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업! 각서, 서약서는 이제 그만, 근로계약서면 충분하잖은가?
난 지금껏 노동과 함께 살아왔다. 내게 정말 부러운 것은 노동쟁의 한 번 해보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많은 사업현장에서는 노동쟁의 한 번 해보지 못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필자는 16세 중학 겨울 방학을 시작으로 지금껏 비정규직 노동자다.
지난해는 김치 공장과 아파트 관리실에서 일을 했다. 필자는 매 번 새로운 직장을 찾을 때마다 비정규직이어서 서글픈 것도 있었지만, 취업과정에서 겪는 인간적인 모멸감이 사람다운 삶과 거리가 먼 것은 더 큰 아픔으로 느꼈다. 그것은 지금도 취업을 위해 쓰는 계약서와 서약서와 각서들이다.
마치 범죄인 인도계약서가 이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각서나 서약서를 접하다보면 처참해지는 것이었다. 처음 그 서류들을 접할 때는 마치 평생을 책임져줄 것처럼 대단하다는 생각도 하였다. 정말 평생을 먹여살려줄 것만 같았다. 업무와 다른 일에 끌려 다녀야 하는 것도 고욕이었다. 필자는 그런 것들을 거부하고 직장을 그만두는 방법을 선택해왔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선택을 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게 쉽게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생각한다. 그렇게 겁주지 않고 각서 쓰지 않고도 일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리고 마음 편하게 웃으며 일할 수 있을 텐데... 이제 구직자에게 포승줄과 같은 각서와 서약서는 정리되었으면 한다. 근로계약서면 충분하잖은가?
필자는 그저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16세 이후 지금까지 일이 구해지면 어떤 특정한 일을 가리지 않고 해왔다. 그것은 객지 생활하는 사람으로서 우선 먹고 잘 곳이 가장 중요했던 16세 어린 시절 노동의 관성으로 굳어진 습관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다보니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딱히 이거다! 라고 답할 수 없는 처지다.
물론 지금은 글 짓는 시인이다라고 말 할 수 있겠지만, 밥 먹는 일을 한다 할 만큼 베스트셀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자에서 알아줄만한 시인도 못되니 어쩌는가?
한밭벌 거리에서
김형효
삶의 과녘을 향해 활을 쏘며
자신을 당기는 사람들
오늘도 거리에는 온통
자신을 향해 활을 만들고
스스로 화살이 된 사람들
띄엄띄엄 일상의 강을 건너고 있네.
생의 길에서 사의 길에서
생사의 길에서
그렇게 의연한 사람들이
오늘 지쳐있는 자신을 달래주지 못하고
거친 일상의 강을 건너다 지친
자신을 위로하지 못하고 있네.
사람들은 일상의 강에
자신을 징검돌로 놓고
자신의 몸을 움직여 가며
그 강을 건너고 있네.
하지만 그 모습에 익숙한 사람들
그 모습 자신의 모습인 줄 모르고
사람들, 하나 둘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가랑비처럼 보슬비처럼 하나 둘 떨어져 가고 있네.
*2007년 대전에서 택시기사를 하면서 썼던 시
한 때 필자는 노조가 있는 회사를 찾아다닌 적이 있다. 오래된 일은 아니다. 불과 몇 년 전이다. 대단한 노동 투쟁을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회사라면 일 하는 사람끼리 자신의 권익에 대해서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동료의식도 가질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기대였다. 나는 택시기사로 취업을 했다.
사실 가장 취업하기 쉽고 가장 일하기 힘든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택시기사들은 말한다. 이미 많은 택시회사의 노조도 택시기사의 이익보다는 사용자의 수중에 들어 가버린 노조가 많다고 한다. 그렇게 내 편이 되어줄 동료가 있는 회사를 찾지도 못한 채 나의 노동의 세월은 저물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즉자적(卽自的)인 노동자로서 그 역할 공간에서 멀어졌다 할지라도, 여전히 내게는 노동자의 삶이 더 가깝고 그래서 폼 나고 못난 문자 좀 써서 말하면 대자적(對自的) 노동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여전히 노동자의 손과 가슴이 날 더 따뜻하게 해준다.
꽃잎
뿌쉬낀(1799-1837)
책갈피에 끼여 잊혀진지 오랜
말라서 향기 잃은 꽃잎을 나는 보고 있다
불현듯 영혼은
묘한 생각에 빨려들어 버린다
어느 곳에 피었던 꽃인가
어느 때 어느 봄날에 얼마 동안이나
피어 있었고 또 누가 꺾었는지
낯선 손이 아니면 낯익은 손이
또 어인 일로 여기에 간직해 두었는지
정답고 은밀한 만남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작별을 위해
아니면 조용한 들판의 숲길을 건너
외로운 산책을 추억하고자 함인지
어느 곳엔가 그 사람과 그 여인은
살고 있겠지
그들의 보금자리는 어디일까
그들은 이미 사라져 버렸을까
마치 사연 모를 이 꽃잎인 양
오늘 필자는 뿌쉬킨의 시 '꽃잎'을 읽다가 어제 있었던 비정규직문제를 접하면서 노동자들의 아픔이 겹쳐져 읽혔다.
'맑은 생명을 담은 꽃잎'이 부유하는 모습을 그려 놓은 시인 뿌쉬킨의 시에 매료되어 읽다가 불현듯 '겹쳐지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 아름다운 아이들과 사랑스런 부부가 가정을 이루고 살아야할 텐데, 부유하는 꽃잎처럼 불안한 일상을 살아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안타까움 말이다. 한국사회에 비정규직 현실이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이 곳 저 곳 날리는 '꽃잎'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맑은 꽃잎이 되어 품은 생명의 씨앗들을 온전히 보살필 수 있는 날개를 달기를,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가정에 하루속히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