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에 가다(4)

  • 김형효
  • 조회 4106
  • 2009.11.11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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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둥지라 불리는 멋진 건축물이 흑해를 바라보는 얄타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아래 표참조

 

제국의 힘에 의지하려는 철부지 정치인들과 모자란 세력들의 한심함에 분통

 

동포와의 애잔한 만남을 뒤로 하고 필자는 한 걸음씩 마음속에 통일이라는 슬로건을 안고 걷는 것처럼 걸었습니다. 그리고 흥미롭다기 보다는 안타까움이 많은 그 자리에 서보기 위해 비싼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보통은 40그리밴(한화 6000원) 더하기 사진 촬영료 5그리밴을 추가로 내야했습니다. 자랑스럽지 못한 그 자리를 촬영해서 또 무엇 하겠다는 건가? 그러면서도 저는 또 그것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홀로 앞서서 둘러봅니다.

 

조금은 답답한 마음도 가슴이 막히는 느낌도 들어서 제 발걸음을 재촉하며 걸었습니다. 물론 보는 노력은 하면서 말입니다. 찬찬히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인물사진이 한켠에 러시아어 사진 설명과 함께 붙어 있었습니다. 그나마 작은 위안을 삼을 만한 일로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1945년과 2009년의 간극에서 참 많은 것이 달라지기는 했구나? 그러나 45년의 상처와 흔적은 더욱 공고해져 있으니, 분명 우리 민족에게 재앙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은 분명한 일이구나!는 생각이 다시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영역에서 저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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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위안을 삼게 한 반기문 사무총장의 사진과 러시아어 사진설명

 

외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해설원과 그 일행들은 천하태평으로 이 자리의 역사적 의미와 유래를 설명 듣고 저는 서글픔을 안고 멍한 사색의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지나친 사색가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국사 교과서에서 접했던 얄타는 제 앞에서 저의 넋을 잃게 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통탄할 역사의 현장은 참 멋들어지게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동양을 넘어 유럽의 한 귀퉁이까지 제가 서서 바라보는 눈길이 미치는 순간입니다. 언제 통일의 그날이 와서 이 자리에 그 일 이후가 기록될 수 있을까요? 얄타회담 이후의 결정을 이 자리에 기록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박하며 위대한 역사의 기억을 어서 당겨올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절박하게 제 마음을 깨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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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회담이 열렸던 회담장 테이블과 당시의 주요 3인, 왼쪽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이다.

죽어서 또 죽어라라고 험담을 하며 분통을 터트렸다. 다 무망한 일인줄 필자도 알고 있다.

 

국내의 정치 현실을 더욱 아프게 바라보게 하는 일은 저 처칠과 루스벨트와 스탈린보다 더 반민족적으로 우리의 목을 조이려는 세력들이 득세를 하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갈 길에 대해 한사코 제국의 힘에 의지하려는 철부지 정치인들과 모자란 세력들의 한심함에 분통이 터질 지경으로 짓눌린 가슴을 어찌하기가 어려워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오듯 나왔습니다. 나오는 길에는 오래전 레닌 이전의 봉건자본주의의 수괴라 칭해도 무리가 없을 독재자 짜르의 영광 같은 삶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그의 별장이었기에 그런 흔적들을 잘 보존해두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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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르가의 가족사진과 그가 휴양중 사용하던 집무실

 

라바디야 회담장을 빠져나왔습니다. 모든 번뇌의 사색을 말끔히 해소해 줄 것 같은 흑해의 찬란한 바닷물 빛이 속을 후련하게 해줍니다. 바다만 바라보아도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고 그전에 그곳에 우거진 숲과 나무들을 보아도 온통 청정한 느낌으로 정화될 것 같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곳이 우리에게는 비극의 한 장소라는 것이 믿기 싫은 현실이었습니다.

 

이때 또 다시 참으로 다행스런 것이 그나마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는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리고 그런 결과물이 미국의 시녀 노릇이나 하는 유엔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현실에서 무시할 수 없는 역할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낳았다는 안도감도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그나마 우리의 흔적이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흔적조차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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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인 바다와 숲이 우거진 라바디야 외부 풍경이다.

 

그렇게 라바디야를 둘러본 후 저는 곳 제비둥지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편하게 갈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혈기가 남은 청춘임을 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의 혈기는 불혹의 나이를 넘긴 제게 걸맞지 않은 모자람이란 것도 자각합니다. 그래서 니꼴라이에게 그냥 그 제비둥지를 먼발치에서나마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곳은 확 트인 흑해가 바라다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먼발치에서 멋진 제비둥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멍하게 말없이 흑해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맞으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밝아오는 내 나라와 내 민족의 미래를 소원하였습니다. 정말 큰 애국자 하나 낫다고 마음속으로 씁쓸한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제비둥지 소개

 

1. 건축물스타일 : 신고딕디자인(Neo-Gothic)의 중세모방풍의 성(castle) 2. 별칭 : 제비둥지(Swallow's Nest) 3. 소재국가 : 우크라이나(Ukraine) 4. 소재지역 : 크리미아(Crimea) 얄타(Yalta) 지방 5. 건립년도 : 1911년-1912년 6. 설계자 : Leonid Sherwood (러시아 건축가) 7. 특징 : 40미터 높이의 가파른 절벽위에 위치(Aurora Cliff)하여 전망이 좋음(흑해의 Ai-Todor cape를 내려다봄) 8. 역사 : -1895년경 - 지금의 위치에 "Love Castle" 로 명명된 나무오두막집 건축됨 -1911년 - 독일인 석유업자 Baron von Steinheil이 건물 매입(1년내에 현 건물로 탈바꿈) -1914년 - P. G. Shelaputin이 레스토랑 개업을 위해 매입 -1927년 - 리히터 6-7규모의 강진 발생(건물 자체에는 큰 피혜가 없었으나 Aurora Cliff에 큰 균열이 생김) -1968년 - 성의 일부 개량 및 Aurora Cliff 보강 공사 -1975년부터 지금까지 - 성 내부에 이탈리안 레스토랑 운영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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