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가 있는 밤 2

  • 김형효
  • 조회 2890
  • 2005.10.08 03:29
  • 문서주소 - http://sisarang.com/bbs/board.php?bo_table=todaypoem2&wr_id=169
- 선생님 너무 하십니다.


일당도 없이 살고 있는 초라한 시인에게
일용잡부와도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하고 남루한 차림의 시인에게

천상병 선생님!
선생님도 너무 하십니다.
선생님은 행복하시다고 시를 쓰셨지요.
사모님께서 밥 걱정은 않게 하셨다고요.
자식이 없어 또 걱정이 없으셨다고요.
쓰린 고문의 자욱까지 다 지우고 가시지
그냥 거칠게 참고 가신 선생님!

박봉우 선생님!
선생님도 너무 하십니다.
서울 하야를 선언하시고 그 후 서울은 어찌되어 가나요.
선생님의 병동에서의 꾸짖음도 잊은 채 살아가는 서울 사람들 아시나요.
그런데 선생님 따라 서울하야 한 저를 왜 이렇게 잠 못 들게 깨우십니까?
삼팔선 오가는 사람들 등덜미에는 또 무슨 수사들이 그렇게 옹졸한지요.

신동엽 선생님!
선생님도 너무 하십니다.
선생님 따라 껍데기는 가라고 외쳐도 보고 청소도 하고 그렇게 착실하게 홀로 선생님의 제자인 저를 왜 이토록 사무치게 잠 못 들게 하십니까?
동학년 곰나루 언덕 개나리 진달래 만개하고 남도의 동백꽃도 찬란한데
선생님 어찌하여 우리들 이토록 초라하고 졸렬한가요?
가야할 길 먼 길, 멀고 멀기만 한데 무슨 허접한 이유 이리 많은가요?

차라리!
차라리!
저 휴전선을 팔베개로 받쳐 이고 아리랑 춤판이나 벌일까요?
차라리!
차라리!
저 백두산 천지에 물길 내어 기세차게 쏟아부어 반도 땅을 적실까요?
차라리!
차라리!
저 고구려 백제 신라로 가서 다시 길을 나설까요?
하삼도가 갈라지고 찢겨져서 여전히 한 쪽 발이 불구인 조국,
이제 그만 하나로 묶어 동아줄로 단단히 묶어
한 몸 통인 채로 동해바다에 빠져 죽어나 볼까요?

아!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의 이름을 불러 찬란하게 새벽 눈을 뜹니다.
조태일 선생님! 시인은 자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고요?
Pr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