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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를 읽고

  • 김영춘
  • 조회 9142
  • 기타
  • 2013.10.18 17:04
오정희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를 읽고

최근에 한국작가 오정희의 산문집『내 마음의 무늬』를 읽었다. 이전에 오정희작가의 소설 <새>와 <저녁의 게임>을 읽으면서 내면세계를 생동하게 잘 그려내는 그의 아름답고 세련된 문체에 매료된적 있어서인지 도서관에서 그의 책이 눈에 띄우자 망설임없이 인차 집어들었다.
오정희작가의 이번 산문집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먼저 문인들에 얽힌 추억을 담은 마감부분을 읽었는데 박사친구의 론문집을 읽을 때와는 달리 김동리작가에게 호감이 갔다. 이문구와 김병익이라는 분은 잘 모르는 분이였는데 오정희작가의 글을 읽고 어떤 분들인지 궁금해서 인터넷검색을 해보기까지 했다. 오정희 작가는 당신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문인들을 참으로 아름답게, 사람냄새가 나게 생동하게 썼다.
그리고 나이 들면서 새롭게 바라보게 된 세상과 마음의 풍경을 담은 글들이 참으로 맘에 들었다. 아래는 책을 읽으면서 감명깊었던 내용을 적어둔 일부이다.

한참 푹 자고 나면 다 낫는다던 어머니의 말씀은 늙어가는 지금에도 유효하다. 잠이 최상의 명약이다. 전에 없이 일찍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든다. … 자연의 섭리, 생명 가진것들의 질서에 충실하여 후손을 낳고 떠나보내고 순하게 소멸해가는것이 기쁘고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나이 드는 일>에서

스쳐 지났거나 맞닥뜨렸던 이역의 풍경, 사람들의 모습들이 쓸쓸한 마음으로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신기루처럼 흔들린다. 내가 흔히 여행후의 우울이라고 말하는 이러한 감상은, 돌아왔다는 안도감이고, 불안감의 해소라는것의 다른 이름이리라.

삶이 공허하고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질 때 나는 종종 생존의 아우성으로 가득한 복잡한 시장통이나 도심지 인파속에 자신을 풀어놓는다.

가정은 행복의 근원이자 불행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개의 가족소설은 불화와 상처의 기록이다.
 귀로- 내게로, 네게로 돌아가는 길,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의 영원한 꿈.
- <귀로>에서

내가 30대 때 막 50대로 진입한 선배 언니가 집안의 잡다한 장식물들을 떼어내고 마루의 니스 칠을 벗기는 일에 몰두해 있는 것을 보았다. 심미안이 남달라 자신이나 집안의 분위기를 꾸미는데 일가견이 있던 그 언니는 “이제는 무엇이 아름다움인가를 알겠다. 본연의 모습, 자연스러움을 덮을만한 아름다움은 없다.”는 말을 했다….
  …육신이 늙어갈수록 눈길과 마음에 닿는 모든 것이 경이롭고 신선해진다는 이 아이러니! 그래서 인간을 신의 축복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 <시간의 얼굴>에서

작가란 바다에 걸어 들어가듯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물이 배꼽에 차오를 때까지만 들어가야 한다거나 삶에 너무 매여 있으면 삶을 명확히 볼수 없다고 설파한 플로베르의 말에 의하면 나는 아마 삶의 일상성과 글쓰기의 그 아슬아슬하고 엄혹한 경계에서 추락하여 익사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 오랜 방황과 괴로움 끝에 찾아온 생과의, 세상과의 화해라고 말할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그러나, …<서편제>, <내 책상위의 천사>등의 영화를 보면서 보다 높은 또 다른 세상의 출구를 향한 갈망과 열정에 몸이 뜨거워지며 거친 격정으로 울기도 하였다.
… 티브이를 끄면 갑자기 집안은 고요함속으로 잦아든다. 그 고요함속에서 내가 헤매고 다닌 길과 어둠속의 정경들이 우수와 신비한 색체로 되살아난다. 어둠속으로 사라진 늙은 개는 어디로 갔을까. 깊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치던 사람은 편안한 잠자리에 고단한 몸을 뉘었을까. 어둠속에서 흐르던 물과 바람소리, 깊은 밤 보는 이 없이 피어나던 꽃의 향기는?
- <밤의 순례>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결혼이 이 험한 세상의 안전한 닻이자 자신의 존재를 옭아매는 덫이라는것을 모르지 않기때문일것이다… 남녀가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는 것이 결코 행복과 기쁨 그 자체만이라고는 할 수 없는, 시고 떫고 맵고 짠 신산한 생활이지만 때로는 유한한 우리 인생에 그렇게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지복으로 보상해주기도 하는가보다.
- <어느 날의 저녁 풍경>


238—시(诗)란 말씀의 절(寺)。



저 자 : 오정희(吳貞姬)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대학 2학년 때인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79년 <저녁의 게임>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며 박완서 등과 더불어 한국 최고의 여성 소설가로 군림했다. 2003년에는 독일에서 번역 출간된 『새』로 독일의 주요 문학상 중 하나인 리베라투르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해외에서 한국인이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로서 한국문학의 해외 진출사에서 매우 의미 깊은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0년대 말 모 일간지에서 문학평론가 33인을 대상으로 '한국문학 50년 최고의 작품 50'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황순원, 이문열 등과 함께 가장 많은 3개의 작품(<유년의 뜰><동경><저녁의 게임>)이 선정될 만큼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독보적이다. 특히 그는 내면 지향적인 주제의식과 문체미학으로 신경숙, 전경린, 조경란, 하성란, 윤성희 등 수많은 후배 소설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글은 소설 미학의 전범을 따라 배울 수 있는 '교과서'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창작집 『불의 강』『유년의 뜰』『바람의 넋』『불꽃놀이』, 장편소설 『새』, 동화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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