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버리지 못한 조국, 버리지 못한 민족이 있다"
고려인 강하늘(강이리나) 할머니의 죽음
머나먼 어머니, 아버지의 나라와는 8000km나 떨어진 낯선 나라지만, 익숙한 앞마당처럼 살던 우크라이나에서 68세를 일기로 다른 세상으로 떠나가신 강이리나(강하늘)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0월 20일입니다. 그 다음은 11월 8일 그녀가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절차를 묻는 고려인 협회의 연락을 받고 집에 찾아갔을 때입니다. 그녀는 전날 밤 11시에 이승을 떠났다 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병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은 5일 가족장으로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한국처럼 3일장을 치르지만,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는 동생들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장례식이 치러진 11월 11일 먼발치에서 관속에 편안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그녀를 보았습니다.
|
|
사람의 인연이란 참 묘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몇 번을 아니 몇 십 번을 만난 사람의 기억도 오래인 사람이 있고 전혀 까마득한 사람이 있듯이 어떤 사람은 한 번을 만나고도 장례식에 함께 하고 정말 막역한 사람의 장례에도 함께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입니다. 문득 지난 2001년 연변의 석화 시인 아버지 장례의 예를 창덕궁 인근에서 치렀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석화 시인은 어머니 병환이 깊어 걱정하고 계시다 한국에 들어오는 일을 미루다가 특별한 차도가 없자 아버지께서 그냥 떠나라고 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한국에 온 이튿날 엉뚱하게도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일이 생겼습니다. 하는 수없이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필자와 함께 오래된 수첩 속의 사진을 가지고 영정 사진을 만들어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때 생면부지인 시인에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영정을 만들고 또 그 자리를 찾아 서울 거리를 헤매다가 창덕궁 밖의 조그만 공터에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 사연과 함께 했으면서도 아직도 그 애틋함이 남아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고려인 故강이리나(68세) 할머니는 지난 달 필자를 만났을 때만 해도 참으로 정정하셨고 조금씩 할 수 있는 한국말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혼혈인 손녀가 필자에게서 한국말을 배우고 노래를 곧잘 하는 것을 보고 너무도 기뻐하셨고 후일 꼭 집에 놀러오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당시 며칠 남지 않은 우크라이나 고려인 축제에 나가는 손녀 사비나(한글 이름:하늘꽃)와 필자 등이 준비 사항을 점검하기 위해 고려인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나 집에 모였습니다. 그때 필자를 반갑게 맞으시면서 푸근한 웃음을 주셨는데 그날의 만남이 만남과 작별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얄궂은 일입니다.
|
|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참 좋은 분이셨습니다. 딱 한 번 만났습니다. 사람의 만남이란 꼭 오래된 만남이 아니라도 편안하고 평온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때 나중에 집에 놀러가기로 약속했는데 그날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간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혼혈인 손녀가 한복을 빌려 입고 2009 고려인 문화축제에서 춤을 추고 상을 받아왔습니다. 그날이 지난 10월 25일입니다. 그 손녀는 사비나(하늘꽃)라고 합니다.
모두가 무대에 올라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저와 함께 참여했던 저의 제자이기도 한 두 아이는 다른 출연자의 옷을 빌려 입은 죄(?)로 마지막 커튼콜에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웠지만, 애써 모르는 척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수업시간에 제가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 그때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너무나 좋아라 웃었습니다. 고마운 일이란 생각에 불혹 넘은 사내가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
할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저를 반갑게 웃는 낯으로 맞아주었습니다. 그의 한국이름을 하늘꽃이라 지어주었습니다. 강 이리나 할머니는 더 좋은 아름다운 새로운 세상으로 가셨으리라 믿어봅니다. 그분의 이름을 강하늘로 지어드리렵니다. 그래서 강처럼 하늘처럼 주유하시면서 오래된 조국, 오래된 고국도 둘러 보시라구요. 1937년~38년 스탈린 치하에 우즈베키스탄과 스탄공화국들 그리고 이곳 우크라이나까지 버려진 후손들이라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있는 동생들이 도착하고서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
|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장례식에 참석하였습니다. 발인이 열리는 내내 어떤 처신을 해야 할 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려인 어른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은 편안한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하나의 끈을 잡은 듯이 저에게 장례의 예법에 대해 묻고는 했습니다. 붉은 천에 "학생 간이리나"라고 쓴 것을 보았습니다.
|
|
발인에는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과 고려인들이 참석했습니다. 사는 동안 외롭지 않게 사셨구나. 그리고 참 좋은 인연들이 많았구나. 많은 사람들이 형형색색의 꽃을 들고 와 절을 하기도 하고 꽃을 바치고 울먹이기도 했습니다. 제게는 참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와는 너무나도 생김새가 다른 우크라이나인들이 장례식에 와서 장미꽃을 바치는 것도 그렇고 입관한 사체가 있는 관을 두고 예를 차리는 것도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오전 11시 집안에서의 모든 예를 마치고 운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손녀 사위가 영정 사진을 들었고 그 뒤로 장례식 참석자들이 따랐습니다. 영정과 함께 운구되는 관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꽃이 던져졌습니다. 가는 길에 꽃길을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식은 운구차가 있는 곳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장례식 참석자들이 인근 묘역으로 자리를 옮겨 마지막 하관식을 하기 전에 장례를 주관하는 사람에 의해 기도의식을 가졌습니다.
68년이라는 세월 동안 살아온 이승의 길을 떠나 먼 길을 떠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여전히 조선의 여인, 조선의 사람, 한 민족의 장례 풍습의 흔적을 안고 가는 그 모습이 바라보는 내게는 정말로 짠한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