나 그의 밝은 표정을 보니 참 예쁘고 고운 처자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가 고된 가운데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해 보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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