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꼬이는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자치국의 북부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 고려인들은 거의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2월 설날 즈음에 장꼬이 고려인협회 창립 15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사실 그때는 행사장에서 얼굴을 보고 노래 한곡 부른 것이 그들과 만남의 전부다. 게르만장(장꼬이 고려인협회장, 43세)과의 만남을 약속한 후 한 두 차례 전화통화를 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만나게 된 것이다.
라즈돌로노예 버스터미널에서 율랴(6세)와 안녕(빠까, пока)!이라고 짧은 인사를 한 후 버스를 탔다. 불볕더위에 버스안도 찜통이었다.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 버스 안에 35도가 넘는 여름날의 뙤약볕 속을 달리는 버스 안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송인수(84세) 할머니와의 안타까운 작별 그리고 장꼬이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다. 들에는 밀이 황금빛으로 익어 수확을 하는 콤바인이 바쁜 설렘으로 오가고 있다. 가끔씩 고즈넉하게 바라다보아도 좋은 드넓은 해바라기 밭에 활짝 핀 해바라기 꽃이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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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보기 아까운 풍경들은 항상 새로운 것들을 볼 때의 내 마음이다. 그것은 홀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보는 결핍감을 보상받고 싶은 심리일지도 모른다. 1시간 30분을 달려 버스는 장꼬이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장꼬이 버스터미널은 역과 옆에 자리잡고 있다. 도착하자마자 게르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상 초행이나 다름없는 길이다. 지난번에는 예빠토리야와 끄라스노페레꼽스키 고려인협회장이 함께 왔다. 게르만장은 전화를 받고 5분내 도착한다고 했다.
게르만장의 승용차에 올랐다. 그와의 짧은 인사는 지난번 3시간여 동안 같은 장소에서 술잔을 기울였던 것이 전부다. 낯선 나라의 낯선 지역에서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이들이 그저 동포라는 이유로 만나 반갑다. 그리고 내게 어디로 갈까라고 물어왔다. 나는 게르만장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는 메드베데브라는 마을로 안내했다. 필자가 알고 있는 단어 메드베데브(Медведь)는 우리말로 곰이다. 왜 메드베데브를 가자고 하는가 의아했다. 나중에 뎨레브냐(Деревня, 마을)라고 이야기해서 그때야 이해했다. 시골마을 혹은 농촌을 뎨레브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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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에는 한국에서 와서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다는 하우스 몇 동이 늘어서 있기도 했다. 현지에 도착한 후에야 그 마을로 온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필자가 찾아간 날은 마치 메드베데브라는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는 김아파나시(59세)씨의 생신이었다. 필자는 김이파나시씨의 처제인 주타냐(타티아나, 54세)씨 집으로 안내를 받아갔다. 그녀는 지난 장꼬이 고려인협회 창립행사때 사회를 보았던 여성이었다. 그때는 누군지도 모른 채 인사만 나누었다. 그러니 오늘이 초면이나 다름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우크라이나 장꼬이 한 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치는 교사로 근무했었다 한다.
처음이나 다름없지만, 이미 반갑게 맞아주는 지인이 되어있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싶은 생각이 언뜻 들었다. 필자와 그들은 그 어떤 연고도 없다. 동포라는 연고 말고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포라는 연고 말고 중요한 것이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만나고 있는 것이다. 오직 동포라는 연고로만 중요한 만남인 것이다. 그들이 어떤 사연을 안고 살아왔건 또 내가 무슨 사연을 안고 살고 있건 중요한 것은 없다. 그들은 나를 동포로서 반기고 나는 동포라서 그들을 찾았다. 그들과 나의 만남은 오직 동포로서 받들어지는 자리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소한 정의, 사소한 의(意)가 통일의 길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다시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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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밭에서 경작한 수박을 나누어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틈틈이 한국의 영상물을 보여주기도 했다. 필자가 간직하고 있는 음식물 관련 자료와 한국의 음악과 영화자료들을 DVD데이터로 혹은 CD로 정리해주기도 하였다. 마침 그 자리에는 주타냐씨의 손녀인 주리까(5세)가 함께 있었다. 필자는 얼마 전부터 고려인들을 만나러 다닐 때면 학용품과 기념품을 몇 점씩 가지고 다닌다.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고려인들이 생활이 어렵거나 궁핍한 생활을 해서 돕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 전해온 선물임을 설명하고 전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반갑게 받아 줄때마다 필자는 생각한다. 그들의 결핍은 어쩔 수없이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조국이 아닐까?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어린 고려인들도 한국인 혹은 우리 동포들을 만나면 반기는 것이야말로 유전에 의한 자기장반응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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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생일잔치를 기다리다 뽀로로를 보는 주리까의 밝은 웃음에 보는 이도 즐겁다. 그는 그 틈에 라즈돌로노예 버스터미널에 율랴가 그랬듯이 필자가 전해준 선물에 필자를 그려서 보여준다. 동심은 다 한결같은 것인가? 필자는 생각한다. "그가 웃고 있어 나도 웃는다. 내가 웃으면 그도 웃는다. 우리가 웃으면 그들도 웃는다. 그들이 웃고 있어 우리 모두가 웃게 된다." 그냥 뜬금없이 글짓기를 해보았다. 남과 북도 그런 웃음의 미학을 배워보면 어떨까?
주리까의 웃음을 보다 낮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지난 후 깬 하늘이 너무나도 맑고 맑다. 카메라에 하늘을 담는다. 하늘을 담다가 나도 저 하늘처럼 맑아졌으면 저 하늘 좀 닮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해가 저물어갈 쯤이다. 김이파나시씨 집 마당에 들어섰다. 누구 생일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의 이름을 듣고 누군지 알 길이 없었다. 마당에 들어서며 카이젤 수염의 김이파나시 씨가 사람 좋게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청해온다. 지난 고려인협회 행사 당시 필자와 단둘이 가장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분이다. 일찍 생일잔치를 몰라 아무런 선물도 준비해오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그를 만나며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1980년에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주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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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잔치에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현지인과 고려인들이 모두 70여명은 참석한 듯하였다. 한쪽에서는 우크라이나 식으로 사슬릭(꼬치구이 같은 것)을 하기 위해 숯불을 밝히고 있었고 가마솥 같은데 육개장 같은 국물이 있는 고깃국을 끓이고 있었다. 상에는 큰 잔치가 아니면 먹기 힘든 찰떡도 올라왔다. 진하게 보드카를 마시고 힘겨운 필자는 찰떡을 먹으며 홀로 향수를 달랬다. 아마도 고려인들은 나와 같이 달랠 향수같은 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또 가슴이 저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