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에 들어가면서
99년 7월부터 통일을 향한 발걸음들을 찾아 나서기로 하고 《문화발전소》라는 출판사 등록을 하고 격월간 『시와 혁명』이란 제호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나 『시와 혁명 시선집』을 내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 시집이 정춘근 시인의 『지뢰꽃』이다. 그러저러한 연유로 정춘근 시인의 시편을 상세히 읽어왔고, 시인과의 만남도 잦아졌다.
디지털 말의 새로운 출발과 함께 통일을 위해 통과의례로 이해하고 넘어서야 할 문화적 인식태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간직해야할 문화적 인식 태도에는 현실을 직시해내는 인식의 깊이가 있는 것이라 믿는데 여기 철원이라고 하는 삼팔 이북의 지역적 특성 속에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을 상세히 읽어가며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 또한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정춘근 시인이 체험의 현실 속에서 얻어낸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드러내 보여준 철원, 분단 한반도의 자화상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의 걸음이 가볍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춘근 시인이 주의 깊게 보았던 것, 주의 깊게 강조 하고자 하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가 주는 것이 필자로서 해야할 책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실 정춘근 시인은 주의주장하지 않는 결함(?) 같은 것이 있다. 넌지시 제시하고는 금방 숨어버리듯 하는 말법이 그런 혐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가 시작(詩作)을 하는 데 있어서 자신과 일체된 모습을 보이는 점이 바로 그 점이기도 한데, 그는 이야기 할 것을 그저 묵묵히 이야기 할 뿐, 그것을 강조하고나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철원에서 살면서 보고 체험하며 느끼고 살아온 자기 진실성에 바탕에서 자신의 손길이 움직인 곳을 따라 마음을 움직여가며 철원의 서정을 담아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런 그의 특성은 시적 객관성과 보편성을 확보해주고 있는 것인데, 시에 대한 문외한(門外漢)이라도 그의 시를 읽어내는 데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의 문학 현실에서 수많은 시인들이 난해하고 버거운 시적 세계에 심미적으로 도취되어서 독자들을 "소를 강가로 몰고 가서 마시기 싫다는 물을 강제로 마시게 하려는 듯한"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독자의 유별나고 뛰어난 독법으로나 요즘 시인들의 시를 읽어낼 수 밖에 없게 되어 버렸다.
다르게 말하면 아무렇게나 읽으면 된다는 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해내지 못하면 시 한 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가 하는 횡포로 독자를 몰아세운다. 달리 말해 모든 독자를 고문(?)하는 형국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이 널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히려 아무라도 알 수 있는 이야기 모두가 말하고 행하고 나서야 할 것들을 등한시함으로써 시인적 삶을 내팽개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 당대의 문제를 당대에 짚어나가지 못하는 시인이 미래를 어찌 예견하고 선자적(先者的)인 시세계를 펼쳐 나갈 수 있겠는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이제 현란한 수사의 세계에 미혹되지 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바라보고 이해하며 나중의 방책을 세워나가는 전제로서의 시인적인 모습을 살펴 읽어나가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조건으로 오늘 정춘근 시인의 시집 『지뢰꽃』이 우리의 현실에서 반드시 인식하고 가야할 또 다른 상식을 업그레이드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을 하면서 <『지뢰꽃』다시 읽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누가 지뢰꽃을 피우게 했는가?
정춘근의 『지뢰꽃』다시 읽기 (2)
「지뢰꽃」
월하리를 지나
대마리 가는 길
철조망 지뢰밭에서는
가을꽃이 피고 있다
지천으로 흔한
지뢰를 지긋이 밟고
제 이념에 맞는 얼굴로 피고 지는
이름 없는 꽃
꺾으면 발 밑에
뇌관이 일시에 터져
화약 냄새를 풍길 것 같은 꽃들
저 꽃의 씨앗들은
어떤 지뢰 위에서
뿌리내리고
가시철망에 찢긴 가슴으로
꽃을 피워야 하는 걸까
흘깃 스쳐 가는
병사들 몸에서도
꽃 냄새가 난다
정춘근의 시집 『지뢰꽃』에서
오늘 정춘근 시인의 시를 소개하면서 필자는 정춘근 시인이 노래한 지뢰꽃은 철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에 주목한다. 우리의 분단은 우리의 분단이지만 우리에 의한 분단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의 뜻에 의해서 삼천리 방방곡곡에 지뢰밭으로 퍼져서 지뢰꽃을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보여준 시인으로 김남주 시인이 있다. 김남주 시인은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노래하였다.
억새가 우거져야할 들판과 산야에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고
지뢰가 깔려 있어 그곳을 지뢰밭이라 하고
거기 피어난 꽃들은 위장한 꽃들이어서
꽃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지뢰꽃이라 불렀다.
세상에 무슨 놈의 꽃 이름이 그렇게 험상궂은가 반문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너무나 착한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질문할 것이다.
삼팔선이나 지뢰꽃이나 그 경계없음은 일치하는 현상이다.
정춘근 시인이 쓴 시 지뢰꽃을 보시라! 지천으로 흔하게 핀 꽃이 지뢰꽃이다. 그 지뢰꽃은 때때로 우리들 가슴에서 화(華)한다. 필 것이 피어야하는데 아니 그 피어서는 안될 그 지뢰꽃이 우리들 가슴에서 활짝 피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상실한다.
누가 지뢰밭을 일구게 했고 누가 지뢰꽃을 피우게 했는가? 우리는 그 실상을 올바로 인식해야할 때이다.
자식의 병역기피를 위해 발버둥치는 위정자들에게 고한다. 그들이 병역기피 하려고 발버둥칠 것이 아니라 병역제도 자체가 필요없는 사회를 조성하라고. 지뢰밭과 지뢰꽃이 필요없는 세상을 가꾸라고.
그러나 남의 탓만 하지 말자. 남의 탓 하다가 남에 의해 분단되었지 않은가? 남 탓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그 남을 두고 살지 않은가? 그 남에 의해 우리의 형제들은 그 지뢰밭가를 서성이고 있고 우거진 억새꽃이 위장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반길 때 두려움을 갖지 않는가? 멋드러지게 핀 억새꽃을 두려워 말자.
"고통스런 육신의 땅에 저주, 지뢰알"
정춘근의 『지뢰꽃』다시 읽기 (3)
저 쑥대밭에 지뢰는
알이 통통이 들었겠다.
서리하는 놈 없어
뿌린 대로 여물었겠다.
이제는 캐내
가마니에 담아 두었다가
껍질 벗겨
가마솥에 쪄 먹을까
맷돌에 갈아
부침개나 부쳐먹을까
썩은 놈은 울궈내
개떡이나 빚어 먹을까
떫은 놈은 처마에 매달아
곳감이나 해먹을까
그래도 남는 놈을
화분에 심어 놓으면
봄에는 꽃을 보려나
--정춘근의 시 <지뢰알>
토실토실한 밤을 쪄먹는 것도 아니고, 고구마를 쪄먹는 것도 아니다.
파의 향긋한 맛을 따라 부쳐먹는 파전을 부치는 것도 궁핍한 한 시절의 토방 마루에 걸터앉아 나긋한 햇살을 받으며 둘러앉아 도란대는 맛으로 먹던 보리개떡을 빚어 먹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오늘 지뢰알을 소담스럽게 캐내어 무슨 대단한 수확이라도 거두는 것처럼 위장(?)하고 담아두었다가 가마솥에 쪄먹을 것인지 부침개를 해먹을 것인지 고민하는 시늉은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시인이 천진스럽다고 하지만 그 정도를 어디까지 허용해야할까? 정춘근 시인의 이 시치미 떼기를 접하면서 아역배우의 앙증맞은 연기를 보는 듯하다.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에 어린 시절의 농촌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이 시를 읽어낸다면 아마도 아련한 향수에 젖을 법하다.
그러나 이 시의 주제가 결코 그런 향수에 젖어들 성격의 시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고통스런 육신의 땅에 저주처럼 내린 산물이 지뢰알 일텐데 정춘근 시인은 도대체 무슨 연유로 하여 이런 살벌한 소재에서 아련한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가 말하는 언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쓴 언어의 구조 아래 익살스럽게 깔린 회화적 요소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추억의 그림자를 먼저 연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긋지긋한 마음으로 차라리 쪄먹기라도 해서 파내 버리고 싶은 도발적 근성이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또한 그렇게 우리의 무장산천을 헤치고 나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해온 우리의 통일운동가나 평화운동가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은 어쩌면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화롯불에 앉아 할머니의 옛이야기 도란대는 숨결을 느끼며 지뢰알을 구워먹고 있거나 쪄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그렇게 통일을 가로막는 빗장이 하나하나 열려가고 있을 테니까.
우리들의 심장은 가시 찔린 허공
정춘근의 『지뢰꽃』다시 읽기 (4)
김형효 시인 tiger3029@hanmail.net
천지에 지뢰 투성이인가 했더니, 찬찬히 바라다보면 사방천지에 총알자국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오랜 관성에 묻혀버린 우리의 심장은 그런 거칠고 투박하고 모난 살기 어린 절규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이미 그러한 것으로 규정된 현실에 대한 공범적 묵인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도 서울에 버티고 있는 미군 사령부가 21세기에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주한미군철수를 외치거나 외세배격을 외치는 사람을 마치 사상적 결함이 있는 것처럼 매도하는 눈과 귀와 입이 너무나 많이 발달해 있다.
그런 연유로 우리가 우리의 주권을 외칠 때,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오랑캐의 심장을 간직한 오랑캐처럼 살아가길 원하는가? 분명 누구라도 그렇지 않음을 인식하고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철원의 옛 노동당사 건물
더 이상 방조 묵인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리고 그런 허위의 가면과 허위의 심장을 간직한 우리의 현실에 대한 적확한 해석의 일단을 우리는 정춘근의 시 「풀」을 통해 다시 한번 목도하게 된다.
「풀」
-노동당사
총알자국 포 구멍뿐인
벽 틈에 뿌리내린
풀에서는 빛이 난다
화약냄새 가시지 않는
콘크리트 벽을 움켜쥐고
잎새를 파랗게 갈아
분단의 하늘을 휘젓고 있는
이름 없는 풀의 생애가 아름답다
눈물나게 바라보는 우리는
나그네 일 뿐
이 노동당사의 주인은
폭염에 시들지 않고
반짝이는 작은 풀이다
풀의 타는 목마름을
내 심장의 피로 적셔주고 싶다
이제 우린 어느 위치에서야 하는가? 더 이상 눈물 뿌리는 나그네처럼 우리의 조국강토를 배회하지 말자. 굳건하게 바로 서서 우리의 주권을 바로 행사하며 살아갈 채비를 하자. 배우고 익혀서 내 눈과 귀를 상실한 채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예비할 미래란 없다. 노동당사의 검게 탄 심장 같은 흔적을 두고 우리가 또 다시 그렇게 불운한 질서를 허용한다면 그 불행의 상처는 다시 씻을 수 없을 것이다.
강원도 철원의 노동당사에도 비가 내리는가? 우리들 가슴에도 저문 뒤의 눈물같은 비가 내린다. 하지만 이제 그만 눈물을 멈추고 주권자로서의 미래, 자기 정체를 분명하게 하고 살아갈 미래를 예비하자.
지금 용산 기지에 미군의 아파트를 짓겠다는 허망한 망령 같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 주권국 수도 서울에 그들은 영구주둔을 목표로 아파트를 지을 속셈을 내세우고 있다.
더구나 대테러 전쟁의 극단적 세계질서를 만들어놓고 벌이는 짓이 이렇다. 더 이상 그들이 유령처럼 행세하는 것을 우리는 그냥 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단 한순간도 그들의 질서 안에서 벗어나 살 수 없는 현실이 오도록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풀」이 타는 목마름의 세월을 미연에 막자. 그리고 그 심장을 넘치는 활기로 가득 채우자. 그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공통적 삶의 질서가 되어야 하고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참 되게 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다.
시인의 괴변 나무랄 세상 언제일꼬?
정춘근의 시집『지뢰꽃』다시 읽기 (5)
「문혜리 가는 길」
가슴이 답답한 날에는
문혜리 사격장으로 가서
박격포 소리를 듣는다
귓속으로 날아든 폿소리는
뇌 중심에 정확히 떨어져
혼란한 생각을 몰아 낸다
입안 가득 고여 드는 폿소리는
식도를 타고 내려가
막혀 있는 가슴을 뚫고
창자 안에서 몸서리를 친다
자장가 대신 폿소리를
듣고 자란 오장 육부는
이미 군사 체질화되어 있다
문혜리 사격장에 가면
폿소리에 뿌리내린 아카시아에
훈장을 달아 주고 싶다
박격포 소리 들으며 응어리 풀어내?
아니, 무슨 놈에 세상이 가슴이 답답할 때 박격포 소리를 듣게 한단 말인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슴이 답답할 때, 청량 음료를 찾거나, 탁 트인 벌판을 찾거나, 강가를 거닐 것이다. 또한 바다를 찾거나 산등성을 오를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상식일텐데 어찌하여 상식의 가늠자에 배반의 자를 들이댄다는 말인가? 그것도 시인이......,
오늘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철원의 한 시인은 박격포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에 응어리를 풀어낸다는 말인가? 이 "해괴한 시인(?)"의 가슴에 조국이란 어떤 존재이며 평화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분단 조국의 하늘이 그렇게 만들었다면 분단을 해체하면 될텐데, 이 시대를 사는 동업자 시인들은 또 무엇을 노래하고 있단 말인가?
그는 이어서 "귓속으로 날아든 폿소리"가 "뇌 중심에 정확히 떨어져/ 혼란한 생각을 몰아낸다"고 노래하고 있는 데 이런 답답할 노릇이 어디 있단 말인가? 누가 이 시인을 이토록 처참하게 만들었는가?
반어적인 자기 성찰
급기야 시인은 고백한다. "자장가 대신 폿소리를/듣고 자란 오장육부는/이미 군사 체질화되어", "문혜리 사격장에 가면/폿소리에 뿌리내린 아카시아에/훈장을 달아주고 싶다" 훈장은 무슨 훈장이란 말인가? 그것은 반어적 자기 성찰인 것이다. 사실 이 반어적 수사는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성찰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기 혐오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의미로 연결 지어진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비주권자의 자기 망상적 도착증세를 보여주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우리가 상실한 주권을 시인의 도구인 시를 통하여 관망한 것이다. 그리고 비주권자인 존재에 대하여 타깃을 세우고 있는 시인의 칼끝이 결국 주권 회복으로 이어지길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아카시아에 훈장을 달아주고 싶었다라는 구절은 그러한 반어적 수사의 중심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타의에 의한 주권행사가 올바른 주권의 모습이 아니란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창자 안에 몸서리치고 있는 저 외세의 칼끝을 돌려 세워야 할 것이다.
99년 7월부터 통일을 향한 발걸음들을 찾아 나서기로 하고 《문화발전소》라는 출판사 등록을 하고 격월간 『시와 혁명』이란 제호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나 『시와 혁명 시선집』을 내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 시집이 정춘근 시인의 『지뢰꽃』이다. 그러저러한 연유로 정춘근 시인의 시편을 상세히 읽어왔고, 시인과의 만남도 잦아졌다.
디지털 말의 새로운 출발과 함께 통일을 위해 통과의례로 이해하고 넘어서야 할 문화적 인식태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간직해야할 문화적 인식 태도에는 현실을 직시해내는 인식의 깊이가 있는 것이라 믿는데 여기 철원이라고 하는 삼팔 이북의 지역적 특성 속에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을 상세히 읽어가며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 또한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정춘근 시인이 체험의 현실 속에서 얻어낸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드러내 보여준 철원, 분단 한반도의 자화상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의 걸음이 가볍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춘근 시인이 주의 깊게 보았던 것, 주의 깊게 강조 하고자 하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가 주는 것이 필자로서 해야할 책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실 정춘근 시인은 주의주장하지 않는 결함(?) 같은 것이 있다. 넌지시 제시하고는 금방 숨어버리듯 하는 말법이 그런 혐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가 시작(詩作)을 하는 데 있어서 자신과 일체된 모습을 보이는 점이 바로 그 점이기도 한데, 그는 이야기 할 것을 그저 묵묵히 이야기 할 뿐, 그것을 강조하고나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철원에서 살면서 보고 체험하며 느끼고 살아온 자기 진실성에 바탕에서 자신의 손길이 움직인 곳을 따라 마음을 움직여가며 철원의 서정을 담아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런 그의 특성은 시적 객관성과 보편성을 확보해주고 있는 것인데, 시에 대한 문외한(門外漢)이라도 그의 시를 읽어내는 데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의 문학 현실에서 수많은 시인들이 난해하고 버거운 시적 세계에 심미적으로 도취되어서 독자들을 "소를 강가로 몰고 가서 마시기 싫다는 물을 강제로 마시게 하려는 듯한"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독자의 유별나고 뛰어난 독법으로나 요즘 시인들의 시를 읽어낼 수 밖에 없게 되어 버렸다.
다르게 말하면 아무렇게나 읽으면 된다는 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해내지 못하면 시 한 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가 하는 횡포로 독자를 몰아세운다. 달리 말해 모든 독자를 고문(?)하는 형국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이 널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히려 아무라도 알 수 있는 이야기 모두가 말하고 행하고 나서야 할 것들을 등한시함으로써 시인적 삶을 내팽개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 당대의 문제를 당대에 짚어나가지 못하는 시인이 미래를 어찌 예견하고 선자적(先者的)인 시세계를 펼쳐 나갈 수 있겠는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이제 현란한 수사의 세계에 미혹되지 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바라보고 이해하며 나중의 방책을 세워나가는 전제로서의 시인적인 모습을 살펴 읽어나가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조건으로 오늘 정춘근 시인의 시집 『지뢰꽃』이 우리의 현실에서 반드시 인식하고 가야할 또 다른 상식을 업그레이드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을 하면서 <『지뢰꽃』다시 읽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누가 지뢰꽃을 피우게 했는가?
정춘근의 『지뢰꽃』다시 읽기 (2)
「지뢰꽃」
월하리를 지나
대마리 가는 길
철조망 지뢰밭에서는
가을꽃이 피고 있다
지천으로 흔한
지뢰를 지긋이 밟고
제 이념에 맞는 얼굴로 피고 지는
이름 없는 꽃
꺾으면 발 밑에
뇌관이 일시에 터져
화약 냄새를 풍길 것 같은 꽃들
저 꽃의 씨앗들은
어떤 지뢰 위에서
뿌리내리고
가시철망에 찢긴 가슴으로
꽃을 피워야 하는 걸까
흘깃 스쳐 가는
병사들 몸에서도
꽃 냄새가 난다
정춘근의 시집 『지뢰꽃』에서
오늘 정춘근 시인의 시를 소개하면서 필자는 정춘근 시인이 노래한 지뢰꽃은 철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에 주목한다. 우리의 분단은 우리의 분단이지만 우리에 의한 분단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의 뜻에 의해서 삼천리 방방곡곡에 지뢰밭으로 퍼져서 지뢰꽃을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보여준 시인으로 김남주 시인이 있다. 김남주 시인은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노래하였다.
억새가 우거져야할 들판과 산야에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고
지뢰가 깔려 있어 그곳을 지뢰밭이라 하고
거기 피어난 꽃들은 위장한 꽃들이어서
꽃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지뢰꽃이라 불렀다.
세상에 무슨 놈의 꽃 이름이 그렇게 험상궂은가 반문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너무나 착한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질문할 것이다.
삼팔선이나 지뢰꽃이나 그 경계없음은 일치하는 현상이다.
정춘근 시인이 쓴 시 지뢰꽃을 보시라! 지천으로 흔하게 핀 꽃이 지뢰꽃이다. 그 지뢰꽃은 때때로 우리들 가슴에서 화(華)한다. 필 것이 피어야하는데 아니 그 피어서는 안될 그 지뢰꽃이 우리들 가슴에서 활짝 피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상실한다.
누가 지뢰밭을 일구게 했고 누가 지뢰꽃을 피우게 했는가? 우리는 그 실상을 올바로 인식해야할 때이다.
자식의 병역기피를 위해 발버둥치는 위정자들에게 고한다. 그들이 병역기피 하려고 발버둥칠 것이 아니라 병역제도 자체가 필요없는 사회를 조성하라고. 지뢰밭과 지뢰꽃이 필요없는 세상을 가꾸라고.
그러나 남의 탓만 하지 말자. 남의 탓 하다가 남에 의해 분단되었지 않은가? 남 탓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그 남을 두고 살지 않은가? 그 남에 의해 우리의 형제들은 그 지뢰밭가를 서성이고 있고 우거진 억새꽃이 위장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반길 때 두려움을 갖지 않는가? 멋드러지게 핀 억새꽃을 두려워 말자.
"고통스런 육신의 땅에 저주, 지뢰알"
정춘근의 『지뢰꽃』다시 읽기 (3)
저 쑥대밭에 지뢰는
알이 통통이 들었겠다.
서리하는 놈 없어
뿌린 대로 여물었겠다.
이제는 캐내
가마니에 담아 두었다가
껍질 벗겨
가마솥에 쪄 먹을까
맷돌에 갈아
부침개나 부쳐먹을까
썩은 놈은 울궈내
개떡이나 빚어 먹을까
떫은 놈은 처마에 매달아
곳감이나 해먹을까
그래도 남는 놈을
화분에 심어 놓으면
봄에는 꽃을 보려나
--정춘근의 시 <지뢰알>
토실토실한 밤을 쪄먹는 것도 아니고, 고구마를 쪄먹는 것도 아니다.
파의 향긋한 맛을 따라 부쳐먹는 파전을 부치는 것도 궁핍한 한 시절의 토방 마루에 걸터앉아 나긋한 햇살을 받으며 둘러앉아 도란대는 맛으로 먹던 보리개떡을 빚어 먹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오늘 지뢰알을 소담스럽게 캐내어 무슨 대단한 수확이라도 거두는 것처럼 위장(?)하고 담아두었다가 가마솥에 쪄먹을 것인지 부침개를 해먹을 것인지 고민하는 시늉은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시인이 천진스럽다고 하지만 그 정도를 어디까지 허용해야할까? 정춘근 시인의 이 시치미 떼기를 접하면서 아역배우의 앙증맞은 연기를 보는 듯하다.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에 어린 시절의 농촌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이 시를 읽어낸다면 아마도 아련한 향수에 젖을 법하다.
그러나 이 시의 주제가 결코 그런 향수에 젖어들 성격의 시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고통스런 육신의 땅에 저주처럼 내린 산물이 지뢰알 일텐데 정춘근 시인은 도대체 무슨 연유로 하여 이런 살벌한 소재에서 아련한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가 말하는 언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쓴 언어의 구조 아래 익살스럽게 깔린 회화적 요소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추억의 그림자를 먼저 연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긋지긋한 마음으로 차라리 쪄먹기라도 해서 파내 버리고 싶은 도발적 근성이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또한 그렇게 우리의 무장산천을 헤치고 나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해온 우리의 통일운동가나 평화운동가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은 어쩌면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화롯불에 앉아 할머니의 옛이야기 도란대는 숨결을 느끼며 지뢰알을 구워먹고 있거나 쪄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그렇게 통일을 가로막는 빗장이 하나하나 열려가고 있을 테니까.
우리들의 심장은 가시 찔린 허공
정춘근의 『지뢰꽃』다시 읽기 (4)
김형효 시인 tiger3029@hanmail.net
천지에 지뢰 투성이인가 했더니, 찬찬히 바라다보면 사방천지에 총알자국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오랜 관성에 묻혀버린 우리의 심장은 그런 거칠고 투박하고 모난 살기 어린 절규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이미 그러한 것으로 규정된 현실에 대한 공범적 묵인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도 서울에 버티고 있는 미군 사령부가 21세기에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주한미군철수를 외치거나 외세배격을 외치는 사람을 마치 사상적 결함이 있는 것처럼 매도하는 눈과 귀와 입이 너무나 많이 발달해 있다.
그런 연유로 우리가 우리의 주권을 외칠 때,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오랑캐의 심장을 간직한 오랑캐처럼 살아가길 원하는가? 분명 누구라도 그렇지 않음을 인식하고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철원의 옛 노동당사 건물
더 이상 방조 묵인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리고 그런 허위의 가면과 허위의 심장을 간직한 우리의 현실에 대한 적확한 해석의 일단을 우리는 정춘근의 시 「풀」을 통해 다시 한번 목도하게 된다.
「풀」
-노동당사
총알자국 포 구멍뿐인
벽 틈에 뿌리내린
풀에서는 빛이 난다
화약냄새 가시지 않는
콘크리트 벽을 움켜쥐고
잎새를 파랗게 갈아
분단의 하늘을 휘젓고 있는
이름 없는 풀의 생애가 아름답다
눈물나게 바라보는 우리는
나그네 일 뿐
이 노동당사의 주인은
폭염에 시들지 않고
반짝이는 작은 풀이다
풀의 타는 목마름을
내 심장의 피로 적셔주고 싶다
이제 우린 어느 위치에서야 하는가? 더 이상 눈물 뿌리는 나그네처럼 우리의 조국강토를 배회하지 말자. 굳건하게 바로 서서 우리의 주권을 바로 행사하며 살아갈 채비를 하자. 배우고 익혀서 내 눈과 귀를 상실한 채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예비할 미래란 없다. 노동당사의 검게 탄 심장 같은 흔적을 두고 우리가 또 다시 그렇게 불운한 질서를 허용한다면 그 불행의 상처는 다시 씻을 수 없을 것이다.
강원도 철원의 노동당사에도 비가 내리는가? 우리들 가슴에도 저문 뒤의 눈물같은 비가 내린다. 하지만 이제 그만 눈물을 멈추고 주권자로서의 미래, 자기 정체를 분명하게 하고 살아갈 미래를 예비하자.
지금 용산 기지에 미군의 아파트를 짓겠다는 허망한 망령 같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 주권국 수도 서울에 그들은 영구주둔을 목표로 아파트를 지을 속셈을 내세우고 있다.
더구나 대테러 전쟁의 극단적 세계질서를 만들어놓고 벌이는 짓이 이렇다. 더 이상 그들이 유령처럼 행세하는 것을 우리는 그냥 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단 한순간도 그들의 질서 안에서 벗어나 살 수 없는 현실이 오도록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풀」이 타는 목마름의 세월을 미연에 막자. 그리고 그 심장을 넘치는 활기로 가득 채우자. 그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공통적 삶의 질서가 되어야 하고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참 되게 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다.
시인의 괴변 나무랄 세상 언제일꼬?
정춘근의 시집『지뢰꽃』다시 읽기 (5)
「문혜리 가는 길」
가슴이 답답한 날에는
문혜리 사격장으로 가서
박격포 소리를 듣는다
귓속으로 날아든 폿소리는
뇌 중심에 정확히 떨어져
혼란한 생각을 몰아 낸다
입안 가득 고여 드는 폿소리는
식도를 타고 내려가
막혀 있는 가슴을 뚫고
창자 안에서 몸서리를 친다
자장가 대신 폿소리를
듣고 자란 오장 육부는
이미 군사 체질화되어 있다
문혜리 사격장에 가면
폿소리에 뿌리내린 아카시아에
훈장을 달아 주고 싶다
박격포 소리 들으며 응어리 풀어내?
아니, 무슨 놈에 세상이 가슴이 답답할 때 박격포 소리를 듣게 한단 말인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슴이 답답할 때, 청량 음료를 찾거나, 탁 트인 벌판을 찾거나, 강가를 거닐 것이다. 또한 바다를 찾거나 산등성을 오를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상식일텐데 어찌하여 상식의 가늠자에 배반의 자를 들이댄다는 말인가? 그것도 시인이......,
오늘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철원의 한 시인은 박격포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에 응어리를 풀어낸다는 말인가? 이 "해괴한 시인(?)"의 가슴에 조국이란 어떤 존재이며 평화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분단 조국의 하늘이 그렇게 만들었다면 분단을 해체하면 될텐데, 이 시대를 사는 동업자 시인들은 또 무엇을 노래하고 있단 말인가?
그는 이어서 "귓속으로 날아든 폿소리"가 "뇌 중심에 정확히 떨어져/ 혼란한 생각을 몰아낸다"고 노래하고 있는 데 이런 답답할 노릇이 어디 있단 말인가? 누가 이 시인을 이토록 처참하게 만들었는가?
반어적인 자기 성찰
급기야 시인은 고백한다. "자장가 대신 폿소리를/듣고 자란 오장육부는/이미 군사 체질화되어", "문혜리 사격장에 가면/폿소리에 뿌리내린 아카시아에/훈장을 달아주고 싶다" 훈장은 무슨 훈장이란 말인가? 그것은 반어적 자기 성찰인 것이다. 사실 이 반어적 수사는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성찰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기 혐오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의미로 연결 지어진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비주권자의 자기 망상적 도착증세를 보여주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우리가 상실한 주권을 시인의 도구인 시를 통하여 관망한 것이다. 그리고 비주권자인 존재에 대하여 타깃을 세우고 있는 시인의 칼끝이 결국 주권 회복으로 이어지길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아카시아에 훈장을 달아주고 싶었다라는 구절은 그러한 반어적 수사의 중심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타의에 의한 주권행사가 올바른 주권의 모습이 아니란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창자 안에 몸서리치고 있는 저 외세의 칼끝을 돌려 세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