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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철학 반칙의 미학 /서영빈

  • 김영춘
  • 조회 7612
  • 기타
  • 2007.04.07 11:38
말의 원류를 따라서②

              바람의 철학

                        반칙의 미학

                                          *서영빈


    ≪Gone with the wind≫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다. 미국 작가 미첼의 장편 력사소설로서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급변하는 사회상과 인간의 애정갈등을 활기 있게 다룬 소설인데 소설보다는 영화로 더 유명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한국어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번역되었고 중국어로는 외자로 된 ≪飘≫로 번역되었다. “나붓기다, 휘날리다, 날려가다”는 뜻의 이 단어가 소설제목으로 이렇게 안성맞춤일 수가 없다. ≪随风而去≫라는 제목으로 얼마든지 직역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자는 굳이 ≪飘≫라는 단어를 썼다. 제목만 보면 꼭 중국인이 중국어로 쓴 작품 같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소설이 영화화된 후 영화제목은 ≪乱世佳人≫으로 번역한것이다. 소설은 몽롱한 랑만이 필요하고 영화는 직설적인 자극이 필요해서일까? 아무튼 소설로나 영화로나 모두 성공한 작품이다.

    ≪Gone with the wind≫라는 제목은 미국 시인의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한국어 제목을 대할 때마다 늘 엉뚱하게도 “바람은 정말 사라지는것인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바람”이란 단어를 중국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문제가 되는것은 “바람이 불다”에서의 바람이 아니다. 그건 쉽게 이해가 되는데 “바람이 들다, 바람이 나다. 바람을 맞다, 바람을 잡다, 바람을 넣다, 바람을 피우다”와 같은 관용표현들은 쉽게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특히 “바람을 피우다”는 표현에 대해서는 언제 봐도 영 탐탁치 않는 눈치다. 그게 왜 바람과 연관이 되느냐 하는것이다. 정 난감할 때는 “중국말에도 풍류(风流)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그게 왜 바람과 관계가 없느냐”하고 억지를 부려보기도 하지만 사실 나 스스로도 왜 그것이 하필이면 바람인지 수긍이 잘 안 간다. 그래서 이참에 바람과 외도의 관계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되였다.

    바람의 속성은 일단 흐른다는데 있다. 겨울바람이 강추위를 몰고 다니며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던가 싶게 훈훈한 봄바람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흘러가지 않는 바람이란 없다. 한곳에 얽매어 있는것이라면 그건 이미 바람이 아니다. 패션바람도 흘러 지나고 나그네의 바람기도 시간이 지나면 흘러가버리게 된다.

    다음은 바람의 향방이 일정치 않다는것이다. 어느 곳에서 바람이 일지, 어느 쪽으로 바람이 불어갈지 누구도 장담을 못한다는것이다. 럭비공이라고나 할까? 누구는 바람의 이러한 속성을 자유혼이라고도 이름지어줬지만 늘 예상을 빗나가게 하는것이 바람이다. 평소에 근엄하고 점잖던 사람들이 늦바람에 기둥뿌리 뽑히는걸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누구한테서 바람이 터질지, 그리고 그 바람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바람의 다른 한가지 속성은 형체가 없는데도 흔적을 남긴다는것이다. 바람을 본 사람은 없지만 바람을 믿지 않는 사람도 없다. 봄바람은 그냥 흘러지나가는것이 아니라 나뭇가지에 새움을 틔워주고 처녀들의 가슴을 부풀려놓으며 태풍은 그동안 애지중지하며 소중히 일구어놓은 인간세상의 문명을 잔인하게 쓸어버리기도 한다. 남녀간의 바람도 어떤 형식으로든 그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적게는 봄바람처럼, 많이는 태풍처럼.

    주변에서 가끔 바람에 몸을 맡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함께 오래 지내다보니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한다는 식으로 은연중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장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세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두둑한 배짱이다. 나그네 팬티에서 마누라 머리카락보다 열배나 긴 머리카락이 나와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동네 사우나 탓으로 돌릴수 있는 두둑한 배포가 없다면 바람은 피하는 것이 좋다. 누가 뭐래도 얼굴색 하나 변치 않고 꿋꿋하게 말도 안되는 자기주장을 펼칠 정도는 되어야 풍류객 소리를 들을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소심해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신겁(腎怯)이 온다면 그것은 풍류객의 소질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스포츠를 즐기듯 여유작작하게 즐길수 있는 능력, 그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인 셈이다.

    둘째는 두둑한 배짱 못지않게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일상 언행이나 습관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말할것도 없고, 매일 집에 들어가기 전에 명함이나 휴대전화를 정리하는 일도 잊어서는 안되며, 친구나 회사 주변인들까지 철저히 관리할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전화를 아무 곳에나 두고 다니는 털털한 성격이라면 아예 포기하는 것이 현명할것이다. 일이 터진 다음에는 대범하게 대처하더라도 사건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특허가 바람인것 같다.

    셋째는 부지런함이다. 마누라한테서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게으른 성격의 친구들은 아예 외도와는 담을 쌓는 편이 바람직하다. 바람기가 다분한 친구일수록 마누라나 가족한테는 일점의 실수도 없이 모든것을 깔끔하게 처리한다. 마누라 생일이나 결혼기념일마저 챙기지 못하는 어설픈 선수라면 자신의 한계를 일찌감치 자각하고 냉수부터 마시는것이 좋다. 진짜 선수라면 마누라 생일과 애인생일이 같은 날이라도 점심과 저녁으로 나누어서 대처할수 있는 근면함을 보인다. 물론 그런 경우에는 흔히 마누라생일잔치는 점심에, 애인파티는 저녁으로 잡지만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세가지 특징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라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도 남음이 있을것이다. 그래서 “영웅호색”이란 말이 있는것이다. 영웅의 기질을 갖추어야 호색도 할수 있는것이다. 세가지 요건중 어느 한가지도 확실하게 장담할수 없는 나 같은 경우는 초능력의 그 “영웅”들이 그냥 존경스러울뿐이다.

    이처럼 바람이 영웅들의 특허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왜 하필이면 꼭 외도를 하는지 그 심리가 굉장히 궁금했다. 남들은 실천까지 하는데 영웅이 아니라고 생각도 못한다는 법은 없을테니까.

    그런데 언젠가 백두산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우연히 외도의 심리를 알아내게 되였다. 안내를 하는 젊은 량반이 길 량켠에 늘어선 사과배밭을 가리키며 “저 사과배는 어떻게 먹는게 가장 맛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던진적이 있다. 아무도 정답을 맞히지 못하자 조금은 쑥스러운듯이 멋적게 웃으며 “훔쳐먹을 때 가장 맛있지요.”했다. 모두들 박장대소를 하며 크게 공감했다. 왜 훔쳐먹는것이 사먹는것보다 더 맛있을까? 나는 거기에 반칙의 미학이 잠재해있다고 믿는다.

    훔쳐먹는다는것에는 먹어서는 안되는것을 먹는다는 의미와 남모르게 먹는다는 두가지 의미가 내재해있다. 이런 유머가 있다. 의사가 환자에게 어느 정도 식욕이 떨어졌는가고 묻자 환자가 하는 대답이 걸작이다. “의사선생님이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던 음식까지도 먹고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렇다. 사람은 흔히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며 금기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라면 더 먹고싶고,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면 더 해보고싶어지는것이다. 요즘 인터넷에는 여러가지 도촬사진이나 도촬비디오가 성행을 하는데 그게 다 인간의 이런 훔쳐보기심리를 반영하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훔쳐본다는것 역시 봐서는 안될것을 보는것이고 그것도 남모르게 은밀히 보는것이다. 이것을 필자는 반칙의 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거창하게 무슨 미학이냐고 할 독자가 있겠지만 사실 반칙에는 미학적인 쾌감이 뒤따른다. 경기장에서 이루어지는 반칙은 늘 경기의 한부분이 된다. 가장 유명한 반칙으로 우리는 세계적인 축구황제 마라도나가 잉글랜드와의 월드컵 경기에서 손으로 골을 넣어 아르헨티나 축구팀을 구한 사건을 기억한다. 일년의 시간이 흐른 뒤 잉글랜드에서 강연을 하면서 마라도나는 그때 골을 넣은것이 핸들링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고 “그건 나의 손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이었다”고 대답해서 다시 한번 세계적인 이슈가 되였었다. 해서는 안되는 반칙이지만 결과적으로 남의 눈을 속였을 때, 거기에서 오는 쾌감은 배가된다. 그것은 그 반칙의 과정에 스릴이 깔려있기때문이다.

    의도적인 반칙을 한다는것은 이런 스릴을 즐긴다는 말이다. 스릴이 있기에 거기에는 가슴이 뛰는 긴장감이 있고, 전전긍긍하면서도 끝내는 이루어냈다는 성취감이 있는것이다. 스릴이 있자면 저공비행처럼 아슬아슬할수록 좋고, 금기가 많을수록 쾌감도 커진다.

    책에서 본 이야기인데 유난히 바람을 많이 피워 안해를 무던히도 마음고생 시키던 한 선수가 있었다 한다. 그런데 그 안해가 병으로 사망하자 이 선수는 외도를 끊더라는것이다. 리유인즉 감추고 어쩌고 할게 없어져서 싱거워졌다나. 묘미는 역시 반칙에 있는것이다.

    렵색행각으로 치자면 아마도 카사노바를 따를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것이다. 15세에서 45세에 이르기까지 30년동안 무려 100여명의 녀성을 정복했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 때문에 그는 호색한의 대명사처럼 되여버렸다. 혹 우리 사회에도 그까짓 백명쯤이야 하고 나설 영웅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돈으로 성을 사거나 완력을 사용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면 아마 상대할 선수가 별로 없을줄 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성적 열등감에 사로잡혀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열등의식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집요하게 새로운 상대를 찾아나서게 했다는것이다.

    참, 영웅도 영웅나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영웅소질을 갖고 있지 못함에 절이라도 해야할까보다.


---------연우미디어 http://www.ckywf.com/ 명사미니홈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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