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동해로 4박5일--1부

  • 김형효
  • 조회 4958
  • 2005.09.17 11:15
  • 문서주소 - https://sisarang.com:443/bbs/board.php?bo_table=mytravel2&wr_id=41
지난 주 수요일 대구시인학교에서 시낭송자로 초청을 해와서 목요일 행사에 앞서 수요일에 대구로 향했다. 대구의 성서 와룡공원을 찾아 그곳에서 현장노동자들의 공연을 보았고, 그 공연은 대구지하철 참사를 알리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행사 진행자로 보이는 이들이 입고 있는 조끼는 사회당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낯설지만 전혀 불편함이 없이 그들은 행사를 열어가고 있었고, 그곳에 공연자로 참여한 가수 박창근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박창근의 집으로 향했다.

가수 박창근은 그동안 많은 사적 고뇌를 경험하고 깊은 사유로 지내온 느낌을 주었고 그러저러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저녁 식사는 채식으로 차려졌다. 그렇게 상을 물린 후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밤이 깊었고 백세주 한잔 맥주 한잔을 나누어 마시며 채식으로 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다소 경이로운 변화였다. 만남이 반가웠고 그의 변화가 현실에서 어렵지만 무언가 근원적으로 개선해야할 인간의 삶의 편린 같은 것이며 그런 변화가 중심적 화두로 발전되어 가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날 이후 4박5일간 나는 채식만 하였다.

다음날 날이 밝았고 창근이와 다시 시작한 이야기는 밤에 못 나눈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었다. 마치 "어느 채식주의자와의 만남"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그런 분위기였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연과 호흡하며 살아야 하고 그 자연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진보를 실행에 옮길 수 있겠는가? 하는 창근의 질문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에는 석화 시인이 대전에서 동대구 역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박창근의 아들 박새한울과 함께 동대구역에 가서 석화 시인을 만났고 다시 대구 SOS어린이 마을을 향했다. 대구 SOS어린이 마을은 내가 1년여 동안 어린이들을 위한 문학치료라는 프로그램을 갖고 강연을 다녔던 곳이다. 그때 힘들던 삶을 지내던 어린 아이들과의 만남을 생각하며 그들의 밝은 모습을 잊을 수 없어 그날 그들에게 지난 동안 미안함을 전했다. 잠시 찾았던 곳이지만 또렷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어린이 마을이라 반드시 찾아야할 곳이었다. 앞으로도 그들의 맑은 세상살이가 이어지길 기원하면서...,

그곳에서 다시 동대구로 돌아와 창근이는 집으로 가고 석화 시인과 나는 대구시인학교를 찾아 효목네거리로 향했다. 효목네거리에 공덕원(불교 포교원) 지하에 대구시인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2층 법당을 찾아 경배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와 석화 시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강의가 끝났다고 불러서 강의실을 찾았고 첫인사를 나누었다. 옳지 않은 선입견을 다시 체험하는 순간이다. 사실 그 순간 내 선입견이란 것이 뭐 그냥저냥 한가한 시간을 땜질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소일거리 삶아 문학에 눈길을 두느니 뭐 특별한 문학적 소양이야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서지월 시인의 청에 의해 시인학교 학생들과 만났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내비치기도 하고 검은 머리지만 세월의 길을 걸어온 흔적이 깊어보이는 분들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이야기를 듣는 진지함에서 부터 난 진지한 학생의 자세로 돌아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시간은 바로 아석원이라는 곳에서의 시낭송회 시간 동안 그들의 작품을 심사하면서다. 세월의 길만큼/세월의 깊이만큼/깊은 울림과 맑은 눈길이 열려있는 듯한/성스런 빛깔을 체감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맑은 시심으로 깊이 빠져들었던가 보다.

시낭송을 하며 깊어가는 밤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망연자실한 체로 사람들 속에 세월의 길만큼 깊은 사람들 속에 안온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저 그 틈안에 있음을 자각하기 위해 부산스럽게 몇마디씩 내던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푸르고 여린 피부색을 한 귀뚜라미 새끼가 술상을 기웃이며 내 팔뚝위에 앉아 간지럼을 태우고 더러 모기들이 그리고 불나방들이 등덜미를 건드렸지만, 그것은 시(詩) 속에서 시속(時俗)을 잠재우는 것을 보며 부러움을 사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밤 새벽으로 향하는 달빛을 느낄 수 없이 사람에 취한 시간, 시에 취한 시간, 잠시 후 자리를 정리하고 일행과 안녕을 고했다. 시간은 이른 아침(?) 01시30분쯤이었나. 달성군 가천면의 서지월 시인의 피아산방을 찾았다. 이른 아침(?)에 찬란한 햇살도 없는 놀라움은 계속되었다. 서지월 시인의 집, 방문앞 산체처럼 쌓여있는 수많은 자료들, 고서가를 찾은 듯한 느낌, 그것도 연길의 고서적인지 한국의 고서가인지 모를..., 다시 한번 조아리게 되었습니다. 비디오와 음악 기타 등등 찬란합니다. 냉커피 한잔 마시며 인터넷과 그 환경에 대해 이야기 하는 동안 석화 시인은 지친 어깨를 살포시 소파에 누이고 서지월 선생님은 그새 학생의 자세로 돌변, 탐구벽이라 느낄 정도로 진지하다. 아 학생은 위대하다 라는 생각!

그렇게 이른 아침(?) 4시20분 쯤 서지월 선생은 석화 시인과 저의 숙소를 정해 주시고 집으로 향하고 우리는 깊은 잠을 청했다. 

아침은 밝았고 잠결에도 물흐르는 소리가 귓청을 울릴 정도로 시원스럽던 창밖을 보면서 전날 아석원에서 받아든 조경숙 시인의 시집을 받아 읽는다. 커피 한잔을 입에 머금으며 시를 읽어간다. 사랑노래는 언제나 어느때나 진지한 묵상을 가져온다. 거치른 들판에서도 사랑은 부드럽기가 한정 없지 않은가?  그 부드러움 속에서 나는 순한 양처럼 시의 흐름에 취해 읽어갔다. 곧이어 그 흐름에 놀라 서지월 시인의 시집을 읽어간다. 조금은 거치른 대지를 느끼며 깊은 계곡을 사냥하듯 읽었다. 그렇게 기다리다 다시 만남, 어제의 기억들...,

팔마령 고개를 넘다가 멈춰서 커피 한잔 다시 머금으며 이런 저런 문학에 대한 소회들을말하고, 우정을 돈독히 하고 몸 속에 대지를 적시기 위해 청도를 향해 갔다. 청도 복숭아가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탐스러운 열매들, 아름다움과 정겨움이 넘실대는 들녘, 청도역앞에 추어탕 집에서 식사를...,그리고 맥주 한잔을...,벌건 얼굴에 사람살이 넘실대는 춤추고...,돌아오는 길 동대구 역에서 석화 시인을 배웅하고 다시 조경숙 시인과 낭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영천 방면에 채소밭을 가꾸러 다녀오는 박창근과 대구 MBC네거리에서 만나 동해의 일정을 소화해내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는 창근이네 본가에서 그의 부모님들과 함께 여전히 채식으로 참 아름다운 밥상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머니의 정성과 아버님의 인자하심이 밥상을 가득채우는 느낌이었다. 오가는 길의 불편 속에서 다시 동해로 떠나는 가수 박창근과 성환우, 박성운 그리고 <우리, 여기에>멤버들, 반가운 사람들이다. 낯설음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이 이 세상을 밝히고 있으니 나도 따라 밝아지는 것이리라. 청년의 기개가 교만과 객기로 차 넘치는 이 불량한 도시, 불량한 시대에 그들은 싱싱한 풀꽃 같은 사람들이란 것을 다시 느끼게 되는 것은 내게 행운이다.

여장을 준비하느라 창근네 집으로 향했다. 준비하면서 대강의 통성명을 나누지만 어색스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간간히 오버액션을 취하며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앙고속도로에 진입한 봉고프런티어는 용길대사님의 독주로 광란의 질주로 이어졌다. 운전기사의 광란이 아닌 뒷자리에 탄 가수 일당의 광란말이다. 물론 난 논두렁가수 아니 촌에서 흔히 벌어지던 콩쿨대회 가수출신이다. 그 수준이 이런 광란의 노래판에서는 잘 어울린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그렇게 광란을 멈춘 것은 휴게소에서 3000원 짜리 라면을 먹고 부터다. 자본주의에서 돈이 없으면 죄다. 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나는 그 휴게소 3000원 짜리 라면을 먹고나서 아 이 죄인이여!라 통성을 멈추지 못한다. 양심은 없고 돈만 사는 그런 현장...,

아침이 밝은 새벽 5시30분 동해역에 도착했다. 찬란한 동해의 일출은 보지 못했다. 어스름한 아침녘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서울에서 출발한 <우리, 여기에> 서울지부장 무쏘님 환영식을 마치고 창근이가 안내한 된장국집에서 아침 식사를 마쳤다. 이때 용길대사님께서는 밥을 참고 잠을 청했다. 나중 후한이 깊었던 그 아까운 밥!을 놓친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박성운이라는 가수를 만났다. 그의 부인과 함께...,

우리는 두리번 거리며 헤매다가 해변을 찾았다.
Pr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