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문명의 발자욱을 따라 길을 걷는다는 것은
맨땅을 걷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 매혹되게 하는 묘미가 생긴다.
이틀간의 고행은 내게 추억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느끼게 했다.
간혹이었지만, 친구들과 먼 길을 걸었던 날도 그렇고
일상적으로 걸어다녔던 10리(4KM) 길도 그렇다.
바닷가 백사장을 걸어 학교에 다녔던 내가
시 한편 써내지 못하는 추억이 서려있는 현장이라서 마음에 쓸쓸과 아쉬움이 더하기도 하지만...,
점암에서부터 80KM 되는 지점인 해보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맛있는 저녁식사에 술한잔을 하고 싶었지만,
혼자서 술마시기에는 좀 아쉬운 여정이다.
그래 그냥 참기로 하고...,
축구 평가전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했다.
그런데 다른 채널에서는 조선시대 두 사상가의 아름다운 로멘스를 소재로 한
역사스페셜이 방영되고 있었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四端七正으로 8년간의 아름다운 논쟁을 벌였던 이야기다.
안동 사람 이퇴계와 장성 사람 고봉 기대승의 아름다운 논쟁과 우정은
로멘스로 표현해도 지나침이 없다.
오늘 나설 길이다.
고봉 기대승의 장성군 필암리...,
아무튼 오늘 걸음을 염두하며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과 학문에 대한 신념을 지켜가는 모습은
절로 고개를 수그리게 할만했다.
해보를 출발해서 월야면, 장성군 삼서면, 삼계면, 동화면, 황룡면, 장성읍, 진원면, 대전면까지...,
숙소를 찾지 못해 연장해서 걷다가 지친 걸음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대전면에서 지나가는 트럭을 잡고 도움을 요청했다.
모텔이 있는 곳까지만 태워다 줄것을...,
그는 진원면에서 담양읍에서 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이라 했다.
정병열(43세)씨 고맙습니다.
나는 그의 도움을 받은 답례로 나의 시집을 한권 선물로 전했다.
14개 시군을 지나며 의미있게 만나는 사람에게 전하려고 10권의 시집을 준비했으니...,
가방이 참 무겁다.
나는 그의 자동차로 수북면을 거쳐 인터넷방이 있는 담양읍까지 왔다.
그리고 아직은 숙소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오늘도 길을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한양 과거길에 오른 선비들을 생각하기도 했고...,
밤 늦은 길에 몸이 지치고 다리가 부어오르자 태백산맥의 주인공들...,
독립운동가들, 아리랑의 주인공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꽃파는 처녀의 꽃분이도 생각했다.
쉬거라!
쉬거라.
쉬어 가거라.
그렇게 쉬어 갈 줄 알아야 한다.
쉬지 않으면 가지 못하리.
쉬지 않으면 그대가 원하는 그 길을 가지 못하리.
오늘을 잘 쉬어주면 내일 그 길에서 웃을 수 있으리.
잘 쉬어주는 일이
길에 이를 수 있는 길이니
가고자 하는 길이 있는 사람이라면
때때로 쉬어 주거라.
쉬지 않고
길에 이르기 위해 길을 가기만 한다면
가다가 그 길에 채여 넘어지리라.
쉬지 않고
길에 이를 수 없으니
그대여! 길에 이르고 싶거든 길에서 쉬거라.
멈춰선 길에 있는 그대여!
바로 그대가 멈춰 선 그곳에서 길은 시작되나니
그대여! 성냄도 조급함도 없이
그 길에서 유쾌한 쉼을 통해 내일의 길을 가시라.
길을 가다 지쳐 쉬어갈 곳을 청해 보려고 마음을 다잡다가
세월이 많이 수상한 시절에 내가 수상한 자가 될 것이 꺼려져서 그냥 멈춰선다.
친구들아! 그대들은 길가는 나그네를 재워줄 수 있는가?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나그네를 재워줄 사람이 몇이나 되려는지...,
믿거나 말거나 난 재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네만,
아무래도 남들이 낯선 나를 꼭 재워줄 듯하지 않아서...,
그냥 반성만 하다가 모텔을 찾기로 했다네.
지친 걸음에 마음은 붉은 노을처럼 사람을 향해 가지만...,
세상에서 배운 지식과 상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아스팔트 길에서 흙 길의 차이만큼 벌여 놓았네.
그래! 잘못 많이 배운 죄값이려니...,
이것이 이 시대가 우리에게 준 죄값이려니...,
내일도 길은 열려 있을 것이고 내가 시작한 내 발끝의 길을 찾아가리라.
그 길에 벗이 있다면 반겨 만나리.
국도 24호선 담양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