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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에서 연길로 돌아오는 길, 검은 구름 밑으로 뚫린 맑은 하늘

  • 김형효
  • 조회 3155
  • 2005.09.05 21:49
- 말로만 듣던 공개재판 장면을 목격하다


 
 
이렇게 도문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연길로 돌아간다. 도문에도 앞에서 소개한 시인들 외에도 이미 오마이뉴스에 소개한 바 있는 윤청남 시인 등 여러 시인이 있다. 앞으로 여러 시인들을 다시 소개할 기회로 미루고 계속 여행길을 재촉하고자 한다.

그렇게 도문에서 김영춘, 김경희 시인의 배웅을 받으며 연길행 버스를 탔다.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두 시인과 차안에서 작별의 아쉬움을 이야기하며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우리네 마을버스와 같은 연길을 향해 가는 버스에 엄마와 함께 어린아이가 차에 오른다. 아이의 할머니로 보이는 분이 아이를 차안까지 안아서 올려 태워준다. 아이는 손을 흔들며 할머니와 인사를 나눈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언뜻 할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들도 조선족이었다. 그들은 하가촌이라는 곳에서 내렸다.

그들이 내리기 전에 서울에서 가져가 여행 중에 심심풀이 삼아 먹던 캔디를 아이에게 물려주었다. 아이는 금새 눈은 깜짝이고 손은 흔들며 아는 체를 했다. 아이가 차에서 내려서 창문으로 다가와 "빠이빠이, 세세"라고 큰소리로 외친다. 확실하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인사를 하던 아이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보냈다.

길가에는 개혁개방의 흔적이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노후한 방식의 도로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간간히 트럭이 눈에 띌 뿐, 특별한 문명의 혜택(?)이나, 적극적인 문명의 수용형태를 보기는 어려웠다. 거칠게 운전을 해대는 운전기사 덕분으로 한 시간 십 분 만에 연길 역에 도착하였다. 검은 구름 밑으로 뚫린 맑은 하늘이 보인다. 도문에서 연길을 향한 길에서 검은 하늘을 보면 마치 한밤중을 체감할 수 있었고, 먹장구름이 거치고 나면 금세 또 한낮을 실감나게 했다. 그렇게 1박2일의 도문여행을 마쳤다.

연길에 돌아온 나는 맨 먼저 잃어버렸던 가방의 행방을 확인하고 너무나도 기뻐했다. 참으로 중요한 여행 필수품의 하나였던 카메라, 그리고 짧은 기록들, 연락처들, 아무튼 가방을 만져보고서야 되찾은 실감을 할 수 있었다. 다음날 일정을 어떻게 잡을까를 걱정하며 조용남 선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도중 조용남 선생은 피곤하신 듯 잠이 드셨다. 평소 같으면 잠자리에 들기가 이른 시간이나 비 내리는 대륙의 밤, 드넓은 평야의 밤은 더없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안겨주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때문에 안팎으로 깊은 어둠이 내린다. 깊은 잠을 한숨 청해 볼 냥으로 나도 따라 눕는다. 멀리 중국까지 어려운 여행을 와서 낮잠을 청하다니 이런 엉뚱할 때가 그러나 그 안도의 잠은 참으로 깊은 꿈결처럼 고요했다. 그런데 밤이 깊어질수록 뒤척임은 심해졌다.

다음 날 아침이다. 한국 시간 일곱 시, 연길 시간 여섯 시다. 곧 세면을 하고 이곳에 와서 구입하고 받아든 책들 그리고 선물 받은 것들을 정리하고 나서 메모를 상기해본다. 꼭 용정에 명동교회를 찾고 싶다. 오늘 날 한국 교회에 실망하고 사는 비신앙인인 내가 그곳을 찾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얼과 혼이 담긴 민족운동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권순진과 만나기로 했다. 지난 해에도 그의 훌륭한 가이드 덕을 본 상태라 그를 만난다는 데 대해서 기대가 크다. 발해와 고구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집안현도, 백두산도 가보고 싶다. 그리고 훈춘을 지나 조·중·러 국경에도 가보고 싶다. 국경을 경험해 본적 없는 내가 찾은 두만강변! 3국 국경이 밀접히 맞닿아 있을 그곳의 풍물이 궁금하다. 권철 선생님도 만나야 한다. 시간도 짧고 경비도 적어서 고민이다.

잠시 후 조용남 선생은 책 "분렬의 장벽은 무너지리라!"를 가지고 들어오셨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기형 시인과 석화 시인에 관계된 문제 때문이다. 책을 출간한 사람으로서 그것은 결국 필자의 책임이다.

심련수 시인을 필자가 한국에 소개한 것은 맨 처음이지만, 이기형 시인의 표현처럼 심련수 시인을 내가 발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연변시인들이 발굴한 것을 내가 한국에 소개한 것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하나의 문제고, 석화 시인이 연변문학 한국지사장일 수는 있어도 현재의 편집장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사실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그리 표현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냥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무튼 조용남 선생님의 말씀은 당연한 말씀이셨다. 좋은 뜻만으로 좋은 일이 다 되는 것만은 아닌 것이 인간사가 아닌가? 참으로 아득하고 답답하였다. 잠시 후 아침 식사를 하였다.

식사도중 나의 의도와 다르게 진행된 현재의 실상에 대해 해명의 기회를 가졌다. 선생께서도 원래의 뜻은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식사가 끝나고 석화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은 배재대학 교수일행, 연변일보사, 연변텔레비전 등의 언론사 분들이 함께 만나기로 하셨다고 한다.

석화 시인의 일정에 맞춰 오늘은 그분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그분들을 만나기 전 나는 가슴 철렁한 광경을 목격하였다. 말로만 듣던 공개재판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그것도 중국에서 그런 일이 있다고 들은 것이 아니라, 예전에 어렴풋이 들었던 것으로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이야기 속에서 들었던 공개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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