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언어의 향

  • 전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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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원시평
  • 2006.04.28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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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언어의 향
-마음의 꽃으로 가꿔가는 양은희의 화원을 찾아서

마음의 하늘을 지나는 모든 사건들은 궤적을 남기지 않는다, 마치도 가을의 상공을 날아지나는 기러기가 오로지 머나먼 메아리만을 슬프게 남기듯이 한 번 지나면 다시 흔적이 없다.
그러나 그런 마음의 하늘을 날아 지나는 그런 종적과 정체가 없는 정처가 없이 지나가고 마는 사건들을 잡아 두는 사람, 그런 그림자들을 잡아두고 다듬어서 아름다운 꽃다발을 엮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마음의 고요를 찾는 사람들이요, 마음을 열어 세상 만사들을 아름다운 꽃잎으로 담아 두는 사람들이다.
'정심이라함은 마음의 안녕을 일러 하는 말일 것이다. 마음이 항상 바람 한 점 없이 맑은 가을날의 파란 호수물처럼 잔잔하고 고요해 재부와 권력과 성에 대한 욕심이 일잊 않고 타인에 대한 마음이나 질투의 심리도 생기지 않으며 더욱이 남을 해치면서까지 자신의 안일을 추구하는 그런 어지러운 행위가 없도록 살았으면 참 좋겠다.'
양은희는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바라는, 그런 것을 함께 추구함에 대한 갈구를 절절히 호소하고 있다.
그런 마음의 안녕과 고요함을 추구하면서 양은희는 또 세상을 회피하는 그런 소극적인 삶은 바라지 않고 있다. 다만 적극적인 삶으로 생을 살아가면서 잡소리가 없는 청량한 마음의 울림과 세속의 오염에서 벗어난 깨끗한 마음의 어울림으로 더욱 정차고 정직하고 박력있는 삶을 바랄 뿐이었다. 하여 그의 삶에 대한 지향은 깨끗하면서도 소극적이 아니고 소박하면서도 정열이 넘치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말하는 것이 삶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오히려 삶에 대한 애틋한 미련인것처럼 정심을 구하고자함은 삶을 향한 더 깊은 감동과 더 무게있는 격분, 그리고 더욱 박력적인 삶을 살기 위함이다.'
이것이 양은희가 추구하는 마음의 고요와 맑짐의 경지인 것이다.
하여 양은희의 수필에서 깨끗함은 정으로 하여 생기가 넘치고 고요함은 추구로 하여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하여 우리들은 고요함과 맑짐을 추구하면서도 생명의 활력이 넘치는 인생과정을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깨끗함은 세상사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의 분주함에 오염되지 안니하고 분주한 마음의 흐림으로 물욕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은희는 '하찮은 례물은 우둔한 자들의 발밑에 쌓아주시고 나에게는 번뇌를 갖지 않는 마음만 주옵소서'라는 말씀을 좌우명처럼 인용하고 있는 것 아니던가.(이상 '정심'에서)
6조 혜능(六祖慧能)이 사부(師父)님의 의발(衣鉢)을 받아 가지고 사형(師兄) 신수(神秀) 수하들의 암살을 피해가면서 어느 선사(禪師)의 설법(說法)모임에 가게 되었다.
그가 막 산문(山門)에 들어서는데 산문을 지키던 사미(沙彌) 둘이 한창 쟁론하고 있었다. 혜능이 다가가서 무슨 일로 쟁론을 하느냐 물으니 사미들은 각기 자기들의 주장을 말했다.
원래 선문 위에 꽃은 기발이 바람에 펄펄 휘날리고 있었는데 둘은 이를 두고 쟁론이 붙었던 것이다.
하나는 바람이 없으면 기발이 어찌 알 날릴 수 있느냐고 하면서 날리는 것은 기발이 아니라 기발이 펄럭임에 의해 나타나는 바람이기에 바람이 움직다고 하고 하나는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은 기발이기에 기발이 움직인다고 했다.
그말을 들은 혜능은 두 사미들을 보면서 한마디했다.
'바람도 기발도 움직이지 않는데 자네들의 마음이 지금 움직이고 있네.'
선문(禪門) 조사(祖師)님의 깊은 뜻을 알 수는 없다만은 때로 우리는 세상을 밝고 명랑하나 마음의 흐림으로 하여 어두운 나날들을 보낼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마음의 고요함과 맑짐을 추구하는 것인지.
누군가는 마음도 뜰이라고 했다.
마음도 뜰, 마음도 뜰처럼 가꾸고 다듬어야 정(靜)하고 아담한 뜰이 될 수 있다는 그런 말씀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 가꿈과 다듬음은 각각이요 나름대로라 그 가꿈의 각각과 나름대로에 따라 사람됨됨이도 다르지 않을가, 그가 살아가는 인생과 그 살아가는 인생자세도 다르지 않을가 하고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양은희의 마음의 고요함을 추구하면서도 정찬 인생을 향수하는 그런 마음가짐을 우리는 '제5의 계절'에서도 얼마든지 읽을 수가 있다.
양은희는 몇 년 전부터 자기는 제5의 계절이 느껴진다고 한다.
'늦가을이나 초겨울, 또는 이른 봄... 이런 표현들을 두루 쓰기도 하지만 그런 명사로 그냥 쉽게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아쉬움이 남는 그런 계절, 다른 계절에 비해 조금은 마음이 쓰이고, 때론 허망한 것 같기도 하고 때론 아릴싸한 듯도 싶고 또 때론 공연히 마음이 허공에 뜬채 어딘가에서 누구에겐가에서 오랜 만에 전화라도 걸려올 것만 같은 뜻모를 기다림이 생기는 그런 계절을 제5의 계절이라고 불러본 것이다.'
어찌보면 인간 누구나가 그런 감회를 가질 수 있는 계절, 그리고 때로는 누구나가 한번 쯤은 가져보게 되는 이름 모를 어떤 바램과 기다림과 문득 닥쳐드는 그런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양은희는 솔직히 우리들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 아닌가싶다.
그래서 양은희는 쓸쓸한 낙옆이 흩날리는 가을 들녘에서도 선배님들과 함께 벅찬 생명과 뜨거운 삶을 느낄 수 있고 가을의 쓸쓸한 들에서도 넘치는 생명을 만끽하면서 자연과 조물주에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양은희가 느낀 것은 선배님들의 기도에 대한 감동이요 이런 기도의 즐거움을 주신 조물주에 대한 무한한 격동인 것이다.
'시간표처럼 가위를 들고 이 가을의 마지막 서정인 들꽃을 아직은 덜 핀 것으로 한점 두점 잘라간다. 이제 그 하얗고 노란 들꽃들은 설렁설렁 추위를 타기 시작하는 집안으로 옮겨져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보이는 집안의 풍경을 따듯하고 푸근한 정서로 바꾸어주게 되는 것이다.'
한산한 가을의 들녘에서 양은희는 약동하는 생의 정열을 보아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은 한적하면서도 쓸쓸한, 어딘가 멀리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고음으로 어울린 비애로 넘칠 제5의 계절에 다시 아름다운 꽃다발을 선물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느껴보게 되는 것이다.
'가슴 설레임과 쓸쓸함, 그리고 뜻모를 서성임이 동반된 제5의 계절, 그런 계절에는 가슴 쓸어내리는 아픔을 홀로 앓기보다는 자연으로 화합해 들꽃들의 언어에 귀라도 귀울여볼 판이다. 그냥 이름 없는 꽃으로 남기지 말고 그 해맑은 서정을 피워주는 작은 꽃들의 이름이라도 어느 사전에서 찾아불러 줄 일이다. 그러노라면 어느덧 그 자은 꽃들의 사연과 향기는 어느덧 우리들의 가슴에 닿고 몸에 닿아 우리들 자신이 그런 향기를 지니여 타인을 위한 한줄기 향기로 된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이상 '제5의 계절')
우리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적어도 수 천년을 마음의 안정과 고요를 찾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름다운 말씀과 심오한 진리, 그리고 끈질긴 추구와 간거한 수련의 나날들을 보내왔으나 우리는 여전히 서성이고 있고 아직까지 찾아 헤매야 한가.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어쩌면 위대한 진리보다 사사로운 주위의 사소한 일상들에서 우리는 그 천년 만년의 추구를 알아내고 아집에서 벗어날 수 도 있는 것 아닌지...
'생의 순간순간을 마음껏 향수하자!'는 구호가 낙서처럼 여기 저기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는 오늘, 양은희는 생의 무한한 향수를 지는 가을의 처연한 들꽃과 세월의 언덕에 올라선 선배님들의 생에 대한 끈끈한 애착에서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향수란 다 같이 알고 있다시피 사람마다 나름대로라 어떤 이는 생의 향수를 번화한 거리의 세속에 젖어 주마등처럼 오가는 일상들에서만 느낄수 있고 어떤 이들은 낙옆 짙은 가을의 산간 오솔길, 말라들기 시작한 들풀사이에 피어나는 파아란 민들레 잎에 대한 애착과 거기서 오는 감동에서 인간 생명을 한껏 향수하기도 하는 것이다.
양은희는 바로 일상의 마디마디마다에서 생의 희열을 느끼고 있으며 생을 마음껏 향수하고 있다.
이런 일상의 사사건건에서 생의 희열을 감수할 수 있음을 양은희는 어쩌면 마음의 비움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양은희는 마음의 비움으로만이 충분히 행복스러울 수 있다는 이치를 우리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수확이 끝나 모든 것이 비워진 겨울, 그러나 음양오행설의 대가들은 이제 충만하기 시작하는, 이제 바야흐로 봄을 위해 충만되기 시작하는 겨울에서 양은희는 생명의 박력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저 그뿐이랴...
모든 것이 떠나가고 없는 겨울의 녘을 불어오고 불어가는 바람이 있지 않은가. 가만히 그 바람소리에 귀 귀울여보면 솔솔 거리는 이야기들이 있다.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자연이 지어낸 이야기들과 그리고 그 자연속에서 숨쉬며 살아온 인간들의 이야기가 귀전에 메아리로 돌아오고 있다.'
그래서 양은희는 과거의 지나가버린 일상들에서 생명을 만끽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들이 그것을 아직은 보아내지 못했을 따름이다.
'비여있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아름다울 수가 있음이요, 맑을 수가 있음이요, 밝을 수도 있음이다.'(이상 '겨울의 녘')
그래서 우리는 양은희의 수필에서 다시 한번 소박한 진실을 느껴보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인류의 모든 역사는 언어로서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들이 느끼고 보고 듣고 읽고있는 것들의 력사를 우리는 오로지 언어로서만이 실현가능하다고 한 바 있다.
양은희의 수필들에서 다시 한번 언어의 매력을 느껴보기도 한다. 유유하고 부드러운 절주와 깨끗하고 미끈한 흐름으로 화려함과 조각이 없이 그대로 부드럽게 안겨오는 언어로 양은희는 자기의 수필 영지를 개척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럼으로 하여, 그 부드러운 언어의 향으로 하여 우리는 거부감 없이 양은희의 수필들이 말해주는 생명의 추고와 인생의 철리들은 자연스럽게 공유(共有)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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