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년대시, 박봉우 시인의 위치와 신동엽 시인의 등장
신동엽 시인의 등장
시인 박봉우를 통해 <진달래 산천>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선 신동엽은 박봉우와 함께 당대적 현실 안에서 민족의 미래적 전망을 공유한 몇 안되는 시인이었다.
동족 상잔의 비극을 고구려적 전설과 연결시키면서도, 현실의 비극을 짧은 시행과 연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시(詩), <진달래 산천>은 당시로서는 가장 돋보이는 전쟁시의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동엽(1930년~1969년)의 시 진달래 山川<전문>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꽃 펴 있고,/바위 모서리엔/이름 모를 나비 하나/머물고 있어요//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당신은/잠이 들었죠.//햇빛 맑은 그 옛날/후고구렷적 장수들이/의형제를 묻던,/거기가 바로/그 바위라 하더군요.//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산으로 갔어요/뼛섬이 썩어 꽃죽 널리도록.//남햇가,/두고 온 마을에선/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발목을/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꽃 살이 튀는 산 허리를 무너/온종일/탄환을 퍼부었지요.//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꽃 펴 있고,/바위 그늘 밑엔/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꽃다운 산골 비행기가/지나다/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산으로 갔어요./그리움은 회올려/하늘에 불 붙도록/뼛섬은 썩어/꽃죽 널리도록,/바람 따신 그 옛날/후고구렷적 장수들이/의형제를 묻던/거기가 바로/그 바위라 하더군요.//잔디밭엔 담배갑 버려 던진 채/당신은 피/흘리고 있었어요.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아니 전쟁의 상처와 지리산 자락, 피묻힌 조국산하에 피흘리고 죽어가는 형제의 아픔을 노래한다. 고향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전쟁의 상채기를 진달래꽃의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또 이런 형상화의 감각은 이전에 김수영이 보여주던 애상적인 감상의 단계를 벗어나고 있다. 또한 박봉우가 보여주었던 자아의 한계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것이 도달한 상태의 관념성도 극복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어쩌면 가장 무거운 시적 제재를 적절한 유추를 통하여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아래의 시는 박봉우의 소묘연작중의 한편이다.
쓰러지는 푸른 시체 위에서
별들이 울었던 날
詩人도 미치고
민중도 미치고
푸른 전차도 미치고
학생도 미치고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의 얼굴과
눈물을 찾았던 날
<소묘33>
실제 시인은 당대의 현실을 견뎌내지 못하고 미칠 수밖에 없게 된 불운한 시인이기도 하였다. 이 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시인 박봉우는 정신병원에서 요양 중 병사하였다. 세상이 이성을 잃고 돌아가는 현실에서 모두 다 미칠 수밖에 없다는 애절통의 심사가 직설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데 이만큼 적절하고 분명한 어조가 아니라면 당대의 현실을 어떠한 묘사로 보여주겠는가.
그림이라면 보아서 알지만, 이런 글쓰기를 통해서 문자로서 언어로서 글이 쓰일 때, 진정 통쾌무변한 붓끝의 위력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요즘처럼 모든 시적대상에 대해서 묘사나 재치 그리고 낭만적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창작자들에게 일성을 할만한 대목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박봉우와 신동엽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창작 기풍은 분단된 민족 현실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며 그들과 함께 한 이후의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충실한 형상적 사유로서 반영되고 있다. 민족현실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이성과 감성은 분단된 조국현실을 민족적인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형상화하면서 시적 성과로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민족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으로 시작되어, 1960년대 이후의 문학 창작으로 계승되어 새롭게 창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박봉우의 시는 1950년대를 마감하면서 또 다른 격동의 시기인 1960년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1960년대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현실 참여적 시의 기풍을 잉태하게 되었고, 4.19혁명 당시의 반독재 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처럼 전개된 1950년대 말 시인 박봉우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적 성과는 우리의 현대 시문학사를 풍성하게 해주었다. 이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준비 작업이 박봉우와 신동엽 그리고 젊은 모더니스트 시인(김규동, 김수영, 박인환, 김경린 등)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이들의 작업들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특히 1960년대 '저항시(抵抗詩)' 또는 '참여시'라는 이름을 걸고 전개된 시작업이, 1950년대의 시작업에서 그 튼튼한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문학사의 전통이라는 것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이전의 문학에 대한 비판이든 긍정이든 문학유산이란 계승된다는 관점에서 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래서 1960년대 시들은 이런 시대의 질곡에 해당하는 현실의 문제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형상화하게 된다.
1950년대는 우리 모두에게 혼란과 상처를 극복하여야 하는 시기였으며, 이 당시의 시문학 작품은 이런 당시의 과제를 다양한 형태로 형상화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현실 문제에 무관심할 것을 요구하는 정치적 필요성에 봉사하기도 하지만, 주로 신진 시인 즉 새시대의 새로운 주역들에 의하여 이후의 시단과 시세계가 주도될 것을 예견하는 징후를 보여준다. 달리 표현하면 시문학사에서 해방 정국의 진보적 시세계와 1960년대 참여시의 세계를 연결하여 주는 교량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점이 1950년대의 시단과 시작품이 가지는 시문학사적인 의의라고 생각된다.
한국전쟁을 겪은 후 재편된 1950년대 남한의 시단은 이후 시문학사 전개의 밑바탕이 된다. 특히 민주화의 요구가 전면적으로 분출되었던 1960년의 4.19와 이를 폭압적인 힘의 논리로 묵살하려 했던 5.16을 거쳐, 이후의 역사는 자유를 요구하는 민중들의 요구와 산업화를 앞세운 개발 독재 군사 정권의 힘이 첨예한 대립의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런 시련 속에서 우리의 시단은 이를 온 몸으로 부딪치면서 발전하게 된다. 즉 참여시 또는 민중시의 출현이 그것이다. 시인들은 잠시동안 무관심의 그늘에 감추어 두었던 현실적 갈등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고, 이를 비판하는 붓을 다시 들기 시작한다.
이는 훗날에 우리의 현대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나라의 민주화와 조국의 통일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문학의 기본틀을 이루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성과로 나타나게 된다.
암흑기라 할만한 우리의 지난 시대에 밝은 여명을 열어 젖혔던 것이 바로 문인들의 지고지순한 사명으로서의 당대에 대한 발언으로서 가능했음을 우리는 배웠고 보아왔다.
신동엽 시인의 등장
시인 박봉우를 통해 <진달래 산천>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선 신동엽은 박봉우와 함께 당대적 현실 안에서 민족의 미래적 전망을 공유한 몇 안되는 시인이었다.
동족 상잔의 비극을 고구려적 전설과 연결시키면서도, 현실의 비극을 짧은 시행과 연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시(詩), <진달래 산천>은 당시로서는 가장 돋보이는 전쟁시의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동엽(1930년~1969년)의 시 진달래 山川<전문>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꽃 펴 있고,/바위 모서리엔/이름 모를 나비 하나/머물고 있어요//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당신은/잠이 들었죠.//햇빛 맑은 그 옛날/후고구렷적 장수들이/의형제를 묻던,/거기가 바로/그 바위라 하더군요.//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산으로 갔어요/뼛섬이 썩어 꽃죽 널리도록.//남햇가,/두고 온 마을에선/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발목을/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꽃 살이 튀는 산 허리를 무너/온종일/탄환을 퍼부었지요.//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꽃 펴 있고,/바위 그늘 밑엔/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꽃다운 산골 비행기가/지나다/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산으로 갔어요./그리움은 회올려/하늘에 불 붙도록/뼛섬은 썩어/꽃죽 널리도록,/바람 따신 그 옛날/후고구렷적 장수들이/의형제를 묻던/거기가 바로/그 바위라 하더군요.//잔디밭엔 담배갑 버려 던진 채/당신은 피/흘리고 있었어요.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아니 전쟁의 상처와 지리산 자락, 피묻힌 조국산하에 피흘리고 죽어가는 형제의 아픔을 노래한다. 고향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전쟁의 상채기를 진달래꽃의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또 이런 형상화의 감각은 이전에 김수영이 보여주던 애상적인 감상의 단계를 벗어나고 있다. 또한 박봉우가 보여주었던 자아의 한계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것이 도달한 상태의 관념성도 극복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어쩌면 가장 무거운 시적 제재를 적절한 유추를 통하여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아래의 시는 박봉우의 소묘연작중의 한편이다.
쓰러지는 푸른 시체 위에서
별들이 울었던 날
詩人도 미치고
민중도 미치고
푸른 전차도 미치고
학생도 미치고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의 얼굴과
눈물을 찾았던 날
<소묘33>
실제 시인은 당대의 현실을 견뎌내지 못하고 미칠 수밖에 없게 된 불운한 시인이기도 하였다. 이 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시인 박봉우는 정신병원에서 요양 중 병사하였다. 세상이 이성을 잃고 돌아가는 현실에서 모두 다 미칠 수밖에 없다는 애절통의 심사가 직설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데 이만큼 적절하고 분명한 어조가 아니라면 당대의 현실을 어떠한 묘사로 보여주겠는가.
그림이라면 보아서 알지만, 이런 글쓰기를 통해서 문자로서 언어로서 글이 쓰일 때, 진정 통쾌무변한 붓끝의 위력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요즘처럼 모든 시적대상에 대해서 묘사나 재치 그리고 낭만적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창작자들에게 일성을 할만한 대목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박봉우와 신동엽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창작 기풍은 분단된 민족 현실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며 그들과 함께 한 이후의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충실한 형상적 사유로서 반영되고 있다. 민족현실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이성과 감성은 분단된 조국현실을 민족적인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형상화하면서 시적 성과로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민족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으로 시작되어, 1960년대 이후의 문학 창작으로 계승되어 새롭게 창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박봉우의 시는 1950년대를 마감하면서 또 다른 격동의 시기인 1960년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1960년대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현실 참여적 시의 기풍을 잉태하게 되었고, 4.19혁명 당시의 반독재 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처럼 전개된 1950년대 말 시인 박봉우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적 성과는 우리의 현대 시문학사를 풍성하게 해주었다. 이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준비 작업이 박봉우와 신동엽 그리고 젊은 모더니스트 시인(김규동, 김수영, 박인환, 김경린 등)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이들의 작업들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특히 1960년대 '저항시(抵抗詩)' 또는 '참여시'라는 이름을 걸고 전개된 시작업이, 1950년대의 시작업에서 그 튼튼한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문학사의 전통이라는 것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이전의 문학에 대한 비판이든 긍정이든 문학유산이란 계승된다는 관점에서 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래서 1960년대 시들은 이런 시대의 질곡에 해당하는 현실의 문제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형상화하게 된다.
1950년대는 우리 모두에게 혼란과 상처를 극복하여야 하는 시기였으며, 이 당시의 시문학 작품은 이런 당시의 과제를 다양한 형태로 형상화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현실 문제에 무관심할 것을 요구하는 정치적 필요성에 봉사하기도 하지만, 주로 신진 시인 즉 새시대의 새로운 주역들에 의하여 이후의 시단과 시세계가 주도될 것을 예견하는 징후를 보여준다. 달리 표현하면 시문학사에서 해방 정국의 진보적 시세계와 1960년대 참여시의 세계를 연결하여 주는 교량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점이 1950년대의 시단과 시작품이 가지는 시문학사적인 의의라고 생각된다.
한국전쟁을 겪은 후 재편된 1950년대 남한의 시단은 이후 시문학사 전개의 밑바탕이 된다. 특히 민주화의 요구가 전면적으로 분출되었던 1960년의 4.19와 이를 폭압적인 힘의 논리로 묵살하려 했던 5.16을 거쳐, 이후의 역사는 자유를 요구하는 민중들의 요구와 산업화를 앞세운 개발 독재 군사 정권의 힘이 첨예한 대립의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런 시련 속에서 우리의 시단은 이를 온 몸으로 부딪치면서 발전하게 된다. 즉 참여시 또는 민중시의 출현이 그것이다. 시인들은 잠시동안 무관심의 그늘에 감추어 두었던 현실적 갈등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고, 이를 비판하는 붓을 다시 들기 시작한다.
이는 훗날에 우리의 현대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나라의 민주화와 조국의 통일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문학의 기본틀을 이루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성과로 나타나게 된다.
암흑기라 할만한 우리의 지난 시대에 밝은 여명을 열어 젖혔던 것이 바로 문인들의 지고지순한 사명으로서의 당대에 대한 발언으로서 가능했음을 우리는 배웠고 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