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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시집 온 17세 처녀의 수줍음을 그대로 간직한 모습

  • 김형효
  • 조회 3117
  • 2005.09.05 21:50
- 젖은 사색의 풍경을 보며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었다
 
 
 
나는 난생처음 대면하는 김문회 선생님 부부를 첫눈에 저 분이 김문회 선생님이시구나 하고 알아챘다. 그때 이야기를 나누던 조선족 아주머니께서도 저 분들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잔비가 내리는 화룡 버스 정류장에서 수인사를 나누고 김문회 선생님 댁을 향해 걸었다.

길거리에는 상인들이 마지막 떨이 상품을 팔고 있었다. 계절이 여름이라서 그런지 많은 과일들이 눈에 띄었다. 화룡시 임업국 앞 터미널을 지나가는 길에 청춘 남녀 한 쌍이 긴 포옹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품에 안겼던 여성의 눈가에 울음이 가득 고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은 또 무슨 속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에 저리 슬피 울며 애타 하는가? 우리가 지나치자 그들의 포옹은 끝나고 금세 떨어져 눈물을 닦고 있었다. 무슨 사연일까?

거리의 풍경이 낯설고 궁금한 풍경인데 사람들은 또 어떤 사연들을 갖고 살까 궁금해진다. 비가 내린 시장거리에 수박이나 참외, 자두, 바나나를 파는 상인들 그리고 인력거꾼들이 당국에서 허가한 증명서를 붙이고 다니며 영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길시와 달리 유난히 인력거꾼이 많았다. 한국에 택시승강장처럼 즐비하게 늘어선 인력거들을 보며 생활정도에 따라 교통편의가 큰 편차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 댁을 향하는 골목길은 아직 포장되지 않은 거리다. 한 몸을 한 채로 늘어선 집들이 특이한 풍경이다. 한 몸으로 이어진 집들이 즐비하다.

민락거리 300호 등등의 집 번지로 추정되는 표식이 붙어 있었다. 작은 2층 건물에 조그만 의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의원에서 창문을 넘어 턱을 걸치고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20대 중 후반의 여성이 있었다. 그의 차림새로 보아 말끔한 차림의 세련미가 넘쳐나는 여성으로 간호사이거나 여의사로 보였다. 생활 형편이 어려울수록 옷차림을 통해 사람의 직업이나 직위를 가늠하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인 것 같다. 마치 파스텔톤의 영화 속 풍경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 여성을 보면서 한번쯤 말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사색에 젖어 있는 그녀를 만나 차라도 한 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를 망연히 응시하고 있는 그 젖은 사색의 풍경을 보며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었지만 그녀도 조선족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냥 지나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여기저기 가가호호 우리말로 된 표기가 정겹다. 그것도 색 바랜 세월의 무게를 떠 안고 있는 간판이나 집 번지로 보이는 기록을 담고 있는 문패를 보면 아무 집이나 찾아가서 술 한잔 수작을 벌이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불끈 솟는다. 버스터미널에서 조선족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민족이 많이 살고 있음을 실감나게 한다. 26만 화룡시 인구 중에서 조선족은 약13만에서 15만에 이른다고 하니 그럴 법도 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방이다. 침대와 책장이 놓여져 있고 그 방을 지나 바로 거실 같고 응접실 같은 안방으로 이어졌다. 안방은 구들이 놓여져 있는데 솥 단지까지 함께 어우러져서 방인지 부엌인지 분간이 없었다. 사모님께서는 바쁘게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했고 김 선생님은 서먹서먹, 나도 따라 서먹서먹 어색한 말문을 열어간다.

선생님께서는 잠시 후 밖에 나갔다가 오시더니 화룡이라 쓰여진 술을 사들고 오셨다. 중국돈 7위엔이란다. 그러니 우리 돈으로 치면 1200원 정도 하는 술이다. 우리는 술값이야기부터 그냥 저냥 밥 때가 되어 술을 한 잔씩 주고 받으며 서로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는 38°되는 술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리에 눕고 말았다. 몸을 가누기 힘들어 겨우 양해를 구하고 몸을 눕혔다. 거의 쓰러지다시피......, 그도 그럴 것이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선생께서는 맥주 잔에 가득 따라 주시고 건배를 몇 차례 하며 마신 술을 도무지 견뎌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취기가 가득 오른 탓에 한 잠을 자고 나서야 다시 늦은 밤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때는 이야기가 좀 더 깊은 속내까지 들어간다. 시간은 9시 30분이다. 한국시간으로 8시 30분, 우리는 남과 북, 그리고 민족의 다양한 문제 등을 화두로 삼아 두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어 다음 날 아침 6시쯤에 깨어나 식사를 마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곧 바로 떠날 채비를 하느라 바빴다. 사실 우리의 이야기는 남한 사람들이 중국에 와서 행한 행동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것과 문화적 차이를 완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서로 이야기하는 그런 것이 대부분이었다. 멀리 청산리로 알려진 청산이 보인다. 그 방향으로 사진촬영을 하며 일정상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대신했다. 아침에야 그 곳이 청산리란 사실을 알게 되어 그곳으로 카메라 렌즈를 줌인 한 것이다.

사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내가 함께 사진을 번갈아 찍었다. 사모님께서는 처음에는 사양하시더니 나중에는 함께 응하셨다. 말씀을 거의 하지 않고 듣기만 하시던 사모님께서 찻 머리에 나와 택시를 잡아 태워 주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서울에 큰 빌딩들 나온 사진 있는 책 있으면 좀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사모님은 고향이 북한지역 철원 출신이라고 하셨고, 밤새 말을 아끼셨으나, 민족의 반편이라도 크게 발전된 모습을 보고 싶어하셨다. 그것도 수줍음을 가득 머금은 입가에 잔주름 사이로......, 사모님은 민족이라는 인식 개념이 참으로 투철하셨다. 아직도 17세 시집올 적의 수줍음이 그대로 남아 있는 늙은 처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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