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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서 만난 고려인(3)

  • 김형효
  • 조회 4350
  • 2010.06.24 03:07

 

우크라이나 농업의 주요생산 주체가 된 고려인

 

한국에서 모르고 사는 것이 참 많았다는 생각이다. 하루 하루 지나면서 왜 이렇게 모르는 일이 많은지 삶에서 느끼는 무지몽매를 살면 살수록 깊이 느끼게 된다. 그 하나로 낯선 나라 우크라이나 농업의 주요 생산 주체가 된 자랑스러운 고려인들에 대해 몰랐다.

 

사실 우크라이나에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것은 마찬가지다. 앞서 이야기했듯 국제적인 사회주의 물결이 일던 189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에 극소수 고려인들이 이주해왔다. 고려인들조차 그 사실을 모를만큼 미미하다. 본격적인 이주는 1930년대 후반 구소련권에 이주자들이 있었고, 우크라이나의 경우 1990년대 구소련당국에서 우크라이나 흑토를 일구어 논농사를 짓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흘러온 소수 고려인들은 대부분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이곳 고려인들은 베케탄이라 한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우크라이나 농업의 주요 생산주체란 사실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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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사짓는 장 아파라시(53세)씨 그는 우리말을 못한다는 사실에 덩치에 맞지 않은 쑥스럽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필자는 그런 그를 보며 한없이 아픈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85세의 아버지를 모시고 살기에 조금씩 들은 말이라면서 서툴지만 어느만큼 우리말을 알아들었다.
ⓒ 김형효
icon_tag.gif장 아파라시(53세)씨

몰랐던 사실 또 하나는 우크라이나에 무더위가 있다는 사실이다. 작년 3월 우크라이나에 와서도 이런 무더위를 몰랐었다. 지금 우크라이나는 뙤약볕으로 도로의 아스팔트가 녹아 마치 물이라도 뿌려놓은 것처럼 보이는 무더운 날의 연속이다. 광활한 영토의 널따란 대지에 섭씨 35도를 넘는 날씨는 견딜 재간이 없을 정도다. 낯선 나라에 생활이 설레임과 긴장의 연속이지만, 무더운 여름날 동포를 찾아가는 길에는 기쁨이 더해진다. 이번에 필자는 헤르손에서 남쪽으로 1시간 30분 거리에 "뜨루바쟈 오드하 주부르브스키 꿋"이란 곳에서 고려인 농부 형제 장아파라시(53세)씨와 그의 아우 니꼴라이(애칭:꼴야, 45세)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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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아파라시 씨의 수박밭이 광활하다. 두 형제의 밭은 차를 타고 다니지 않으면 둘러보기도 어려웠다. 광활한 것은 이쯤되어야 입에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는 들 그 자체가 풍요처럼 느껴졌다.
ⓒ 김형효
icon_tag.gif장 아파라시 씨의 수박밭이 광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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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꼴야(45세)씨의 밭 옆 집에 설치된 뻬치카 고려인들의 밭 옆에는 한국의 시골집처럼 집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도심에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고 농토 인근에 농사철 생활을 위해 마련한 집들이라고 한다.
ⓒ 김형효
icon_tag.gif장 꼴야(45세)씨의 밭 옆 집에 설치된 뻬치

5월말 장 아파라시 씨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고 이번은 두 번째다. 그는 홀로 48만평의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그의 아우 니꼴라이는 60만평의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형제가 수박을 생산하기 위해 경작하는 면적만해도 아우 니꼴라이 30만평, 형 아파라시 18만평이라고 한다. 니꼴라이는 밀농사도 30만평을 짓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처럼 대규모의 농사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한국에 이런 대규모의 농사일을 하는 곳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두 형제가 생산하는 수박은 독일, 폴란드 등지로 수출이 되고 우크라이나 현지에는 출하가 어려울 정도로 판로가 보장되어 있다고 했다.

 

지난 해 우크라이나에 온 후 두 번째 여름을 맞이한다. 우크라이나 농산물은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거의 대부분의 생산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채소나 쌀, 수박의 주요 생산자가 고려인이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수박은 같은 지역 헤르손에서 생산된 수박이라도 고려인들이 재배한 수박의 경우는 값을 더 받는다고 한다. 경작방법이 다른데다 맛이 좋은 이유라고 했다. 그것은 채소나 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농업에 대해 성실한 태도가 좋은 농산물을 생산해내는 근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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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만난 동갑내기 고려인 꼴야(니꼴라이, 45세) 그의 가슴에는 체게바라가 새겨져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라고 한다. 형도 형 친구도 웃으며 그는 꼬뮤니스트라고 했다. 동갑내기 친구를 만난 기념으로 사진을 찍기를 청했다. 그도 반갑게 응해주었다. 아쉽게 그는 우리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곧 다시 만나 인사말 등 간단한 말을 가르쳐주고 싶다.
ⓒ 김형효
icon_tag.gif처음 만난 동갑내기 고려인 꼴야(니꼴라이, 4

어쩌면 저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농자천하지대본의 전통을 이야기해주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곳 우크라이나의 주요 농업 생산자로서 주체적인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농사일을 하면서도 농경문화의 전통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농경문화의 전통 속에는 필수적으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살아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속에서 민족의 정체성은 그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

 

한 예로 성씨와 본을 구분하지 못하는 고려인들이 본과 성을 혼동하며 필자에게 질문을 던져올 때는 참으로 안타깝다. 그나마도 나이든 어른들의 일로 젊은 사람들은 관심 밖의 일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 그것이 삶에 얼마나 큰 의미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나서 질문을 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나라를 떠나 이국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 그것이 지푸라기 잡듯 남은 흔적이라는 생각에 미치면 그 안타까움의 이유를 알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 호적관계법이 개정되면서 씨족에 대한 개념이 예전과 달라진 것을 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일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곳에 고려인들에게 그것은 조국보다 더 가까운 절실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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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꼴야의 30만평 푸른 밀밭의 시작이다. 꼴야가 농사짓는 수박 30만평과 밀 30만평, 필자는 그 규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많은 고려인들이 대규모 영농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자랑스러운 동포들이다.
ⓒ 김형효
icon_tag.gif꼴야의 30만평 푸른 밀밭의 시작이다.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현재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과거 영업사원 일을 해본 적이 있다. 그때 교육 중 복음하듯이 영업하면 성공할 것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종교인들이 우크라이나에 와서 복음을 위해 움직이는 흔적을 많이 접한다. 그것을 보면서 조국이 저들처럼 고려인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는 없을까 사색해보았다. 지나친 바람일까? 그들이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을 보며 기쁜 것은 어쩔 수 없는 동포애라는 생각이다.

 

22일, 그러니까 내일이다. 우크라이나 크림지역의 고려인 청년대표 모임이 있다고 한다. 이곳 고려인 협회장인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가 초청했다면서 필자를 초대했다. 그들에게 인사말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필자는 무슨 인사를 해야 할지 암담하다. 많은 고려인 청년들과 인사를 나눈 적이 있으니 아마 이미 구면인 청년도 있으리라. 혹여 그들에게 다시 왜 통일을 이루지 못했는지? 질문을 받을까 걱정이다.

 

궁색한 변명도 자꾸 반복되면 초라해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해외 동포들에게 남북한 모두,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그런 책무를 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해외동포들에게 정말 고개 똑바로 들고 거들먹거릴 처지가 못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통일을 앞당길 개개인의 책무는 없는지 생각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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