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미라클>을 보고
웃긴 슬픔, 슬픔 환희, 이런 불균형적인 의식이 우리 인간에게는 존재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그런 현상을 일탈행위를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규정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오늘 본 연극 <미라클>은 잘나거던 가수가 가족 일행을 태우고 운전중 자신의 과실로 교통사고낸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는 사고 후 뇌사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된다.
뇌사상태에 빠진 채 손발을 비롯한 모든 의사소통 기능이 차단된 상태에서 인간의 의사소통 양식의 한계는 무기력으로 끝나지 않고 영혼의 공간으로 확장되면서 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한 의사 전달을 요구하는 갈망적인 욕구로 이어진다. 그는 사랑과 영혼에서의 남자 주인공이 타인의 육신을 빌려 사랑하는 연인 데미무어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던 장면을 차용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사랑과 영혼에서의 명장면이지요. 죽은 자신의 애인과 데미무어가 같이 앉아서 도자기를 빚는 모습..., 데미무어의 동글동글한 눈물에 눈물을 맺히게 하고 가는 물줄기로 흘러내리는 눈물, 데미무어의 애인인 샘은 뜻하지 않게 죽음을 당하고 인간세상에서 떠돌게 되는데 갑작스런 죽음으로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야 할 저승으로도 가지 못하고 자신의 애인 곁을 맴돌기만 합니다. 이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은 죽은 영혼과의 로멘스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불균형의 현실, 부조화의 현실을 경험하고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것은 관게의 일방성이지요. 그러나 사랑과 영혼에서도 그렇고 이 연극 미라클에서도 우리는 그 일방성에 대한 명확한 답을 위해 몸부림치는 대상과 그것을 읽어내려는 사람의 애절함 속에서 인간 관계의 일방성에 대한 점을 인식하고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타자와 타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됩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대화에 귀기울이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발생할 수 잇는 존재의 상처..., 부존재의식을 공유할 수 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서 삶이 더욱 의미있게 확장되어지는 것이겠죠. 수많은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이승을 떠나게 되기도 하지만 떠날 수 없는 애절함 속에서도 떠나야만 하고 떠나는 것이 차라리 이승에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행벅을 남기는 일일 수도 혹은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하고 싶어하는 죽음에 대한 욕망 혹은 희구도 있을 수 있음을 보게 된다.
한 순간, 한 겹, 양파 껍질의 막처럼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그런 죽음과의 접촉, 그런 경계선에서 추구할 수 있는 아름다움, 그런 절대적이고 극한적인 상황에서 존재하는 사랑의 낭만적 프롤로그가 허용되는 공간을 열어주는 뇌사자의 영혼과 실존하는 간호사의 아름다운 사랑이 주고받는 밀월! 죽어가는 뇌사자가 육체 이탈을 통해하는 간절한 발언들 그것은 살아있는 육체를 가지기를 원하지만 불가능한 상황을 인정하기 까지의 과정을 행복한 결말로 이어가기까지의 코믹한 화해..., 결코 그것이 무기력이 아닌 인간적 진실성을 포기하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지속되고 있으니..., 이 연극을 연출해내는 사람의 인간적 삶의 대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의 미의식이 표출되는 부분이 안니가 생각된다. 포기할 수 없는 절명의 순간, 그러나 포기해야하는 애절한 상황에서 꿋꿋한 화해를 이끌어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미저리의 어처구니 없는 웃음도..., 007의 어처구니 없는 등장도..., 하니와 나애리의 어처구니 없는 등장도..., 복잡하고 조합적인 이미지를 갖을 만도 하지만..., 무난하게 섞여드는 것은 죽음에도 존재할 수 있는 환희..., 죽음을 추구해야하는 사람의 절망스런 상황을 희극화하는 고통의 반대급부와도 같은 설정은 아닐지..., 아무튼 웃긴 슬픔과, 슬픈 환희의 감정의 존재성을 자각하게 하는 연극이었다는 느낌이다.
웃으면 안될 것 같은 상황에서 웃기고, 웃어야할 상황 같은데 그냥 웃으면 안될 것 같은 마치 바보이거나 휴머니즘이라고는 없는 인간이 웃을 것 같은 그런 상황의 설정은 미묘한 맛을 느끼게 한다.
아무튼 연극 잘 보았습니다.
미라클 씨어터 관계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웃긴 슬픔, 슬픔 환희, 이런 불균형적인 의식이 우리 인간에게는 존재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그런 현상을 일탈행위를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규정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오늘 본 연극 <미라클>은 잘나거던 가수가 가족 일행을 태우고 운전중 자신의 과실로 교통사고낸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는 사고 후 뇌사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된다.
뇌사상태에 빠진 채 손발을 비롯한 모든 의사소통 기능이 차단된 상태에서 인간의 의사소통 양식의 한계는 무기력으로 끝나지 않고 영혼의 공간으로 확장되면서 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한 의사 전달을 요구하는 갈망적인 욕구로 이어진다. 그는 사랑과 영혼에서의 남자 주인공이 타인의 육신을 빌려 사랑하는 연인 데미무어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던 장면을 차용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사랑과 영혼에서의 명장면이지요. 죽은 자신의 애인과 데미무어가 같이 앉아서 도자기를 빚는 모습..., 데미무어의 동글동글한 눈물에 눈물을 맺히게 하고 가는 물줄기로 흘러내리는 눈물, 데미무어의 애인인 샘은 뜻하지 않게 죽음을 당하고 인간세상에서 떠돌게 되는데 갑작스런 죽음으로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야 할 저승으로도 가지 못하고 자신의 애인 곁을 맴돌기만 합니다. 이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은 죽은 영혼과의 로멘스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불균형의 현실, 부조화의 현실을 경험하고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것은 관게의 일방성이지요. 그러나 사랑과 영혼에서도 그렇고 이 연극 미라클에서도 우리는 그 일방성에 대한 명확한 답을 위해 몸부림치는 대상과 그것을 읽어내려는 사람의 애절함 속에서 인간 관계의 일방성에 대한 점을 인식하고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타자와 타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됩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대화에 귀기울이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발생할 수 잇는 존재의 상처..., 부존재의식을 공유할 수 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서 삶이 더욱 의미있게 확장되어지는 것이겠죠. 수많은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이승을 떠나게 되기도 하지만 떠날 수 없는 애절함 속에서도 떠나야만 하고 떠나는 것이 차라리 이승에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행벅을 남기는 일일 수도 혹은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하고 싶어하는 죽음에 대한 욕망 혹은 희구도 있을 수 있음을 보게 된다.
한 순간, 한 겹, 양파 껍질의 막처럼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그런 죽음과의 접촉, 그런 경계선에서 추구할 수 있는 아름다움, 그런 절대적이고 극한적인 상황에서 존재하는 사랑의 낭만적 프롤로그가 허용되는 공간을 열어주는 뇌사자의 영혼과 실존하는 간호사의 아름다운 사랑이 주고받는 밀월! 죽어가는 뇌사자가 육체 이탈을 통해하는 간절한 발언들 그것은 살아있는 육체를 가지기를 원하지만 불가능한 상황을 인정하기 까지의 과정을 행복한 결말로 이어가기까지의 코믹한 화해..., 결코 그것이 무기력이 아닌 인간적 진실성을 포기하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지속되고 있으니..., 이 연극을 연출해내는 사람의 인간적 삶의 대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의 미의식이 표출되는 부분이 안니가 생각된다. 포기할 수 없는 절명의 순간, 그러나 포기해야하는 애절한 상황에서 꿋꿋한 화해를 이끌어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미저리의 어처구니 없는 웃음도..., 007의 어처구니 없는 등장도..., 하니와 나애리의 어처구니 없는 등장도..., 복잡하고 조합적인 이미지를 갖을 만도 하지만..., 무난하게 섞여드는 것은 죽음에도 존재할 수 있는 환희..., 죽음을 추구해야하는 사람의 절망스런 상황을 희극화하는 고통의 반대급부와도 같은 설정은 아닐지..., 아무튼 웃긴 슬픔과, 슬픈 환희의 감정의 존재성을 자각하게 하는 연극이었다는 느낌이다.
웃으면 안될 것 같은 상황에서 웃기고, 웃어야할 상황 같은데 그냥 웃으면 안될 것 같은 마치 바보이거나 휴머니즘이라고는 없는 인간이 웃을 것 같은 그런 상황의 설정은 미묘한 맛을 느끼게 한다.
아무튼 연극 잘 보았습니다.
미라클 씨어터 관계자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