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 / 문정희

  • 김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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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시
  • 2010.09.2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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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시    /  문정희 ♣

 
어머니의 위대함은 가엾음에 있다
이 시의 첫 줄을 써놓고
한 시절을 보내고
이제 이렇게 풀어 나간다

어머니는 나처럼 시를 쓰지 못해
천둥과 번개를 침묵으로 만들어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고 살았다
그리고 고층 아파트에서 혼자 죽었다

이삿짐을 내리는 선반 사다리 대신
한 남자가 짐승처럼 등을 구부리고
검은 관을 지고 내려왔다
술 냄새 짙게 풍기며 고꾸라질 듯
층계를 내려오는
어머니의 죽음보다 더 슬픈 등

그 무량겁의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나는 생애의 울음을 멈추어버렸다

비로소 신의 손을 잡을 일밖에 남아 있지 않는
마지막 낮은 사람의 등을 보았다

어머니는 나처럼 시를 쓰지 못해
시 대신 보여준 끝 장면은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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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쁜 시인  /  문정희  ♣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민중시인 K는 유럽을 돌며
분수와 조각과 성벽 앞에서
귀족에게 착취당한 노동을 생각하며
피 끓는 분노를 느꼈다고 하던데

고백컨대
나는 유럽을 돌며
내내 사랑만을 생각했어

목숨의 아름다움과 허무
시간 속의 모든 가변에
목이 메었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눈물을 흘렸지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성벽을 바라보며
오래 그 속에 빠지고만 싶었어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곤도라를 젓는 사내에게 홀딱 빠져
밤새도록 그를 조각 속에 가두려고
몸을 떨었어

중세에 부패한 귀족이 남긴
유적에 숨이 막혔어
그 아름다움 속에
죽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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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많던 여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 문정희 ♣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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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  / 문정희  ♣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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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정희 --
1947년 5월 25일, 전남 보성군 출생.
1969년 월간문지학 시'불면','하늘' 발표 문단 데뷔.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졸업.
현대문학 경력 2007년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2005년 동국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과 석좌교수
2008년 제28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 문학부문상 수상,
 2004년 나지나만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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