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미친 / 김상미

  • 김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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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시
  • 2007.08.0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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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미친

                  김상미


시 쓰는 법을 잊어버렸어요

시를 위해 봉사하던 마음을 잊어버렸어요

선명함이 미묘함에 뒤섞여 끊임없이 말장난 치고 있어요

어떤 길을 달려도 길 끝에 있는 건 거대한 쇼핑센터

복제되고 복제된 詩法들이 횡행하고 있어요

한 송이 시를 사들고 왔지만 어느새 꽃받침이 떨어져나가고 없었어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처럼 시에다 포도주를 엎고,

그 위에다 내 속의 독이란 독 다 쏟아내고 싶었지만

시 쓰는 법을 잊어버렸어요

그 동안 너무 많이 울었나 봐요

새빨간 버찌를 너무 많이 가슴으로 삼켰나 봐요

언어 없이 어떻게 한세상을 살라고

푸른 잔디밭에 펴놓았던 하얀 토끼풀들을 남김없이 다 뜯어버렸나요

제발, 영감을 줘요

그것이 존재한다면

일요일에도 공휴일에도 하루 내내 시를 위해 봉사하겠어요

내 시에 씌워진 가면을 제발 벗겨줘요

가끔, 아주 가끔씩은 동물원의 주인공처럼

온 몸에 달콤한 인공향료를 바르고

당신들의 거대한 쇼핑센터 진열대에 오르는 꿈에 가위눌려 깨어났어요

제발, 모욕을 줘요

시들이 자꾸만 옆길로 빗나가고 있어요

아귀처럼 통째로 나를 집어삼켜 서서히 파먹는 희열,

그 메스꺼운 도취를 제발 내게 줘요

내 속의 이 엄청난 식욕은 시가 만들어낸 발작

내게서 그 질병의 광휘를 앗아가지 말아줘요

제발, 잊어버린 것들을 다시 돌려줘요

여태껏 지구를 강타한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날개로

시의 층계를 한 발 두 발 올라가고 싶어요

제발, 쉬쉬하며 부는 저 들판의 무심한 바람들을 무자비한 폭풍으로,

시에 미친 천둥번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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