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파나시씨는 동갑내기 부인 주베라(59세)씨와의 사이에 딸 셋을 둔 아버지로 첫째와 셋째 딸은 출가했고 둘째 딸은 키예프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필자는 생일잔치가 열리는 자리에서 1930년에 장꼬이로 이주해왔다는 93세 할머니를 소개받고 사진 촬영을 했다. 그런데 다음날 주타냐는 그 할머니가 85세라고 했다. 사실 확인을 하고자 그 할머니와 만남을 요청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어렵다고 했다. 만약 그 할머니가 93세가 맞고 1930년 이주가 옳다면 고려인 이주사의 또 다른 역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게르만장과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그 할머니를 찾아 만날 것을 요청한 상태다.
생일잔치가 끝나고 보드카의 취기에 무기력해진 나는 게르만장의 안내를 받아 그의 집 지반에 자리를 폈다. 마음 같아서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내고 싶었지만, 다음 날을 기대해야 했다. 새벽잠에서 깬 나는 낯선 고려인 집에서 고려인 이주역사를 기록한 책을 읽었다. 보기에 따라 흥미로운 장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안타까움과 내가 가져야 할 사명은 무엇인가 사색을 반복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수많은 독립지사들과 민족의 이름으로 장한 선조들의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날이 밝아지며 러시아와 관계된 나의 모자란 역사적 인식의 눈을 떠야 한다는 각성도 하게 되었다.
역사에 정사가 없는 역사가 있다. 그렇다면 사정에 의해 올바로 정리되지 못한 정사는 야사에 의해 올바로 정리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우리에게 고려인 이주사 더구나 낯선 우크라이나 고려인 이주사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그런 점에서 정부와 관련 기관들의 관심이 절실한 일이다. 그래서 박유바 할머니와의 만남은 필자에게 설레임을 주기에 충분했다. 전언에 의해 기록될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자의 눈에 지금 세계는 과거보다 더 세밀한 민족단위의 분화과정을 겪고 있다. 마치 씨족사회로의 회귀처럼 민족단위로 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세계사의 흐름에 유독 색다른 모습을 보이는 곳이 한반도의 갈등구조다. 보기에 따라 세계사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희한한 면면을 보여주는 것이 지금 한반도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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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크라이나 인근의 키르키즈스탄에서 민족주의 흐름에 의해 이민족들이 박해를 받고 있다. 죽음을 당하고 재산을 잃고 축출당하고 있다. 그런 흐름은 우리 민족에게도 해당된다. 이미 키르키즈스탄에서 정착해온 고려인들에게도 해당되지만, 최근 그곳에서 가정을 이룬 한 사람의 한국인 40대 가장이 필자에게 크림으로의 이주와 관련해서 자문을 구해오기도 했다. 요즘 필자는 새로운 고민에 싸여 있다. 지금 현재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많은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에 이주해오고 있다. 그들은 좋은 농토를 찾아오고 있지만, 그들에게 국적이 우크라이나가 아니라는 사실은 생존 기반에 위협요소가 되고 있다.
이미 오래 전 이곳에서 살아왔지만, 국적이 우즈베키스탄인 사람들에게 우크라이나 국적을 부여하도록 각지의 고려인협회와 우크라이나 한국대사관에서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최근 들어 그 절차가 더욱 까다로워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문제는 지금도 고려인들의 이주는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에도 주요 농산물의 생산주체가 되었다는 기사를 작성한 바 있듯이 그런 흐름이 자칫 민족문제로 갈등을 겪을 소지가 되지는 않을까? 한 나라의 주요한 산업의 주체가 이민족이 될 때 그 배타감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를 필자는 느끼고 있다. 그만큼 고려인들의 성실함과 주체적인 삶이 눈에 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것이 역설적인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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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파나시씨는 한해 농사일로 연 수익 1억대가 넘는 부호라고 한다. 그런데 김아파나시씨 말고도 그런 부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바로 우크라이나 고려인들 속에 그 주인공들이 있다. 그러니 이주 대열이 끊이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들의 또 다른 고향과도 같고, 또 다른 조국과도 같은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일명 스탄공화국들에서 이주가 계속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생활의 모든 면에서 만족스런 대답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배고픔 때문이 아니다. 필자의 눈에 그것은 삶의 또 다른 결핍요소 때문이다. 그런 점들은 시장이나 거리에서 가끔씩은 다시 한 번 쳐다보는 눈길과도 같은 것이다. 고려인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다시 한 번 쳐다본다는 것 그것은 다르게 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항상 내재된 슬픔 자국이라 생각한다.
필자에게 가끔씩 현지의 어린이들이 끼다이(중국인)라고 부르며 놀리는 그런 내키지 않은 반응들이 이곳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결핍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기에 가끔씩은 한국인들조차 말만 같은 민족이지? 라고 하는 말들을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해외동포를 대하고 만날 때 역사의 흔적까지 감안해서 말하는 기술도 필요하지 않을까? 해외동포에 대한 바른 응대법이라도 교육되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생각한다. 그것이 내 동족에게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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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 깊은 여행자와 게르만장은 서툰 러시아어로만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니 그와 내게 주어진 소통의 길은 좁다. 하지만 그와 내게는 자기장반응 같은 것이 있다. 같은 동족끼리 나눌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은 난생 처음인 많은 낯설음을 무기력하게 하고 차곡차곡 무수한 잔상을 쌓아올린다. 그와 나의 소통의 폭은 언어만이 아닌 눈짓, 몸짓 그리고 러시아어 몇 개의 단어로도 길을 넓혀가기에 충분했다. 기분 좋은 경험이다. 그는 그가 일하고 운영하고 있는 장꼬이 케이블 방송과 지역생활정보지 회사를 소개했다.
그는 장꼬이에서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분명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필자는 그의 회사 관리이사(본데르 엘비라 발룐티노브나:БОНДАРЬ ЭЛЬБИРА ВАЛЕНТИНОБНА, 45세)의 환대를 받았다. 낮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왔다는 게르만장의 소개에 게르만장과 이야기를 나눈 후 환담의 테이블을 만들어 주었다. 필자는 그들과 그들이 준비한 와인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불완전함이 가져다주는 소통은 더욱 완벽한 것을 선사하였다. 그것 또한 사람과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응대하는가에서 오는 것이란 사실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기분 좋은 환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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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3회에서는 게르만장의 아버지 장경남(81세) 선생과 나눈 불편한 역사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