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통신 23
니꼴라예프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2주 동안 홈스테이를 했던 집, 수호믈린스키 대학에 다니는 타샤네 가족들이다. 어제는 와인 두 병을 사서 들고 타샤네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 학생 타샤와 그의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한국의 학생들 같으면 아르바이트는 하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체 집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휴일에는 또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여념이 없다. 이제 그들의 안내를 받아 시내를 둘러보는 일은 체념했다.
대체 그들에게 자유라는 것이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지, 부모 자식 간에 아무런 문제제기가 없고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면이 많다. 곧 다가오는 방학 기간에 이어지는 휴가를 위해 돈벌이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겨울이 8개월이나 되는 우크라이나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또 있다. 여름방학이 초중고등학생 과정인 쉬꼴라는 3개월, 대학교는 2개월이나 된다. 그리고 그 기간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 도시는 공동화 상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나는 그 동안의 답답한 한국 내 뉴스에 전에도 소개한 바 있는 대평원을 산책하고자 그들을 찾은 것이다. 타샤네 부모들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내 뜻을 알아차린 것인지 자기네 다차(남새밭)에 가자고 했다. 우리네 남새밭은 마늘이나 감자, 상추나 부추 등을 심어놓고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거나 여름 날 낮에 상추쌈을 할 때는 맛갈나는 찬거리가 되어주는 것이 묘미다. 러시아 소설 속에서 많이 등장하는 다차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아파트 단지를 돌아서 처진 울타리 길을 한참 걸어가면 타샤네 다차가 있었다. 아파트 주민 대부분이 인근의 많은 다차의 주인들이다. 오며 가며 동네 사람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아도 모두 아파트 사람들의 다차인 듯하다.
우리네 남새밭처럼 그곳에도 파와 양파 감자 등 그들의 음식에 들어가는 향이 진한 찬거리 등이 많이 있었다. 과수나무도 있었는데 무수히 많은 열매가 달렸다. 김을 매고 물을 준다. 나는 타샤 어머니인 타샤 이랴가 울타리에 핀 장미꽃이 먹는 장미라며 장미꽃을 한 입 따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녀는 그 장미꽃으로 차를 만들면 좋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장미꽃의 부드러운 향기를 맡으며 꽃을 따기 시작했다. 제법 많은 꽃을 땄다. 꽃을 말려서 물을 끓여 마시면 좋다는 말에 많이 따기는 했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마음속으로 이 장미꽃 차를 나중에 한국에서 오는 손님이 있으면 선보일 생각으로 욕심을 부렸다. 차를 만들고 시음을 한 후 맛이 좋으면 더 많이 만들 생각이다. 가능하면 이곳의 향기 나는 차를 한국으로 좀 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선물이 될 듯하다.
그렇게 다차에서의 시간을 보낸 후 나는 타샤네 부모와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인 커다란 개 리치와 함께 넓은 평원을 산책했다. 처음 니꼴라예프에 왔을 때가 4월 중순이었다. 그리고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막 겨울이 지나고 왔던 4월의 평원에는 꽃들이 만발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풀숲이 우거졌다. 우거진 풀숲에 군데군데 꽃이 각기 다른 꽃들의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넓은 벌판에 넓은 초원이다. 초원의 군데군데 각기 다른 모습은 수많은 볼거리를 안고 있었다. 마음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바람도 내 마음을 이끄는 느낌이다. 하늘은 한국의 가을 하늘처럼 넓은 평원에서 멀고, 멀리 바라다 보이는 넓은 벌판이 사람의 마음을 무한히 푸근하게 해주는 느낌이다. 영원한 세월 동안 머물러도 좋다는 바람소리를 듣는 아늑한 느낌도 좋다. 우리의 지도자가 소통에 막혀 몸살을 내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해외순방은 무슨 의미였는지 답답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치 어머니나 큰 형수님처럼 다차에서 뽑은 파와 향이 진한 초록의 찬거리를 바리바리 싸준다. 나는 내게 주려고 뽑아온 줄을 몰랐다. 그런데 내게 싸주기 위한 것이었다. 시장에서 사온 파와는 너무나도 다른 향긋한 냄새가 고향 내음이다. 너무 좋다. 사람이 사람과 어우러진다는 것, 행복하다. 사실 향이 진한 찬거리는 나는 감당하기 어려운 향이라서 그냥 말려 가루를 낸 후 양념처럼 쓸 생각이다. 아무튼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기분은 낯선 곳에서의 일상에 자신감을 더하는 일이다. 저무는 해를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도 훤하기만 한 날이다. 오후 여덟시가 넘었고, 서녘으로 해가 저물고 있는데도 밝기만 하다. 하루 해가 저무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곧 장미꽃을 볕이 드는 곳에 말려두고 하루를 되돌아본다.
대평원에서 사색하다.
- 조국의 옹졸한 지도자에게
넓구나.
구름도 바람도
꿈도 무한할 것 같은
대지의 신이 있어 날 불렀는가.
태초에 아무 것도 없이
푸른 초원의 풀숲만 무성했던 것처럼
바람과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가
대지의 연인처럼 속삭임을 주고받았던 것처럼
넓은 가슴은 하늘에도
넓은 가슴은 땅에도 맞닿아
푸르고 푸른 후
초록의 짙은 초록의 동산에서
넓은 마음, 넓은 아량으로
서로가 서로의 의지가 되어 주었구나.
그렇게 하늘의 신과
그렇게 대지의 신이 만나는구나.
닫지 마라.
옹졸하게 문 닫지 마라.
열어라.
열려거든 무한히 열어라.
닫힘 없고, 막힘 없이 가는 길에
푸른 꿈, 푸르러지며
맑은 물이 넘쳐 생명 잉태하리라.
희망 넘치는 청년의 세월로 인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