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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춘 시인의 시와 삶의 세계 / 김영금

  • 김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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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원시평
  • 2006.08.21 22:16
평론

나르시시즘과 시 쓰기의 안과 밖

                    -김영춘 시인의 시와 삶의 세계

                                * 김영금(문학박사, 낙양외국어대학 부교수 )


      외래중이 염불을 잘 왼다고, 사람들은 항상 가까이에 있는 ‘백마’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 아니, 잘 알아주지를 않는다. 사소한 흉허물을 빤히 알고 있는 처지라서 쉽사리 탄복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진정 소중한 우정은 서로 간에 백락‘伯樂’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박한 이 세월에 서로 다독여가면서 함께 커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남성과 남성 사이에 그렇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그러하며, 여성과 여성 사이에는 더욱 그러하다.

      20년 전의 어느 날 저녁, 제1사범의 어둑어둑한 복도에서 두 여학생이 만나고 있었다. 형제의 이름을 가진 동갑내기 여성의, 학급과 성격과 지향을 뛰어넘은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똑같이 자존과 승벽이 강한 여성들임에도 긴긴 세월을 인내해온 우정에는 운명적인 그 무엇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생애에 몇 개의 20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두 여성 사이에 그렇게 오래된 우정을 나눈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의 여행에서 영춘이는 항상 적극적인 주동자였고 속삭이는 화자였으며 나는 항상 소극적인 수동자였고 귀담아듣는 청자였다. 그러나 항상 청자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도 어려운 일인 줄 나는 왜 일찍 몰랐던가. 그래서 나는 오늘, 나만이 알고 있는 시인과 그의 시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감’을 느낀다면 어폐일 것인가. 비록 시를 잘 모르기는 하지만, 나도 한 번 적극적인 화자가 되려고 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인가. 그러나 적어도 나는, ‘백마’더러 밭을 갈게 해서는 안 된다는 도리쯤은 알고 있지를 않는가.

1. 나르시시즘, 진솔한 인간의 솔직한 자아표현

‘아름다운 소풍’일 수만은 없는 이 세상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사랑이라는 양식이 꼭 필요하다. 한 사람의 삶에서 부모와 지아비와 자식에 대한 사랑, 이웃과 민족과 나라에 대한 사랑은 필수적인 것이고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하나의 개체적인 생명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사랑은 자기애에 다름 아니다. 부모형제와 민족과 나라에 대한 사랑 역시 자기애의 확장된 외연이 아니던가. 누구에게나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것을 의식하고 있느냐 의식하고 않지 있느냐 또는 그것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기애의 확대된 표현, 그 문학적인 상징이 곧바로 나르시시즘이다.

호수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사랑하여 그리워하다가 호수에 빠져 죽어 수선화가 되었다는 나르시스, 그에서 유래된 나르시시즘은 자기도취라는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나르시시즘의 원초적인 바탕인 자기애는 생명의 연속과 발전을 가능하게 하고 보다 나은 삶을 향한 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고 동력이기도 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에코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죄로 내려진 벌로서의 나르시시즘의 부정적인 일면 역시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기애의 명징한 표현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은 그만큼 진솔한 인간의 절대적으로 솔직한 감정 표현에 다름 아니다.

요즘 같은 혼탁한 세월에도 맑고 투명한 심성을 가진 시인으로 알려진 김영춘의 시에서 한눈에 안겨오는 얼굴표정은 나르시시즘에 가까운 것이다. 시의 전반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기조가 자기애라는 말이다. 자강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자기애는 꿈 많은 문학소녀를 오늘의 시인으로 성장하게 한 원동력이었으며, 그것이 그대로 그의 시들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 나름의 정서와 감각으로 표현된다.

……
조용히 샘물을 들여다보니
내 얼굴이 산에 안겨있었다

손끝이 살며시 샘물에 닿는 순간
산은 나를 잎새로 만들어버렸다

-가을동화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들은 거개가 거울을 들여다보기 좋아한다. 아니, 거울을 들여다보기 좋아하는 여성들은 대개 나르시시즘의 성향을 보인다면 어떨까. 친구는 항상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맑게 웃는 얼굴을 가꾸어 왔다고 했다. 그리고 상기 시에서 시적 자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듯이, 측은한 눈길로 자신을 관조하고 있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질 때 샘물을 들여다보면서 "산은 나를 잎새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인식은 자기가 아닌 그 누군가에게서 희망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 모든 가능성과 희망은 오직 자신한테 있다는 시인의 깨달음과 자아확인에 이어진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고 또한 훼멸시킬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가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저 「해변에서」의 바라보는 ‘나’와 그 시선 속에 놓인 ‘너’는 동일체로서 “나 몰래 혼자 꺼이꺼이 우는” ‘너’는 다른 누가 아니라, “맘속 열망”을 그대로 터놓는 ‘나’에 다름 아니다.

김영춘의 시들은 시적 대상물에 따라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나르시시즘의 경향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것은 ‘바다’로 향한 개체의 ‘꿈’에 대한 시들에서다.

먼 길을 걸었어도 바다에 이르지 못한
젊은 날의 서글픔 닦아버리듯
봄 먼지 묻은 구두를 닦는다

……
예쁘나 발 아프게 하는 유리구두 버리고
짚신 신고 싶어지는 때 있듯이
하루에도 바다에 갔다 오는 꿈
열백 번도 더 꾸노라

-구두를 닦으며

바다에 이르는 꿈, 그것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으나 버리지도 못하고 버릴 수도 없는 인간의 그 어떤 갈망이다. 그러한 꿈을 이룰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김영춘의 시에서 그것은 자아의 억제에 있기도 하다. 꿈에 매료되어 있으면서도 ‘달님’한테 들키고 싶지 않아 커튼을 치는 것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바다로 떠나려
봇짐 챙기던 꿈
그만 중도에서 깨고
창문으로 빠끔히 들여다보는
예쁜 달님 만났다

내 꿈도 훔쳐보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못 본 듯 구름과 유희 노는
보름밤 명월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시름 놓인 듯 잊었던 커튼을 친다

- 보름밤

자기애는 그 표현의 강도와 방식에 따라서 자기도취, 자신심, 자기연민 등으로 구별되는데, 김영춘의 시에서는 자기연민이 위주가 된다. 바다에 닿을 수 없는 유감과 꿈이 깨어진 아픔과 그로 인한 추위와 고독이 부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눈물 어린 노래”이고 “은은한 마음의 떨림”이며 “작은 날개 파닥여보는 갈망”이고 “밤낮 아찔해지는 소외감”이다.

나는 지금 숲 그리워 우는 새
적막에 싸여 고독을 쪼는 새
……
꿈을 찾아 숲을 찾아
맘속 노래 한껏 부르려는 새

-숲 그리워 우는 새

김영춘의 시들에는 “버려야 하는” “소중한” 꿈이 너무나도 많으며, “하얀 설움”도 많다. 그래서 “부드러운 눈매”의, 누군가의 “응원”이 그립기도 하다. 고독이나 외로움이란 자기애의 욕망에서 생겨난, 타자에의 간절한 부름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
손이 너무 시려서
다방 아가씨에게라도 사랑 비라리 하고팠다
따스한 그 손으로
실망에 얼어든 마음을
다문 1초라도 꼭 쥐여달라고
……

-초봄의 연길

추위로 표현된 외로움, 그것은 그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안기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다. 십여 년 전, 석현에서 날아든 전보 한 통이 나의 동창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그 전보문은 그 후 “너도 춥니?”라는 시로 씌어지기도 하였지만.

하고 싶은 말 진심과 함께
꽁꽁 얼음 옷에 숨겨놓고
자못 태연한 얼굴로
새롭게 하늘을 마주보고 싶다
……

-겨울강

꽁꽁 얼어붙은 겨울강을 앞에 두고, 하늘을 향한 시인의 “자못 태연한 얼굴”에서 눈동자에 그들먹 고여 있는 눈물이 보이는 것은 나 혼자뿐일까. 추위를 두려워하는 시인에게 “겨울”은 “밤”이고 “봄”은 “아침”이다.

……
초봄 흙 위에 우연히 움튼
선택 없는 삶인 이상
다가오는 매 한 오리 햇살과
매 한줄기 빗물을 사랑하며
꽃과는 다른 향기로 살고 싶다
……
-꽃밭의 풀

‘꽃밭의 풀’이라는 자기인식은 처절한 것이다. 그러나 “꽃과는 다른 향기로” 아니, 꽃에는 없는 향기로 살리라는 말로 들리는 것은 왜서일까. “크면 클수록/ 뽑히기 쉬운 줄 알면서도/ 무작정 크고 싶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의 폭탄선언이다. 사디즘적인 경향을 드러낸 시로 평가되기도 하는 「8월의 호숫가를 거닐면」에서도 적극적인 자아의 자세가 드러난다. 대방에게 알려지지 않은, 일방적인 짝사랑임에도 시적자아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기까지 하다.

자아연민의 숨겨진 뒷면은 자신심 내지 자아도취이다. 소원과 소망 그대로 되지 않아 아프고 슬프고 외로운 시적자아에게는 ‘우체통’도 외롭고 ‘소외당한' 존재이며 ‘해비’도 슬피 우는 소녀이다. 그럼에도 “내 눈물은 아직도/ 샘물처럼 맑”다는 선언에는 아집에 가까운 시적자아의 형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슬픔의 뒷면에는 꿈에 대한 추구, 바다에 대한 갈망, 하늘로 향한 비상 등등이 여전히 새파랗게,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춘씨는 말수 적고 조용한 여성이면서도 폭풍을 갈망하는 ‘맹렬 시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절한 아픔 토해”낼지언정 “산 죽음”을 거부한다. “뽕잎우의 버러지”를 보면서 “먼먼 무지개”를 쫓아 뛰고 뛰는 자신을 연상하는 자리에는, 자아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대견스러워하는 표정이 묻어 있다. 그리고 “내 이름에 맞는 나무를 찾아/ 초록빛 노래 맑게 부르리”라고 읊조리는 데에서는 바람맞이 절벽 위에서 머리칼을 휘날리며 흔연히 웃는 얼굴, 그 오연히 빼어든 긴 목이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시를 낭송하는 김영춘 시인의 모습을 보고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2. 시와 삶의 양상, 시 쓰기의 안과 밖

자아관조와 자아연민을 비롯한 나르시시즘이 김영춘 시의 하나의 흐름을 이루게 된 원인은, 아름다운 꿈에 비해 현실이 냉혹하기 때문이며 더욱이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포기하지 않은 때문이다.

사범을 나온 후에 멀리 고향 장백을 등진 낯선 타향 석현에 자리를 잡고 그 곳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동생과 함께 기숙사생활을 하였고 마침내 그 곳에서 따스함을 찾아 생활의 보금자리를 틀었으며 석지신문의 기자와 편집으로 시와 꿈에 대한 추구를 계속하여 온 친구가 아니더냐. 그리고 마침내 보다 값진 삶과 멋진 시를 쓰기 위해 "남의 도시인 연길"에 발을 들여 놓은 영춘이다. 꿈을 찾아가는 인간의 길에는 종점이 없으며, 끊임없이 “새 의자 찾아 떠나”는 것은 젊음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꿈과 현실, 시인과 생활인 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현기증은 김영춘의 시에서 하늘이나 땅과도 멀어서 느끼는 ‘소외감’으로 표현된다.

……
머리 들면 눈부신 별무리
머리 숙이면 화사한 꽃천지

아직 나와 멀고
이미 나와 멀어져
밤낮 아찔해지는 소외감
……

-어느 삼십대의 슬픔

참으로 오랜만에 고향에 들린 적이 있다. 눈에 익고 귀에 익고 마음에 익은 고향은 그대로 뫼가 되어 드러눕고 싶은 곳이었지만, 그만큼 시간과 공간이 정지되어 두려움을 안겨주는 곳이기도 하였다. 변함이 없는 속에 소리 없이 지나가는 세월, 살아있는 것들에게 그것만큼 참기 어려운 것은 없으리라. 더욱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꿈꾸는 시인에게는. 그래서 연길이라는 도시는, “낯선 도시”이고 “남의 도시”이면서도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게 하는 곳, “마음을 부르는 유혹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
겨울의 동상 괴롭게 씻으며
힘겹게 오고 있는 봄
이제는 남의 도시인 연길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가

-초봄의 연길

그러나 “마음을 부르는 유혹의 세계로” 떠나는 걸음은 격동과 더불어 두려움으로 충일되어 있다. “낯선 풍경”에로의 진입은 “떠나야 하는 것”이고 “올라야 하는 것”으로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한때 “김충”이라는, 조금은 남성적인 필명을 썼던 이면에는 명배우 진충을 좋아한 원인도 있었지만, 자신을 향하여 “앞으로 갓!”을 불러야 할 필요에서 나온, 자아에 대한 격려와 편달이 있었다. 또한 ‘여성’이라는 신분에 대한 오래된 미망이 섞인 이야기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딸 넷을 가진 엄마의, 아들 넷을 가진 이웃집 아낙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 딸이기에 아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엄마의 승벽으로 하여, 그러한 엄마의 중임을 떠멘 맏딸에게 남자는 우선 경쟁하여 이겨야 하는 상대였고 동시에 숨겨진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꽃이 아닙니다」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소박한 아름다움, 아련한 자태
웃음 적은 세월에 맑은 웃음 키워가는
도고한 여인 어여쁜 마음
……

-하얀 모란꽃

“하얀 모란꽃”은 시인의 머리 속에 그려지는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면서 시적 자아의 선언이기도 한다. 반성의 여지가 없이 도고한 어조가 그러한 인상을 짙게 한다. 이처럼 김영춘의 시에서 시적자아의 자아인식은 대체로 정면적인 것이다. 이러한 점은 「현대승냥이」에서 진일보 확인할 수 있다.

「현대승냥이」에서 시인은 쇠살창 속에 갇혀 자아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는 승냥이와의 동질감을 느끼면서 승냥이에게 말을 건다. ‘너’라고 불린 승냥이와 ‘나’라는 시적화자는 동일체로서 모두가 ‘야성’과 ‘용맹’과 순수한 본심과 자아를 잃어가고 있는 가엾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너’와 ‘나’는 또한 ‘전설 속의 승냥이', 승냥이다운 승냥이와 인간다운 인간을 꿈꾸는 존재, “비린 바람이 불 때마다” 초원을 그리면서 우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시는 승냥이답지 못한 승냥이와 인간답지 못한 인간을, 그러한 승냥이와 인간을 만들어낸 사회를 비판한 것이다.

이처럼 김영춘 시의 다른 한 갈래는 사회와 민족에 대한 관조의 시들이다. 「새의 죽음 앞에서」는 생태환경에 관심을 보인 시이고 「시골풍경」은 사회문제를 다룬 시이며 「편지」, 「마늘」, 「비 오는 날 성자산성에서」, 「또 백두산에 올라」, 「두만강은 별들의 집」, 「어머님 전상서」󰡕등은 뿌리와 민족에 대한 사고를 보여준 시들이다. 만약 제1부류의 자아관조의 시들이 슬픔이나 외로움과 같은 음성적인 감정을 읊조리고 있다면 제2부류의 사회적인 시들은 동일한 연장선에 놓여 대체로 과거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혈연중심의 사고로 일관하고 있다. 그것은 나르시시즘에 근거한 ‘나’를 주장하는 고집이 너무 세기 때문이 아닐까.…

김영춘 시의 세 번째 갈래는 가정을 가진 생활인의 자잘한 행복과 기쁨과 감동을 읊조린 시들이다. 여기에도 나르시시즘의 그림자가 옅게 드리워져 있는바, 그것은 주로 전통적인 사고에 반기를 든 현대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지아비와 자식을 위한 여성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현처와 양모는 모든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사항이었고 그것을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참고 견디는 것은 여성의 미덕이었다.

그러나 김영춘의 시에서 “미워해야 할 하늘을/ 사랑하는 건/ 땅의 비애”라는 인식은 “땅”으로 지칭되는 여성의 소중함, ‘나’의 소중함을 인식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의 삶은 궁극적으로 자기 찾기의 삶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의 나르시시즘은 부정해야 할 것만은 아니다. 더욱이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전제로 한다면.

……
내가 여위어지고
아기가 커가는
아프면서 예쁜 여행인줄
젖 먹이는 순간마다
조용히 행복하게 느낀다

-젖 먹이는 순간마다

엄마가 되는 길은, 여위어가는 아픔을 동반한 것이라는 인식은, 전통적인 모성으로서의 절대적으로 희생적인 모성과는 구별되는 자리에 놓여 있다. 아기 앞에서도 나 자신의 희생을 의식하고 나 자신을 완전히 잊을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애기 엄마 되던 날” 엄마가 보고 싶은 것 역시 “포근한 숨소리”로 대변되는 엄마의, ‘나’를 향한 사랑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그리고 ‘남편’은 험한 세상에 꿈을 향한 여행을 하다가 상처를 입게 되면 기대는 포근한 안식처이며 시인의 꿈을 싣고 무작정 날아오르는 연줄을 잡아주고 있는 손이다. ‘남편’으로 대변되는 가정은 꿈을 향한 출발점이 되고, 꿈이 좌절되었을 경우 돌아와 쉴 수 있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언제나
마음 시리면
맨 먼저 떠오르는 산

문밖에서 웃으며 숨기던 설움도
그 품에서 와- 터뜨리며
허물어진 나도 내맡기는
나만의 온돌방

먼 훗날엔 남의 편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내 가까이서 숨쉬는
나만이 읽어낼 수 있는
신비한 생명의 책

-남편

자아, 가정, 사회의 순서로 이루어진 세 개의 부동한 반경을 가진 동심원이 김영춘 시의 부동한 영역을 이룬다. 그리고 자아연민, 자아도취와 자신심이 얽혀 김영춘 시의 안과 밖을 이룬다는 생각이다. 문학은 ‘슬픈 얼굴을 한 하느님’으로서 어두운 현실을 확대해석하는 바, 김영춘의 시에 자신감과 자아도취보다는 자아연민이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단순함 속에 복잡함이, 나약함 속에 도고함이, 자아연민 속에 자아도취가 살아 숨쉬고 상처 입고, 꿈을 잃어 가면서도 부단히 꿈을 찾아가는 이가 시인이고 김영춘씨다.

별 하나에 꿈 하나 깃들어 있다면 시 하나에 이야기 하나 깃들어 있는 것이 김영춘의 시다. 「환멸」에는 “시냇물 사이 두고 꿈 얘기 나누던” “그해 5월의 달밤”이, 「열쇠」에는 “크고 작고 은빛 나고 금빛 나는” 이야기들이 “조롱조롱 달려” “숨쉬고” 있다. 그리고 비 온 뒤 ‘불현듯 하늘에 솟아오른 무지개’와 그에 맞먹는 경이로움을 선물한 그 누군가의 "예쁜 전화", 그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은 「어느 가을날 오후」라는 시에 각인되어 있다. 지나간 일들과 감수들을 쉽게 잊어버리는 나에 반해, 자잘한 감동과 아픔의 순간들을 꽁꽁 가슴에 여며두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면서 시로 빚어내는 친구 영춘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시들은 그 자신이 겪었던 아름다운 생명의 순간들에 다다르는 문, 조금은 열려지고 조금은 가리어진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그마한 일에도 기쁨을 느끼고 가슴 깊이 간직하며 오래된 일들의 세부와 언행까지 속속들이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감수성과 기억력의 문제를 떠나서 우선 자기를 무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점에서 나르시시즘은 아름다운 자기 내면의 발견이고 표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방적이고 배타적인 나르시시즘은 독이 되고 가시가 될 수도 있다. ‘나’로 가득 찬 그릇에는 다른 그 무엇을 담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애는 시인친구의 시가 있게 된 원천이고 동력이면서 동시에 시의 넓이와 깊이를 제약하는 틀이 될 수도 있다면 억단일 것인가. 다행한 것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아름다운 볼우물을 가꿔온 시인이, 그 대가로 이마에 주름살이 늘게 된 것을 오래전에 이미 발견하였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보다 유연한 사고로 보다 크고 깊고 넓은 세계를 담은 시가 씌어질 날도 멀지 않은 것이다.


승화와 초월은 시와 시인의 존재이유라고 하였다. 시란 부족한 현실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지혜이고 방편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영춘이가 “시에 취해 살”고, “시 쓰는 일이 조금도 대단하지 않음을” “뒤늦게 깨닫고 슬피 울”면서도 언제까지라도 시 쓰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친구인 나는, 그가 먼저 행복한 생활인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속됨이 나로 하여금 시인을 말하면서 시를 말하고, 시를 말하면서 시인을 말하게 하였다. 혹시 시인의 가까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시인과 시를 혼동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과 시가 명확히 구별되는 일은 과연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2005년 8월 23일, 낙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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