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락치’ 시사회를 보고, 허망한 꿈을 현실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며
과거사를 되짚어 보는 것은 우리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과거가 밝았던 사람들은 고통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과거가 어두웠던 이들은 미래의 불투명성에 몸서리를 치는 것이 삶에서 일반적인 전형을 이루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그 과거의 어둠 속에서 기생했던 사람들의 힘은 현실이란 경계에서 단단한 균형감을 갖고 버틸 수 있는 과거의 힘이 남아 있다.
11월 10일 오후 7시10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 넓고 안락한 좌석에 500여명 정도 자리를 채우고 있는 듯했다. 아침부터 질척임도 없이 내리던 빗방울에 젖은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비 내리는 퇴근길에 의원회관으로 향했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열린우리당 강혜숙 의원은 "프락치라는 영화를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에 당위성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주길 기대한다"는 당부의 말씀으로 짧은 인사를 마쳤으며, 이어서 민주노동당 천영세 원내대표는 "국회 안에서 영화상영이라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며 악의 덩어리, 부끄러움의 덩어리를 근원적으로 파헤치는 작업이 국회에서 곧 시작 될 텐데 오늘 프락치라는 영화 상영이 그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것은 새로운 싸움의 시작을 의미하며 반드시 이겨내야할 성스러운 싸움이다."라고 국회라는 공간에서의 영화상영 의미를 평가하고 국가보안법을 포함한 악법의 개폐에 대한 의지를 표현해주었다.
이어서 영화를 제작한 황철민 감독은 짧은 인사말을 통해 “특별히 다큐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기 보다는 휴머니즘적 시각, 아름다운 인간 찾기, 최소한의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고민하며 영화를 찍었다”는 간단한 소회를 밝혔다. 그동안 평화통일 운동에 앞서 싸웠던 종교계 지도자와 장기수 어르신들, 그리고 시민사회활동가들이 다수 참석한 이날 시사회는 어둠속에 촛불을 밝히는 마음을 다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국회의원회관의 어둠 속에서 영화 프락치를 보면서 희망 찾기, 아니 희망의 완성편을 보려는 듯 영화보기에 열중했다.
조명이 꺼지고 어둠이 깊어지며 스크린이 열렸다.
선풍기 바람 앞에 자신을 맡긴 두 사람의 남자 주인공, 프락치와 프락치 감시요원이 함께 잠든 어둠 속에서 출발한다. 영화의 주제어에 묶여서 성급한 문제에 접근을 요구하는 관객이 지루하고 짜증스러울 만큼 두 주인공의 무료한 일상 속에서 영화는 미끄럼을 타듯 주제 속으로 자연스럽게 밀려들어간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고 움직여왔던 국가보안법의 실체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남 없이 철저히 계산된 감독의 앵글은 우리가 성급하게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쩌면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철저히 감독의 계산된 앵글 속에 저당 잡힌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반 백년의 질곡을 만들어온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을 전제해두고 보면 이 문제에 본질을 직설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만큼 탄탄한 지킴이들이 있다는 논리이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를 쥐고 흔들었던 장본인들 흔히 말하는 수구 기득권세력의 철옹성이 있다는 반증을 역설적 거리를 통해 강하게 꼬집어 주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가 그 정점에 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리고 한나라당과 수구 기득권세력의 말초적 촉수에 놀아난 몇몇 역사의 배반자들이 프락치 노릇을 자행하며 그들의 겨드랑이 밑에 기생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죽어서 조국의 산하에 냄새날까 두려워 조국의 산하조차 그들의 송장이 썩게 두지 않을 것만 같다.
과거세력에 의해 진보적 인사 혹은 급진적 인물로 낙인 찍혀 옥고를 치름은 물론, 진보 진영의 주요인사로 불렸던 소수의 인물은 이제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수구 세력의 중심에서 자신의 실체를 가장하고 개인의 출세와 영달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한때는 그들도 빨갱이로 낙인이 찍혀 살았었다. 이제 그들은 그런 흔적조차 잊고 그 억울과 처절을 만시지탄의 논리적 허울에 팔아먹어버린 사람들이 아닌지...,.
아마 그들도 프락치의 고백 아니 독백처럼 오늘밤 잠자리 이불속에서 "어쩔 수 없잖아! 나도 살아야 했어! 신은 내게 정의를 요구할 자격이 없어!" 거리에 최루탄과 전경과 백골단의 곤봉에 처절하게 매맞던 나에게 "신은 정의를 요구할 자격이 없어!" 아무런 권력과 자본도 없이 날 세상에 내놓은 신은 내게 그런 말 할 자격도 없어 라고 항변하려는지 모를 일이다. 그들이야말로 불사신의 프락치들이니까?
바퀴벌레를 가지고 놀다가 으깨어 버리는 프락치 감시자, 그 바퀴벌레처럼, 야반도주하던 프락치가 쫓기며 함께 클로즈업 되었던 어항속의 물고기, 그 어항 속 물고기처럼, 그렇게 놀림받고 살아가는 프락치들이 아직도 현실 속에 살아 있어서 국가보안법 폐지의 힘겨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어항 속 물고기와 바퀴벌레처럼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어쩌면 지금은 자신이 역사의 주도세력인 줄 착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수구 기득권 세력의 편에서 암약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발전과 자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수구 기득권 세력의 확실한 잉여물적 가치평가에만 내맡겨진 채...,
이는 새로운 힘을 갖고 전진해가려는 사람들이 혹은 어둠에 세력들과 끝없이 쟁탈을 벌이게 되는 싸움이 간단한 싸움이 아님을 확인시키는 현실이다. 어쩌면 과거 세력들의 궁색함은 그들이 전율하며 행하던 만큼 극단적인 치졸과 치사함을 보여준다. 심지어 과거의 가해자였던 사람들조차 어느 새 한 통속으로 들어가 기생하고 있으니 그 <과거힘>의 균형이란 무서운 것이다. 어쩌면 과거의 규명을 어렵게 하는 현재의 힘은 바로 그곳에서 생성되어 그들을 버티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시사회를 마치고 밤비가 가을과 겨울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내리는 국회 의사당을 홀로 걸으며 웃음을 자아냈다. 누가 보았으면 마치 미친 놈 소리를 하기에 제 격인 태도다.
한 시대의 아픔과 그것이 새롭게 변화하는 질서속에서도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시대의 구조적 결함 양태를 보고 나서 웃음이 나오다니, 필자가 웃게 된 이유를 말하자면 갑자기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국회에 대해서 아주 불만족이던 필자는 시민단체 활동가 몇몇에게 철조망으로 국회를 봉쇄하는 인간띠잇기 퍼포먼스를 제안한 적이 있다. 왜냐면 그들을 다 죄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 <프락치> 시사회를 보고나서 만약 이번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이 폐지가 된다면 그토록 미워하던 한나라당 소속은 물론 전 국회의원을 추켜세우며 여의도 국회를 중심으로 꽃단장을 해주는 국회의사당이 꽃봉오리의 중심인 꽃술이 되게 그렇게 아름다운 퍼포먼스를 해주어도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즐겁게 웃었던 것이다. 많은 국민들이 국회에 꽃을 선물하는 그런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그날이 바로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는 날이라는 가정만으로도 즐겁고 흥겹다.
영화 프락치에서 황철민 감독은 다시 태어난 듯하다. 앞서 영화 ‘옥천전투’가 철저한 관조 속에서 사실에 입각한 다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한다면 이번 영화 프락치를 통해 그는 영화적 자유와 소통하였기 때문이다. 영화적 관점에서 그는 지화자 좋을씨구 춤을 추듯 자유로운 앵글을 마음껏 선택하는 솜씨를 보여준 듯하다. 그것은 그러한 자유로움 속에서 세밀하게 묘사된 인간형과 계산되고 기획된 프락치를 자유자재로 그려낼 수 있는 아티스트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때문이다.
[참고기사] 김형효, 영화 [옥천전투] 감상기(대자보 63호, 2001. 8. 21)
사실은 영화 초반 나는 황철민 감독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주제어에 함몰된 의식으로 나를 이끌어주길 바라며 답답한 가슴을 억누르며 영화를 보아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을성을 갖고 역사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본다면 우리는 국가보안법의 실체 속에서 무엇이 파괴되었던 것인가 올바로 알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아마도 우리가 끝까지 참고 이겨내면서 영화를 다 보았을 때 쯤, 국가보안법은 폐지되고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사건의 피해자인 김삼석의 말처럼 이쁜 간첩, 아름다운 간첩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보아나가며 기분이 좋아졌다. 이 영화가 한편의 아름다운 예술로, 집요한 휴머니티 찾기 싸움에서 이겨내며 희망을 찾아주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