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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벤치위서 치른 특별한 장례식

  • 김형효
  • 조회 3209
  • 2005.09.05 21:31
-  석화 시인의 망부가, 아버지여! 편히 잠드소서!
   


어느 밤 태를 찾아서 - 룡정에 와서 3

석화(石華) + www.poet.or.kr/shihua/


분명 이 도시 어느 거리 어느 골목 어느 문지방 밑에 묻혀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헤매돕니다. 엄마

한손엔 반병쯤 남은 술, 다른 한손엔 꼬리 달린 마른 명태 반쪼각 아니 그 동안 뒤집어 썼던 명예라는 것 만족이라는 것 욕심이라는 것 인품이라는 것 회의라는 것 수치라는 것 모두 다 걷어안고 이리비틀 저리비틀 헤매돕니다. 엄마

눈을 싸맨 당나귀처럼 헛것을 짚으며 돌아쳐도 머리만 아찔아찔할 뿐 이젠 그 한가닥 확신이라는 것조차 희미해져 버리고 맙니다. 엄마

반드시 수탉이 울기 전-- 아니 도시에는 닭장이 없지--벌건 피빛으로 감쌌던 그날의 그것을 찾아내여 다시 뒤집어 쓰고 양수속 한방울로 녹아져서 원초로 흘러가야 합니다. 엄마

날이 밝으면 넥타이를 꼭 매고 옷깃 한곳 흩어질세라 자신만만한 자세로 큰길에 나서서 행복한 출연을 계속하여야 한다고 하니 더욱 안타까울 뿐 발길만이 다급해집니다. 엄마

그러나 저 멀리 동은 터오기 마련, 온갓 도깨비들은 모두 다 제가 갈데로 가버리고 나만이 차렷! 앞으로 갓! 해야합니다. 엄마

얼마 전 룡정엘 다녀온 석화 시인이 쓰신 시입니다. 마치 어머니의 품속에서 헤엄을 치는 듯이 허겁지겁 살고 있는 듯한 석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천진난만한 꿈을 꾸는 시인이 어머니 품을 떠나 사는 것이 스스로를 얼마나 불안하게 하고 있는 지를 시인은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오늘 석화 시인은 그리도 걱정하시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이제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닌 망부가를 부르며 시인은 아마도 깊은 숨을 내쉬며 이밤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연변에서 온 시인 석화! 시인은 지금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수강하고 있다. 어제 주말을 맞아 석화 시인과 만나기 위해 대전 배재대학을 찾아갔고, 방학을 맞아 연길에서 장기 체류하다 돌아온 석화 시인과 안부를 나누며 밤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다음날 아침이다. 늦게 잠을 청하여 늦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때 연길에서 전화가 왔다. 부친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한 동안 말없이 의자에 앉았던 석화 시인이 잠시 후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울에 계신 망자의 여동생인 고모님과 망자의 남동생의 부인이신 작은 어머니가 서울에 계시단다. 급하게 짐을 꾸리며 서대전역을 향했다. 나는 대전을 떠나 대구를 향할 계획이었으나, 연길에 부친상에도 함께 하지 못하는 시인을 혼자 두고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서울을 향한 우리는 1시 10분에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기차 안에서도 아무 말없이 한참을 울던 석화 시인이 고모님과 작은 어머니를 만나 다시 한번 눈물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모두 연길에서 왔고 오빠와 아버지의 부음을 접하고도 바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석화 시인은 연길에서 돌아온 지 4일이 되었고, 다른 분들은 여러 날 이곳에서 떠나 있을 수 없는 입장이란다. 또한 비행기편이 바로 예약되어도 고향에 가면 이미 장례식은 끝이 나서야 도착하게 되는 때문이다.

석화 시인은 아침에 책상 서랍에서 꺼내들었던 부모님들의 결혼식 사진을 챙겨들고 왔다. 그 사진을 가지고 나는 석화 시인과 함께 스캔을 받고 영정을 만들었다. 어디에서 제를 올리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몇 번이고 말을 건넸다.

어디서 제를 올릴 것인지? 나는 그 속내를 알 수 없어 한참 말을 건네도 마땅한 곳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었다. 그래서 특별히 장례의 예를 치를 곳을 찾다가 창덕궁 옆의 공터를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붐비지 않고 특별하게 거추장스러고 소란스런 일이 아니라서 간단한 예를 차리기에는 안성마춤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돗자리를 하나 준비하고 영정은 소공원의 벤치에 붙이고 벤치에 신문을 깔고 그렇게 상을 차렸다.

벤치 앞에 돗자리를 깔고 나는 술을 따르고 석화 시인과 고모님 그리고 석화 시인의 숙모님 순으로 그 다음은 필자까지 돌아가신 분의 영정 앞에서 절을 하며 장례의 예를 다하였다.

서울에서 이렇게 장례를 올린 가족들과 제사 음식을 나누며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는다. 듣는 이의 마음인들 편할 수 있는가마는 지금 내 편하고 안하고가 문제인가? 가족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 속에서 애틋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켜켜히 쌓여 있음을 본다.

고모님도 석화 시인도 숙모님도 고향을 멀리 두고 떠나온 이 낯선 땅에서 혈육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아마 그 시간 쯤 연길에서는 석화 시인의 부친의 시신은 화장이 되고 있었을 것이다. 간단하고 소박하게 장례의 예를 하면서도 깊이 오고 가는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가서 옛 이야기 많이 나누자며 연변의 형제들과 전화를 통해 주고 받는 이야기 속에서 속일 수 없는 형제의 정이 묻어 나고 있었고 이 사람 저 사람 바꿔가며 통화를 하면서 사람 따라 다른 정을 나누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 특별하고 안타까운 장례식을 치르면서 다시 한번 가족의 정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산의 아픔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통일이 되지 않은 가운데 고 석창호(76세) 선생의 동생들이 북한에도 살고 있다는 데 많은 아쉬움을 거둬 메고 가시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더없이 가슴이 시려왔다. 서로 나누는 이야기가 정에 넘치지만 내가 본 바로는 낯설은 곳에서 가슴을 달래는 망향가로 들릴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살아 계신 분들의 안녕을 빌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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