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나무에 주렁진 사(死)의 열매

  • 전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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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4.2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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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에 주렁진 사(死)의 열매

생명나무에 주렁진 사(死)의 열매
- 리삼월 "죽은 나무(생사선언)"가 보여주는 사망연습을 두고

망망한 바다에 떠도는 일엽편주 마냥 사(死)의 고해(苦海)를 항행하는 인간이고 보면 시시각각으로 사망을 감지하게 되고 사망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숙명으로 지고 태여난 인간인 만큼 피면할 수 없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은 알게 모르게 사망의 공포를 느끼게 되고 사망에 대한 사상(思想)을 한 시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혹은 깨끗하게 혹은 지저분하게 혹은 공포에 떨며 혹은 스치는 바람 마냥 태연자약하게 우리들은 생을 마감하고 자타의 의사에 관계없이 사망의 늪에 뛰어들어 부득불 사망과 한 덩어리로 되게 되고 사망의 세계에 추락하여 그 일원으로 새라 새로운 자기의 다른 한 단계의 생명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시인 리삼월은 자기의 파란만장한 인생행정을 더듬으며 풍부한 인생편렵에서 출발하여 짤막하고 평범하며 소박하고 진실한 몇 구절의 시로 우리들에게 자기의 인생과 생명주장을 솔직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죽은 나무(생사선언)

나무는 죽어도 넘어지지 않고 서있다
그건 인간의 자세가 아니다
나는 죽으면 넘어져 철저히 제 자리 하나 비워놓고 가겠다

죽어서도 햇빛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나무가 밉다
죽어서도 그림자를 만드는 나무가 밉다
죽어서도 수림의 비석처럼 서있는 나무가 밉다
죽어서도 겨울철엔 산것처럼 위장하는 나무가 밉다
죽어서도 봄철에 잎을 돋지 않아 이미 죽음이 폭로되었는데도
그냥 서 있은 나무가 밉다

나무는 죽어서도 넘어지지 않고 서있다
그건 인간의 지혜가 아니다
나는 죽으면 제 이름이 적힌 묘비로도 서있지 않겠다

"생사선언"이라는 다른 한 제목을 단 단시(短詩) "죽은 나무"는 더 소박할 수 없게 소박하고 더 진실할 수 없이 진실한 언어로 자기의 생명주장을 나타내고 있다.
제목 자체부터가 그렇다.
"죽은 나무(생사선언)"라는 더 소박할 수 없는, 너무나도 소박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 그 곁에 겨우 "생사선언"이라는 주해를 달았을 뿐이다.
인생은 결과적으로 화려한 것이였던가?
설사 그것이 찬란하고 화려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순간의 빛과 광환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인간은 인간대로, 빛은 빛대로, 광환은 광환대로 각기 자기들의 과거로 돌아가 굳어버리게 되며 인간은 여전히 하나의 생명체로 자기의 새로운 순간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것은 과거로 굳어지고 사망의 늪에 가라앉아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삼월은 사망자체보다는 사망의 자세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는 죽어도 넘어지지 않고 서있다
그건 인간의 자세가 아니다
나는 죽으면 넘어져 철저히 제 자리 하나 비워놓고 가겠다"
시인이 생각한 것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기 위한 마음을 가지고 인간세상을 살아가느냐 아니면 인간이 자기의 생명을 깨끗하게 마무리하느냐 하는 죽음에 대한 마음자세에 대해 사고하고 있으며 자기의 그 마음자세를 적라라하게 내보이고 있다.
시인은 "나무는 죽어도 넘어지지 않고 서있다/ 그건 인간의 자세가 아니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인간답게 깨끗이 자기의 삶을 정리를 해야 한다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고 나서 시인은 "나는 죽으면 넘어져 철저히 제 자리 하나 비워놓고 가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자기의 살아 생전에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시인은 깨끗이 정리하고 "사망"의 나라로 사라지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비워놓은 자리는 다시 정리되어 새로운 삶을 찾은 "나"가 차지할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생명을 시작한 어떤 다른 생명이 차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시의 이런 적라라한 표현에서 우리는 시인의 자기의 생명마감으로 새로운 생명에 터전을 마련해주려는 그 마음자세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생과 사는 동일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생에서 사망함은 사(死)에서 태어남을 의미하며 사에서 탈출이 바로 생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미국의 저명한 실용심리학자 브롬은 "인생이란 부단히 태어나는 과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생은 부단한 자아의 부정에서 오는 생과 사의 교차, 그러니까 인간의 사망을 단순한 생명활동의 결말로가 아니라 그밖에도 또 어떤 심리상태의 종말, 어떤 생활양식의 종말, 어떤 사업방식이나 자세의 종말, 어떤 환경의 종말, 등등으로 나름대로 이해해도 괜찮다는 말이 되겠다.
이런 시점에서 말했을 적에 죽음은 일종의 인생연습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중국의 나젊은 고승(得道高僧)으로 불리는 만행(萬行)이라는 스님은 자기의 폐관실록(閉關實錄)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자기가 아는 세상에서 자기가 모르는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 임종하는 그 찰나의 욕망이 내세의 방향을 결정한다. 또는 임종 때 그 마지막 기억이 내세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평시에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입정(入定)하는 목적은 죽음에 대한 훈련으로 죽음은 입정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죽음과 입정은 모두 맑은 정신으로 아는 세계로부터 모르는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입정(사망)은 ...이 세상을 버리고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시작이다. 그 영원 불멸의 것은 오로지 죽음을 즐긴다. 오직 죽음을 거쳐야만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은 생명으로 놓고 보면 종점이 아니며 이 단계를 결속 짓고 다른 단계로 들어가는 시작이다. 평생을 태연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임종 때 이 세상을 떠나기 아쉬워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이 그리워 떠나기 싫어한다 ... 죽음은 두려울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이 간다면 가고 온다면 올 수 있는 것이다."
"사망"에 대한 충분한 준비로 그것이 어렵지 않게 이뤄질 수 있고 그 앞에서 태연자약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새로운 사업환경이나 생활환경을 갑자기 마주했을 적에 초조하고 불안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직 그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런 적응과정을 거치면 다시 안온함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을 적에 우리는 그런 초조와 공포와 불안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시인 리삼월의 이와 같은 마음 자세는 독자들과 함께 하는 "사망연습", 즉 육체의 사망이나 어떤 재래의 생존환경의 변화에 대한 인생행정에서 더 없이 필요한 생명연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망연습을 충분히 거친 시인 리삼월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죽어서도 햇빛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나무가 밉다
죽어서도 그림자를 만드는 나무가 밉다
죽어서도 수림의 비석처럼 서있는 나무가 밉다
죽어서도 겨울철엔 산것처럼 위장하는 나무가 밉다
죽어서도 봄철에 잎을 돋지 않아 이미 죽음이 폭로되었는데도
그냥 서 있은 나무가 밉다"
우리는 너무나도 오랜 동안, 지지리 기나긴 세월을 남의 비석의 그늘아래서, 그림자 아래서, 거짓과 허위 속에서, 파렴치한 위장(僞裝)속에서 살아왔었다. 하기에 시인으로서 리삼월은 이를 미워한다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다.
역시 "만행대사"의 말을 빈다면 "사망순간의 마음자세에 따라 내세가 결정된다".
이 말을 속세의 말로 다시 풀어본다면 이 순간의 마음자세에 따라 새로운 인생순간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행상사(上師)는 사고로 사망한 사람(지진이나 차 사고나 폭발사고 등)은 령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말 그대로 혼비백산(魂飛魄散, 혼이 날아나고 백이 산산이 흩어짐) 했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우리의 말로 새로운 생존환경이나 생명형식에 대한 준비가 없기에 사망을 대했을 적에 혼비백산해버리고 만 것이다.
시인 리삼월에게 있어서 "죽은 나무"의 허위와 위장에 대한 결렬선언이 바로 하나의 생명으로 넘치는 사망연습인 것이다.
그러면서 리삼월은 인간다운 지혜로 생을 살아갈 것을 주장하고 있다.
"나무는 죽어서도 넘어지지 않고 서있다
그건 인간의 지혜가 아니다
나는 죽으면 제 이름이 적힌 묘비로도 서있지 않겠다"
인생이란 기실 출생(出生, 살아 태어남)과 입사(入死, 죽어 파묻힘)라는 두 점 사이를 잇는 하나의 선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내어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향한 출발이요,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가 바로 사망을 향한 진군의 시작이라는 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말했을 적에 인생은 한낮 사망연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어느 명인은 "생명이란 바로 죽음을 배우는 과정"이라는 말씀을 남겨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것은 오로지 사상을 가진 인간뿐이다. 때문에 시인은 "죽어도 서있는 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고 갈파하고 있다.
한편의 3련 12행에 지나지 않는 시로 시인 리삼월은 인생과정의 "사망연습"을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평범하고 소박하게 완성하면서 그 소박하고 진실한 시어(詩語)로 인생철리를 펼쳐보이고 있다.
2003.05.30, 해빛 찬란한 아침에 룡담산 기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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