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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남 시인 략력 및 관련내용

  • 김영춘
  • 조회 7455
  • 기타
  • 2007.01.29 13:13
1. 문창남 략력 및 관련내용

략력

조선족시인, 작가. 필명은 문암, 바위

1944년 1월 15일 길림성 길림시에서 출생
1967년 연변대학 중문학부 졸업
1967년- 1977년 반혁명분자의 루명을 쓰고 옥중생활
1979년  1991 년 길림시 《도라지》 잡지사 편집
1991년부터 중국 창녕그룹 선전부 부장
1996년 7월 6일 하북성 진황도시에서 간암으로 별세

중국 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리사, 중국 소수민족작가학회 리사

대표작으로 서정시 《도라지》, 수필 《동집게》 , 중편소설 《옥중비사》  등이 있음.

2. 문창남문집 출간에 깃든 일화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친지들이 자체로 모금하여 작가의 문집을 출간하여 내놓은 례는 거의 없었다. 문창남씨의 문집은 작가의 문하인이고 제자인 안영수씨에 의해 출판되였다.

금년에 38살에 나는 안영수씨는 길림성 교하사람이다. 일찌기 문학에 남다른 애호가 있었으며 연변대학 중문학부에 입학하여서는 문창남시인을 마음속의 스승으로 정하였다.

그 리유는 안씨가 교하에서 소수민족이라는 리유로 멸시를 받으며 자라온것과 문창남씨의 작품은 언제나 민족의 얼을 지키고 민족과 전통의 우수성을 지켜가려는데 기본 사상이 있어 공명을 얻었다는것이다. 그러던 어느 방학에 자기가 쓴 수필을 가지고 문창남시인을 찾아 갔다. 그 만남에서 시, 수필에 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 진실성, 폭과 깊이가 있는 선생의 작품세계와 더불어 한없이 호방한 그의 성격에도 매료되였다.

이때로부터 스승으로 모시고 작품의 지도를 받기도 하고 일상의 문제들에 대해서 서로 열띤 토론도 하였다.

안영수씨가 대학을 졸업한후 교하의 교원으로 배치 받았으나 문창남은 그를 당시 자기가 편집으로 있는 길림 《도라지》잡지사에 근무시키려 한다. 안영수를 보고 길림 어디도 좋으니 호구만 옮겨 놓으라고 《명령》한다. 충실한 제자인 안씨가 각고의 노력끝에 몇달만에 길림학교 교원으로 호구를 옮기고 문창남을 찾아갔는데 그때 문창남은 창녕그룹으로 이적하느라 이사준비가 한창이였다. 그래서 다시 선생을 따라 창녕그룹으로 가서 문창남의 비서로 근무하게 된다.

문창남은 이때 창녕에서 그룹 회장인 석산린의 가정을 모델로 조선족의 이민사, 투쟁사, 개척사를 망라하는 12부 작의 력사대하소설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러던 1996년 문창남은 간암 확진을 위해 1년전 회사를 그만둔 안영수를 찾아 북경에 온다. 그때 안영수씨가 롱담으로 간암이 아니다. 만약 선생이 세상을 뜨게 되면 내가 선생의 전집을 만들어 드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해 7월 문창남선생이 간암으로 세상을 뜰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리하여 안영수씨의 롱담은 진담으로 되고 늘 마음속으로 스승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였다고 한다.

그후 안영수씨는 사업이 순탄치 않아 방황하게 되며 다시 한국 성균관대학에 류학의 길에 오른다. 그때 그는 한국의 언론재단을 통해 가급적 비용부담이 없이 전집을 출간할 계획을 세웠다가 그것이 스승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립장을 바꾸어 자체로 출간하기로 마음 먹었다. 근 2년간의 자료 확보, 고증끝에 스승의 별세 10주년을 맞으며 문창남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후원회를 조직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문집으로 세상에 내놓게 되였다.

3. 문창남선생에 대하여

문단에서는 문창남선생이 창녕그룹으로 자리를 옮기자 작가로서 붓을 꺽고 기업총수의 일가를 형상하는 어용문인으로 전락되였다는 설, 및 창녕을 그만둔 리유에 대한 억측과 설이 란무하였다.

안영수씨가 곁에서 근 2년 함께 일하며 묵격한 바로는 문창남선생은 절대로 그렇게 개인의 가족사나 써서 아부하며 살아갈 인간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우연한 기회에 석산린씨를 알게 되고 여러번 만나 담화하는 과정에 서로의 마음이 맞게 되였다고 한다, 석산린씨와 해후에서 알게된 바로는 옥중생활을 같은 시기 같은 감옥에서 하였다는것. 당시에는 서로 몰랐지만, 문선생이 석씨를 만났을 당시 석씨는 기업이 상승일로를 거듭하는때라 기업의 홍보와 개인의 홍보가 필요했고 민족의 발전사를 력사대하적인 소설로 쓰기를 갈망하던 문선생으로서는 석씨의 가정 환경, 이민사, 감옥살이, 기업창설, 성공 등 일로가 중국조선족 근 100여년 이민사의 주인공으로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모델로 한 소설을 쓰기 위해 창녕으로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흰돐이라는 제목으로 력사소설 1, 2권을 쓰게 되였다. 그러나 문단의 전반적인 생각은 아직도 미묘한것이 사실이다.

그에 안받침하듯이 문창남선생이 창녕을 그만두게 된 원인, 병마에 시달리며 쓴 근 70만자에 달하는 원고를 창녕측에서 내놓지 않은 리유, 이번 문집출간도 이미 통보를 받아 알고있음에도 창녕에서 협조가 없는 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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