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 모자라다는 것을 인식해가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모자라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무언가 풍성해지는 느낌을 더 강하게 갖는 날들이다. 여름의 뒤끝이다.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가는 계절이다. 그리고 다가온 가을이 풍성해진 날들이다. 한국의 봄날에 와서 여전히 여름날인 한국은 장마로 많은 사람에게 수심을 깊게 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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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불에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침, 저녁으로 변화가 빠르다. 가로공원의 안쪽의 작은 나무들은 바깥쪽의 커다란 나무들이 꼿꼿이 서서 지켜주는 데도 낙엽이 가을 색으로 변했다. 얼마 전 망명객 뿌쉬킨이 머물렀던 집이 있는 인근의 공원에서 초상화를 그려주었던 카트리나에게 가이드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는 그의 오빠 줴냐(ЖЕНЯ, 22세)와 오빠의 여자친구 나탈리(НАТАЛРИ, 20세)와 함께 라드사드(РАДСАД)라고 하는 광활한 평야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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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남편을 수년간 찾아 헤매던 소피아 로렌이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의 기차역에서 남편과 조우하게 되는 극적인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그녀는 남편과 멀리서 눈이 마주치자마자 달리는 기차간에 올라타고 고향으로 도망 가버린다. 수년간 찾아 해맸던 사랑하던 남자를 바로 코앞에 두고도 손 한번 못 잡아보고 떠나야하는 여인의 처지보다 비참한 경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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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영화사에서 가장 슬픈 장면의 하나로 기억되는 명장면이다. 그리고 이 장면을 보면서 사랑을 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동질의 아픔으로 진정한 눈물을 많이 흘렸을 것이다. 바로 그 사랑만을 바라보는 영화 해바라기의 순애보는 지금도 아련한 감동이 되어 가슴에 남아있다.
필자는 그 애잔한 감동을 가슴에 품은 채 우크라이나인들과 어울려 광활한 대지에 무수히 많이 피어난 해바라기를 감상했다. 꿈같은 날들의 연속이다. 대문호인 톨스토이, 고리끼, 뿌쉬킨, 쉐브첸코 그리고 한 시대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레닌 등의 이름이 아로새겨지는 거리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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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화사의 한 페이지로 기억되는 해바라기의 촬영지 인근의 평야(равнина)를 찾았다. 나는 그곳의 해바라기 밭에 들어가 해를 바라본 해바라기보다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의 뒷모습을 많이 보았다. 정말 유심히 보았다. 무수한 군중이 기도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다. 내 마음의 기도도, 내 나라 사람들의 기도도, 모두가 평화롭기를 바라는 한 마음들이 모아지기를 소원하면서 바라보았다.
소피아 로렌의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그 심정을 모아 수많은 사람들이 진정을 담아 평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고 기도해본다. 내가 태어나 가장 많은 해바라기 꽃밭에 서서 세상을 위해 하는 기도는 그런 것이었다. 엄숙해 보이는 꼿꼿한 해바라기를 바라보면서 우리네 일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여지기도 했다.
엉뚱하고 멍청한 사색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기도들이 너무나 많이 밀려있는 느낌이다. 특별히 신앙이 없는 내 마음 속에 기도할 것들이 대책없이 밀려드는 가혹한 시절이다. 그래서 지금 내게는 슬픔이 많고 기쁨도 슬픔이 되는 시간들이다. 만족인 줄 알고 사색을 좀 하다보면 그만한 슬픔보다 더 큰 아픔들이 내 주변과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음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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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보리타작이 끝난 광활한 보리밭! 그리고 그 대지 끝에 맞닿은 하늘 길! 그 곁에 해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우리는 또 평화로운 세상만을 기약하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는 몸이다. 그 기도는 내 몸의 실천 속에서 더 찬찬히 실현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한다. 평원의 다짐이 더욱 소중하고 더욱 알찬 것이 되도록 더 찬찬히 해바라기의 숙명의 기도를 응시할 생각이다. 이제 2주 남은 이곳 생활 동안 다시 한 번 해바라기 밭에 가보고 싶다. 쌓여가는 소원들을 정리하고 풀어놓을 시간을 갖고 싶어서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 만난 이방인들과 벗처럼 어우러졌다. 하지만 나는 그들 입장에서 또 다른 낯선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과의 돈독한 우정을 다진 시간이었다. 그렇게 광활한 벌판을 보면 볼수록, 추수가 끝난 들판을 보면 볼수록 오랜 세월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