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하라

  • 김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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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시
  • 2006.11.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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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하라
                --김학철문학비 제막식 측기


4일, 김학철문학비 제막식이 도문시 장안진 경내에 자리한 생태문화관광구로 이름 높은 룡가미원(龙家美苑)에서 있었다.

이날 연길서 있은 김학철 김사량 문학과 조선의용군 항일투쟁 국제학술회의  참가자들로 정중한 분위기를 이룬 김학철문학비 제막식에서는 시인 조룡남의 사회하에 룡가미원을 일떠세운 필충극 화백이 김학철문학비를 세운 자신의 경위를 밝혔다.

《해란강아 말하라》를 맹독하게 되였던 소학시절, 참뜻은 읽을리 만무했지만 일본놈한테 한쪽다리를 빼앗긴 사람 그리고 총대 대신 붓대를 들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유명짜한 문화궁전공판사건에서 예순이 넘는 외다리 로인을 바줄로 목을 옭아 쓰러뜨리고 쇄막대기와 걸레짝을 쑤셔넣어가며 아갈잡이도 서슴치 않았지만 결국 공판은 박살이 됐다는 뒤 소식, 로신의 《횡미랭대천부지》인이, 팽덕회 버금으로 황제와 시비를 건 분이 지척인 연길에서 나타났다는것이 큰충격으로 안겨왔다.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련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는 유언, 병원치료와 주사를 거부하고 금식하면서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앞당겨 끊었다는 고금중외에 들어본적 없는 사연은 그이의 죽움에 대한 자세, 고결한 넔과 인격이 너무나 인간의 사유와 행동을 초월했기 때문에 믿기지 않았으나 불의에 도전하며 사람답게 살아온 위인의 사상에 대해 진정 느끼게 되였을 때 창작의념이 무던히도 북받쳤다.

넋만 남기고 조용히 떠나갔기에 후세인들에게 만남의 기념비를 세워 추모의 장소를 만들어야 겠다고 마음 다지고 6년 세월이 지나서야 오늘의 이 만남의 기념비를 세울수 있게 되였다.

기념비의 창작수준이 높낮음을 떠나서 당신이 사랑하고 애지중지했던 안해와 아들 그리고 손자 손녀가 그리움의 울음이라도 실컷 울수 있는, 마지막 유언으로 허락된 장례에 참가할 열두사람들의 추모의 만남장소로 되는것만으로도 족하게 생각한다. 김학철선생은 어느 한 가족이 아니라 우리민족, 세계민족의 참삶의 본보기이기 때문에 많고많은 사람들이 경의에 못이겨 잊지 않고 찾아주는 성지로 거듭나리라 굳게 믿는다.

망치에 맞으면 맞을수록 강해지는 철의 강인한 기개,편안함을 외면하며 불의에 도전을 하려 변을 택하지 않고 각을 택하신 투사의 거룩한 정신이 거대한 사상으로 변화되였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리고 이날 김학철문학비 제막식에서 연변인민출판사 사장조리 류연산은 김학철선생에 대한 추모의 정을 안고 무한한 회포와 끝없는 감회가 무던히도 북받쳐  선생님은 5년전에 생을 마치고 한줌의 재가 되여 종이우편함에 넣어져서 두만강을 떠갔다.

수천원, 수만원씩 하는 정교한 골회함에 담겨져서 화장터에 보관이 되는 사람들에 비하면 초라한 모습이였다. 수만원, 수십만원씩 하는 경도릉원에 묻히고 무덤앞에 멋진 비까지 세워진 사람들에 비하면 더더욱 초라한 모습이였다. 시의 국장급부터는 죽어서 혁명렬사릉원 골회보관소에 특별보관이 된다고 한다. 그들은 주급이요 시급이요 하고 시시콜콜 인생약력을 묘비에 새겨놓고는 시뚝해서 무덤속에 누워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결코 돈이 없어서가 아니였다. 선생께서 쓰신 책 한권의 초판 인세만이라도 넉근히 해낼수 있었다. 했지만 글 쓸때 군더더기는 무자비하게 베여버리듯 인생의 혹을 구질구질하게 본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사람이 없어서도 아니였다. 선생을 바래는 길이라면 숱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와서 추모를 했을것이다. 직위에 눌려서, 재물에 반해서 마지못해 찾아와서 얼굴을 보이려고 허둥대는 그러한 사람들은 선생님의 장례식에는 없었을것이다.

해놓은 일이 없어서도 아니였다. 선생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살아생전에 계급에 연연하지도 않고 명예에 탐하지도 않고 물질에 고민하지도 않았다. 오직 진리를 위해 창작에 모든것을 바쳤다. 그리고 조용히 갔다. 연회는 계속되고있는데 남들의 열띤 분위기를 깰가봐 화장실로 가는것처럼 남 모르게 송엽장을 짚고 연회장을 나와 집으로 가듯 숨막힐듯 벅적이는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갔다.

선생한테 죽움은 강원도 원산 앞바다로 가서 부모형제들과 자리를 같이하는 새로운 삶이였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사변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선생을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는 끊없는 아쉬움이, 영원히 선생을 모시고 살고픈 간절한 욕망이 오늘 기념비로 이 땅에 박혀있다. 이 순간 우리는 문학비에 그려진 선생의 모습을 마주하고 문학비에 새겨진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는 선생의 말을 듣고있다. 선생의 유언은 불의의 가슴을 찌르는 창끝이 되여 천지간에 기념비로 솟아있음을 우리는 본다고 했다.
                           
                                      (기자  김성걸  류일석)

                              인터넷길림신문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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