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꽃과 백두산 /석화

  • 김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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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시
  • 2007.05.05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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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1

  ― 천지꽃과 백두산


이른 봄이면 진달래가
천지꽃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피어나는 곳이다

사래 긴 밭을 갈면 가끔씩
오랜 옛말이 기와조각에 묻어 나오고
룡드레우물가에
키 높은 버드나무가 늘 푸르다

할아버지는 마을 뒤 산에
낮은 언덕으로 누워 계시고
해살이 유리창에 반짝이는 교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가 한창이다

백두산 이마가 높고
두만강 천리를 흘러
내가 지금 자랑스러운
여기가 연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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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4

  ― 연변은 간다

연변이 연길에 있다는 사람도 있고
구로공단이나 수원 쪽에 있다는 사람도 있다
그건 모르는 사람들 말이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연변은 원래 쪽바가지에 담겨 황소등짝에 실려 왔는데
문화혁명 때 주아바이5)랑 한번 덜컥 했다
후에 서시장바닥에서 달래랑 풋 배추처럼 파릇파릇 다시 살아났다가
장춘역전 앞골목에서 무우짠지랑 같이 약간 소문났다
다음에는 북경이고 상해고 랭면발처럼 쫙쫙 뻗어나갔는데
전국적으로 대도시에 없는 곳이 없는 게 연변이였다
요즘은 배타고 비행기타고 한국 가서
식당이나 공사판에서 기별이 조금 들리지만
그야 소규모이고 동쪽으로 동경, 북쪽으로 하바롭쓰끼
그리고 사이판, 샌프란시스코에 파리 런던까지
이 지구상 어느 구석인들 연변이 없을쏘냐.
그런데 근래 아폴로인지 신주(神舟)인지 뜬다는 소문에
가짜려권이든 위장결혼이든 가릴 것 없이
보따리 싸 안고 떠날 준비만 단단히 하고 있으니
이젠 달나라나 별나라에 가서 찾을 수밖에

연변이 연길인지 연길이 연변인지 헷갈리지만
연길공항 가는 택시료금이
10원에서 15원으로 올랐다는 말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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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6

  ― 퓨즈론

랭장고든 전자렌지든
TV 또는 오디오든
괜찮은 물건들에는 다 있다
사람의 그것처럼
은근히 부끄럼 타는 그것은
물건들의 뒷부분 엉덩이 쪽에 숨어있다
구석진 곳에 코 박혀 숨이 칵칵 막혀도
빛 한줄기 못보고 먼지만 쌓여가도
처절한 《살신성인》
단 한순간의 사명을 위하여 인내하는
전류든 전압이든 과부하가 걸릴 때
제가 먼저 새카맣게 타서 끊어져 버리는
퓨즈는 가전제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랭장고가 다시 찬바람 내고
TV가 다시 꿈같은 오색의 세계 펼쳐주고
제 몫을 다한 그것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때
예민한 센스 때문에 제 몸 먼저 태우는
퓨즈가 물건에만 있는 것이 아닌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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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14

  ― 씨앗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밭고랑사이에 묻어둔 것 일뿐
우리들의 눈에 잠시 보이지 않아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서리는 기운 껴안고
씨앗들은 가만히 눈을 감고 누었다
구름이 비로 내리고
꽃은 열매로 모양을 바꾼다
천년이 간들 어떠리
오동성9) 담벼락에 부서지는 햇살이
늘 저러하지 않았다고 누가 말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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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15

  ― 돈화역에 내리면



기적소리 한줄기
베개머리를 스쳐간다
열차의 차간마다에 실려서
반짝반짝 눈을 뜬 꿈들이
여래보살 옥구슬로
목덜미 따라 줄지어 가고
큰소리치는 기차가
어둠 속에 지워진다

발해를 만나려
돈화역에 내리면
나를 싣고 온 밤 기차
해가 뜰 때까지
굽이굽이 몸속을 굴러가며
울먹이는 기적소리를 듣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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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18

  ― 하산
 

하늘을 만져보았으니
내려가는 길이 남았다

바람과 
산새소리와 
손에 잡힐 듯하던
흰 구름에
오르는 걸음이 다급하였지만

내려가는 길은
조심 또 조심
살펴 디뎌야 한다

단단한 돌부리와
확실한 그루터기에
발을 맡기면서
내려가야 한다

봉우리의 끝은 있지만
나락의 바닥은 없다고
하늘이
잔등 뒤에서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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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23

  ― 쌀은 내게로 와서 살이 되는데


햅쌀밥 맛을 보라고
시골 사는 농부시인 김일량씨가
쌀 한주머니 보내왔다
알알이 윤기 흐르는 쌀알들
친구시인 구슬진 땀방울 아니랴
두 손 모아 쥐어보니 손바닥이 매끄럽다
앞벌에 펼쳐진 그 검은 흙에서
그 흙을 적시던 도랑물에서
이처럼 새하얀 입쌀 이뤄 내다니
봄, 여름, 가으내 철철의 신고가
알알이 맺혀서 반짝이는가10)
쌀알 한알한알 모두가 소중하다
친구가 보내온 쌀이 내게로 와서
한 그릇 밥이 되어 내게로 와서
이제 내 살이 될것이지만
나의 무엇이 그대에게로 가서
쌀이 되고 살이 될것인가
그저 송구하고 미안하고 또 그리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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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24

  ― 손가락 까딱하면
 

손가락 까딱하면
파일 하나 지워진다
왈가왈부 떠들썩하던 시비꺼리들이
삭제된 문서로
순식간에 사라진다

손가락 까딱하면
재잘거리던 참새 새끼가
입 꼭 다물고 곧게 추락한다
한 덩이 상처로
발부리에 떨어진다

손가락 까딱하면
윈도우 창이 깨끗이 지워지고
손가락 까딱하면
하나의 세상이 문을 닫는다
손가락 까딱하면

거룩하여라, 손가락 까딱할 사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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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29

  ― 만병초

너는 누구냐
사철 푸른 나무이면서
풀의 이름을 가진―

너는 누구냐
향기로운 꽃을 피울 줄
알면서도 풀의 이름으로
만족하는―

여느 꽃들은 감히
쳐다 못 보는
여느 나무들은
따라설 엄두도 못 내는
이 땅
제일 높은 곳에 뿌리박고
몸 곁으로
온갖 풍운의 조화를
스쳐 보내는

나무로 불리면 어떠랴
화려한 꽃의 이름 아닌들 어떠랴
그저 풀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고맙다는 너―

그래서 만병초,
너와 만나려면 꼭
백두산에 올라야 하는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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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31

  ― 길이 길다


칠월땡볕에
수레바퀴자국을 가로 질러가는
개미들의 발이 따갑다

한구간씩 똑 같은 거리를 재며
회룡볼고개마루로 사라져가는
전보대의 그림자가 희미하다

앞내가 돌다리를 건너간 마을애들
저기 푸른 하늘가에 뒤모습만 얼른거리고
동구밖으로 서성이는
할아버지의 허리가 더욱 굽었다

길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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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석화(石華) 약력:

중국 길림성 용정 출생.
중국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부, 한국 배재대학 인문대학원 졸업.
연변인민방송국 문학부 주임, 《연변문학》월간사 한국서울지사장 역임.
연변작가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회원.
현재《연변문학》월간사 편집,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집: 《나의 고백》, 《꽃의 의미》, 《세월의 귀》《연변》 .
수상: 《천지문학상》, 《지용시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모드모아문학상》외.
《석화시인의 시 카페》 :    http://cafe.daum.net/seokhua
《석화시인의 홈페이지》 :  www.port.or.kr/shihua
 E-mail: shihua@hanmail.net
 주소: 中國吉林省延吉市河南街 22號
      《延邊文學》月刊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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