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의 서정, 통일의 서정, 분단의 서정을 온몸으로 체화한 시인 정춘근

  • 김형효
  • 조회 3662
  • 2005.12.27 15:44
  • 문서주소 - http://sisarang.com/bbs/board.php?bo_table=mytravel2&wr_id=48
김형! 내 작품에 대한 평이 필요한데 김형이 좀 써 주쇼. 느닷없는 제안을 받고 어찌 대답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런데 평론가들 많은데 왜 꼭 제게 그런 부탁을 하시는거요. 요즘 뭐 일일이 찾아서 내 작품을 평해달라 청하기도 머쓱하고 그러니 그저 김형이 가감없이 평을 좀 해보시구랴. 하, 내가 무슨 평을요. 일차 거절을 하고 다시 청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이렇게 단필의 어설픈 평이란 것을 하기로 했으나, 걱정이 앞선다. 대개의 평이란 것이 시적 이해가 깊어 시에 대한 해설도 그럴싸하고 평론적 언어에 대한 감각도 소용되며 시인에 대한 이해도 깊어야 하거늘, 내가 어찌 살아온 나이테에도 미치지 못하는 분의 시를 평한단 말인가?

아무튼 일설하고 나는 정춘근 형의 시평을 하는데 있어서 나의 시적 감상기 그리고 시인 정춘근 형에 대한 인간적 교감의 정도를 이야기하며 문단 혹은 문학 일반의 개인적 생각들을 정리해서 고백하는 형식을 빌어 모자란 평(?)을 대신해보고자 한다.

위기의 시대에 수많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크게 저항과 은둔 그리고 어설픈 자기 사설을 풀어놓는 부류로 구분될 수 있을 법하다. 저항과 은둔을 택하는 이들이 대개의 경우 문학적 양식을 통해 적극적인 태도를 갖고 미래적 전망을 제시하려 하거나 나서서 나름의 입장을 갖고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일 것이고, 자기 사설과 독백의 변주를 택하는 이들의 경우는 시정잡배나 다름없는 유약한 변명으로 살아내고 있는 하루살이 같은 삶에 자족하는 인간형일 것이다.

나는 오늘 정춘근 형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여전히 자본주의 철창 속을 달리는 대항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음을 본다. 그의 풍모에서는 항상 은둔과 저항의 모습이 상치된다. 몸은 은둔하고 마음은 끝없이 꿈틀거리는 형국인 것이다. 그럼으로해서 치세와 허세와는 낯설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요즘의 사람들의 일상에서 보여지는 기교와 세련미란 그의 모습에서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모습에서 그가 간직한 진실성 자체에서 풍기는 삶의 전체적인 모습이야말로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첨단의 무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껍데기로 몇 겁을 둘러쓴 존재는 존재인지 허위인지 분간할 수 없는 쓸쓸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치와도 같다. 그러니 그에 전면적인 모습 자체가 알맹이가 아닌가?

그럼 그의 시편들을 따라가며 해설을 곁들여 보자. <들사람>이라는 작품은 들녘을 따라 사는 농투성이 일가가 보여주는 흙에 대한 서정은 가문의 대를 잇는 혈맥처럼 단단한 것이란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정시인 자신이 살아온 삶의 근거에 대한 끈끈한 애정의 다른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시인은 그런 감정의 일단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데 이 드러냄은 "흙으로 돌아간대도/흙바람으로 다시 와/밭이랑에 살겠네/논두렁에서 살겠네"라는 문학적 수사와 기교와는 동떨어진 평범한 이야기 속으로 스며들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죽어서도 다시 흙에서 살 것이란 믿음이 흙에 대한 집착의 형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애처로운 애상의 감정으로 표현되는 흙에 대한 믿음의 진실성을 가감없이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흙의 서정을 보여주는 시편들로는 <제초제>, <우물이 있던 자리>, <이자(利子)>, <밤꽃>, <곰보돌> 등이 있다. 그러나 <들사람>의 노골적인 흙에 대한 애착과는 달리 <제초제>, <우물이 있던 자리>, <이자(利子)>, <밤꽃>, <곰보돌> 등은 흙이라고 하는 공간, 적어도 한국의 농촌 서정의 공간에서 보여지는 일반적인 서정과는 구분되는 점이 있다. 이는 분단선 철원의 지역적 서정을 담아내면서 그들의 애환의 깊이를 여실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죽>이나 <은장도>에서도 고향 마을의 귀퉁이 쯤에서 보여지는 서정이 있다. 그러나 이는 농촌적 서정의 축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분단의 정한을 더 강렬하게 표상하고 있는 것 같다. "밤마다 철조망을 보고/짖는 나는 늑대인가 보다/철조망 너머 동족에게/슬픈 신호를 보내는/나는//철조망을 물어뜯을/이빨 없는 나는 양인가 보다/한 번도 철조망을 뚫고 나갈/발톱을 세운 적 없는/나는//내게 뒤집어씌운/가죽은 질기기만 할 뿐/늑대 울음 보다/양들 침묵 보다/뒷산에 떨어지는 박격포 소리가/더 애절하다" 인의 겁, 인간이란 가죽을 뒤집어 쓴 자신이 초라해져버리는 분단 현실을 두고 그는 냉수처럼 돌진하고 있던 나는 슬픈 신호를 보낼 뿐 아니라 야수처럼 철조망을 물어뜯고 싶은 존재로서 자신의 사랑을 불사르고 있다.

또한 <은장도>에서는 할머니의 삶의 이력을 풀어내는 가락이 은장도가 상징하는 한의 한올 한올을 물 흐르듯 유연하고 맵시 나게 풀어놓는 듯하다. 그 슬픈 정한 속에서 봄비 같고 가을비 같이 잔잔하게 옷깃을 적시는 메시지에 눈가가 적셔지는 것을 어쩌겠는가? 녹슨 철조망 앞에서 더구나 지팡이를 짚고 있는 상황이라니 이는 잔잔하게 잦아든 감정의 이면에서 정춘근 시인의 시의 말법에 의하여 극적이고 다이내믹한 상황으로 확장되는 느낌으로 전이된다. 마치 그의 말에 날개가 달려 푸덕이는 듯하다.


그의 시편에서 동화적 상상력의 복원을 통한 통일의 서정을 확보해내고 있는 시인 정춘근을 볼 때마다 맑은 영혼을 대한다는 느낌이다. 우리 문단의 수많은 시인들이 방향감각을 잃은 채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깊어지는 요즘에도 그가 가는 길, 그의 갈 길은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일갈을 한다 하는 많은 문학가들이 여타의 지식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과도한 자기 집착과 선정성에 목이 메어 쩔쩔매며 살뿐, 문학의 선진적인 역할은 접어두고 최첨단의 테크노적 서정에 함몰되어 그 이성적 정서에 올바로 대항해내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러한 현상들을 추수적으로 따르고 있다. 발을 뻗을 곳을 보고 뻗으라는 속담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문학이 문학으로서 지켜야할 공동선의 목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학인들은 그 위치를 망각 혹은 외면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문학인들의 비문명적 요소들 때문에 효과적으로 그 정서에 대해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해서 빚어지는 과도적인 문제라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겠다.

<제초제>라는 시를 보면 마치 7~80년대 농촌에서 자신의 궁핍한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한 농부의 이야기가 화면에 비춰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는 여전히 농촌의 한 부분으로서 개선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허망하게 살다간 혹은 살아가고 있는 농촌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질긴 희망을 풀처럼 질긴 생명처럼 자라는 어린 남매의 눈물로 대척시키지 못하는 점은 아쉽기도 하다. <우물이 있던 자리>에서 우물이 있던 자리에 대한 중년의 기억을 더듬은 시적화자에 농촌의 서정이 익숙한 우리네 삶과의 간극을 좁혀주는 듯하다. "우물 샘에 그림자 비춰보던 소년/늙으수레한 중년이 된 지금"은 깊은 회한이 서린다.


작품 <이자(利子)>는 이자에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농촌 실정에 대해 가슴 아픈 자기한탄의 또 다른 변주는 아닐지, 본전도 못찾는다는 자괴어린 상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시의 그늘에서 이자를 상계하고 사는 시인이다. 이는 좌절과 시련의 그늘에서 벗어난 시인의 삶 속에서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태도를 읽어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구나 공자왈 맹자왈의 치기어린 허세에서 일탈하겠다는 호기가 씁쓸한 것은 이자가 현자로 투영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니, 이 역설적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은 시인의 이 낙관적인 미래에도 서늘한 그늘이 있다.

<밤꽃>에서는 청상과부의 그늘에도 남성의 정액냄새가 가득 풍긴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 질퍽한 과수댁 밤나무의 상징을 통해 과수댁의 외로움을 뛰어 넘기고 있으니 시인의 해학과 기지가 엿보이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참지 못할 익살스러움에 감복할 따름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쌍 밤이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다고 딴청까지 부리고 있다. 그런 감정 속에서 다시 <곰보돌>에서는 어머니의 등뼈 시린 기억을 더듬고 있으니 이 안타까운 정한을 시인은 "어머니 등뼈 사진 속에/끝없이 아득하던/터널들이 보입니다"라고 관조하여 보고 있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 모든 어머니가 보여주는 지극 정성을 무슨 고생도 마다 않는 우리들의 어머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반문하면서도 세상의 각박을 뚫고서 여전히 사람의 마음 속을 유연하게 다독여주는 어머니는 살아있으리라 믿게 된다.

많은 부분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 서정을 보여주고 있고 그러한 소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 정춘근에게서 그것은 유효한 진실이며 흔들림없이 지속할 진보적 미래에 대한 선명한 시적 기치를 내걸만한 진실이다. 지금 문학의 세계는 표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러한 현상태가 우리의 문화적 자산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명사 위주로 지탱되어지는 우리 사회의 병폐의 단편적인 표출이라 믿게 되는데 이는 문단의 표면에 서 있다고 하는 작가들의 부패와 부도덕 그리고 자기 능멸에 가까운 기만적인 모습들이 있다.

그의 시집 <지뢰꽃, 문화발전소>에서부터 정춘근 시인이 보여주던 진지한 자기성찰적 모습은 문단의 표면에서 벗어나 있는 또 다른 작가들과 함께 지속되고 있는 문학의 또 다른 발전 축을 형성하게 되리라 기대한다. 꾸준한 습작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 능력을 향상시키며 신선한 관점의 확립을 위해 부단한 고민과 토론을 펼치고 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심신의 일체화된 실천적인 도구로서의 문학적 삶과 문학인의 사명으로 살아내고 있는 모습을 볼 때, 희망적인 미래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변방에서 문단 중심을 향하여 자기 세계를 밀어 올리며 나아가는 점에서 정춘근 시인의 행위 또한 그 반열에 있음을 생각한다. 문단 중심에서 방황과 좌절에 휩싸인 이때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 관점의 흔들림 없이 외면당하고 있는 시적 서정을 꾸준하게 자기 것으로 확대하여 그 의미를 생산해내고 있다. 따끔할 정도로 준열하게 바로 문학이 정춘근의 삶을 채찍하고 보여주는 실천적인 도구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며 정춘근 또한 그 도구로서의 자기 삶을 여과없이 드러내면서 흡족한 웃음을 웃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행복한 시인인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딛고 선 땅에 의미를 부지런하고 예민한 촉수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마치 "광부의 눈을 한 탄부처럼, 농부의 손마디에 얹힌 주름살과 깊이 묶인 손매듭처럼 굵은 마디를 보여주며, 광인의 기운을 타고난 거친 시적 힘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시적 효과와 기능을 극대화하는 그의 내면을 아우르는 섬세한 시적 서정의 바탕인 진실한 자기 실체의 인정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그럼으로 해서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의 진실과 자신이 딛고 사는 땅의 과거, 현재를 미래적 전망으로 투과해내는 정의로운 육신의 쇼유자이다. 그 점에서 그는 행복한 시인인 것이며 자기 삶에 묵묵한 태도를 보여주는 그의 풍모가 지사적이란 느낌을 주는 요인이기도 하다. 깊이 가라앉은 듯한 그의 몸의 움직임과 마음씀씀이가 시의 전체적인 풍경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서 날뛰는 모습이란 없다. 어거지버거지의 기교 또한 없다. 순순히 끌려가는 송아지 모양이다. 그러나 소의 입장에서 소가 사람을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닌지, (쟝그르니에의 소설에 "개" 이야기처럼),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르는 거친 바람결에 방치되다시피한 시린 사막과도 같은 분단장벽의 울밑에 사는 수많은 생명과 전연 새로운 조화를 만들고 이끌어가면서 전도를 분명히 제시해주는 시인의 세밀한 역사인식과 시적 전망은 통일의 내일에 대한 희망을 전면적으로 제시해주고 있다. 그가 철원의 자연적 정서를 시적으로 서정화 하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은 분단체제 안에 사는 우리 모두의 내면적 정서를 여전히 유효한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돈독한 내면과의 소통에서 가능한 것이리라.

그의 인내와 고민은 그가 받아들이는 시적 세계가 되고 있다. 이는 그가 받아들이는 절체절명의 시적 사명과도 같은 것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철원의 지역적 정서란 것이 한반도 전체를 관통하는 분단서정을 뜻하며 이는 분단의 현실적 바탕이 한반도 전체의 질서로 편제되고 있는 실체적 진실 앞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칠천만 겨레의 서정축이 되어야 하며 한민족 전체의 서정축으로서 어느 한순간도 도외시 될 수 없는 역사성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학적 사유의 공간을 유독 정춘근의 시에서만 확대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과거는 과거의 유산이다. 우리는 지금 과거의 기억만으로 살아내기를 원하며 살 수 없는 현실에 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 말 할 사람들, 이미 지나간 사람들은 그대로 낭떠러지 아래 존재하며 사유하라. 다만 자신들이 스스로 진실했다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도 또한 인정하라. 그리하여 정춘근 시인 개인에게서 도드라지고 있는 점에 대해서 함께 가슴아파하며 우리의 문학적 현실을 개선하도록 힘 써 노력할 것을 기대한다. 더욱이 분단의 체제화된 관성을 인정하기도 하고 그것을 뛰어 넘는 대항의 의미를 폄하하려는 문학권력자들의 자기기만이 엿보이는 현실은 너무나도 뼈아픈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첫 시집을 펴내는 작가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어머니 자장가보다 폿소리 총소리를 더 많이 듣고 자랐다. 지뢰밭, 비무장 지대, 노동당사로 대표되는 6.25의 참혹한 전쟁 잔해와 군인들의 훈련받는 소리, 새벽마다 들리던 대남 방송 등에서 느끼던 무장평화의 불안한 현실 여건이 내 시의 기본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고있다고 생각된다.


주인 없는 묵정 밭을 개간하다 지뢰에 발목이 끊어지던 어른들과 폭팔물 사고로 손가락이 절단되는 친구들을 이웃으로 살아온 내게는 지역 아픔 하나 하나가 시적인 뿌리로 남아 있다. 그 시절 황량한 수복지구에서 목숨을 걸고 삽을 들었던 우리들의 아버지와 호미를 잡았던 어머니들 아픔을 제대로 썼을까하는 의문이 들지만 용기를 내어 지역적 정서가 내재되어 있는 것을 위주로 책을 묶어 보았다.

현대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이미지를 구사하는 문학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당혹스러운 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속에서 분단이나 수복지구 아픔을 느끼는 분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Pr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