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기만하지 않는 수많은 행복한 사람들

  • 김형효
  • 조회 3306
  • 2005.09.0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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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도 끝없는 길, 길 위에 길, 도서관에서 바라본 인생길

   
 
 
내 나이 40이 가까워 오는 동안 도서관을 이용해 공부해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한쪽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깡촌인 고향에는 어린 시절 도서관이란 것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러니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이 익숙할 리가 없는 것이니, 어쩌면 그 길들여진 대로 사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게 된 배경인지도 모른다.

설령 도서관이 있었다해도 어머니 아버지 일 도와가며 소꼴도 베고 아궁이에 지필 불쏘시개라도 될 낙엽송을 긁어 모아 한 망태기 져다부려 놓아야 하루를 마감한 밤에 편안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해 놓고 나면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아버지 어머니의 싫은 소리가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진한 추억의 한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기억들이고 너무도 그리운 기억들이지만, 그때는 왜 그리 고달프고 힘겹던 일인지?

오늘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시나 쓰고 책이나 보면서 넉넉하게 살 수 없는 현실을 살기 위해, 또다른 준비를 해야한다는 신혼인 아내의 등떼미는 통에, 인근 도서관을 찾았던 것이다.

37살 노총각 면제 시켜준 아내가 고맙기도 하고 마땅한 직업도 없고(사실은 너무나 여러가지 일을 두루해본 덕택에 특별한 일이 없다. 사람들은 편한 일만 하며 체면치레나 하고 살기를 더 원한다) 그러니 컴퓨터 관련 자격증이라도 취득해서 살 궁리를 해놓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면서 취직도 하지 말고 우선 학원에 전념하라는 아내의 분부를 거절할 수 없는 것이 내 처지다.

나는 사는 궁리에는 도가 터서 결혼을 하자마자 돈도 안되는 출판사를 임시 휴업하면서 택시운전자격증도 따고 달리 취직할 궁리 끝에 발신자정보서비스가 되는 전화기 판매 회사 영업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 무소용이 된 것은 아내의 성화탓이다. 들은 이야기로 아내의 말씀이 지당하건대 거절할 명분이 없다.

그리저리해서 자격증 준비를 위해 학원에 다니는데 연일 안티조선 시민연대 일인시위, 소파개정국민행동본부 일인시위 등등을 쫓아다니느라 제대로 진도를 맞추지 못하여 이번 연휴에라도 그 진도를 맞춰 볼 요량으로 도서관에 갔던 것인데, 난 그곳에서 또한번 인생의 고달픈 체험(?)을 두눈 뜨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세수도 제대로 못한 채 아침겸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도착한 시간이 낮 12시 10분, 도서관 건물 밖에 봄날의 햇살이 짖궂다 싶게 내리쪼이는 도서관 처마에 줄을 섰다. 이제부터 내가 들어서는 이 길이 인생길과 어쩌면 이리 똑같은가 싶어 참 사는 것이 이렇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고 지루하여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이른 것이지만, 이른 시간에 깨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나오는 사람들이 좌석표를 반납하고 차임벨이 울리면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사람씩 도서관에 입장을 한다.

참 이 도서관은 무슨 조화로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햇살에서 그늘로 그늘에서, 문 안으로, 문안에서 창가로, 창가에서 벽으로, 아! 여기까지, 그래 벽에만 기댈 수 있어도 너무도 편안한 것을, 가다보니 이제는 팔걸이도 없는 낮은 나무 의자, 그 다음은 양팔걸이가 고스란히 편안하게 팔을 받쳐주는데, 아하 이 편안함, 그러나 고행이 또 이제부터인 것을 어쩌겠는가? 이제 차임벨을 듣고 좌석표를 받아들고 입장을 하는데 이놈에 공부가 쉽게 되는가?

이제부터다. 삶은 이렇게 꼬이고 풀어지고 수없이 반복되는 긴장과 번민의 고행 속에서 하나 하나를 성취해가는 것이련가? 그리고 그 성취 후에 오는 안락함도 맛본 사람만이 아는 안락인 것을, 고행을 감당하지 않고서 바라볼 안락과 희망이란 것이 극명하게 제한되고 제한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으니, 우리가 살아가며 대항하는 세상만사가 무난하고 형통하리라고만 생각하지 말 것을 제안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서툰 인생길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서관이 부재하다는 현실 때문에 힘들이지 않아도 될, 고단하지 않아도 될 일에 고단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서 주변에 많은 도서관들이 들어서서 책읽는 골목이 생기고 책읽는 넉넉함 속에 사색하는 즐거움을 서로 나누는 여유가 확보되길 기대한다.

우리가 사는 인생에는 길마다 길마다 길 앞에 놓인 장애물이 있고, 또 돌아서 새롭게 힘차게 가는 길이라도 다시 뜻대로만 열리지 않는 것을, 내 지난 삶 동안 열심이 살아온 지금 후회는 없다. 그리고 후회없음은 쉬임없이 노력해 왔다는 혼자만의 당당함에 있으니,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나의 아내도 넉넉한 웃음으로 저녁 밥상머리에서 반겨 웃어주었을 것이다.

고난을 기만하지 않는 수많은 행복한 사람들이 고난을 감당하며 가는 그 길을 항상 함께 하며 따르고 함께 가리라는 다짐과 함께...

5월 6일 저녁, 내일의 고난을 즐겁게 이겨낼 것을 약속하는 동지들이 세상에서 지금도 고난을 기만하지 않고 있으리라는 것을 믿으며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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