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과 6월, 희망을 여는 사람들, 안티조선, 노사모,
개혁국민정당 그 후에는
현대 우리의 역사 그것도 1980년 이후의 역사적 과정을 보면 정말 눈코뜰새 없는 세월이었던 것 같다. 역사적 과정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던 그렇지 않은 범인이건 어느 누구라도 한국 땅에서 살아가기에 역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고 그렇기에 역사와 정치에 무관하다고 하는 범인들의 정치적 관심도가 어느 나라보다도 월등히 높은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렇듯 눈코뜰새 없는 상황이야말로 우리 스스로를 옥죄는 이유 중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남과 북, 영남과 호남, 세대와 세대간, 주변국들과의 불협화음 등.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야말로 어쩌면 그 불화로 같은 상황을 잘 살아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바쁜 일상을 바르게 보는 것 또한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다지 많은 허수를 두고 살고 있지 않은 듯하다. 참 다행하고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와중에서 필자도 간간히 현장을 따라 살다보면 스스로 무슨 역사적 사명에만 충실한 때를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때도 많다. 그러나 돌아보면 여전히 평범 이하의 삶에서 허우적 거리는 자신을 돌아다 보게 되는 순간, 긴 한숨을 쉬게 된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할라치면 금세 어떤 특정한 운동단위 혹은 역사적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간 순간 놀라서 뒤돌아선다. 평범 이하의 삶이라도 지켜내기 위해서는 정점의 블랙홀 같은데 너무 깊이 빠져들까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그 블랙홀 같은 상황에서 몰래 도망치듯 빠져 나오다가 그때마다 그 단위의 새로운 면면들을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더러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더러는 기쁨에 넘쳐 왜 내가 돌아서려는가 안타깝기도 하다.
그런데 여전히 자문하는 것은 아래 추미애 의원과 같은 사유 때문이다.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이 진실을 향하고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이지만, 여전히 전면적으로 옳은가, 전면적으로 타당한가에 대한 질문은 부재한 듯한 상황들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민의정부 탄생을 위해서 몇몇이 모여 <희망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단체 아닌 단위의 사람들이 모여 잠시 잠깐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을 자임할 만큼 큰 역사적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네티즌 단위의 최소한의 역할은 <노사모> 이전 경험의 한 축은 된다고 생각한다.
후일 잠시 스쳐가듯 참여했던 몇몇은 지금도 여러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아는 사람들만 알고 또 당시 구성원들 조차 무의미하게 잊어버렸는지도 모를 그런 불안한, 아니면 끈이 없는 단위였던 모양이다. 오늘날 <노사모>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눈에 띄게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는 대비되는 부분이 있다.
아무튼 그후로도 안티조선 활동, 노사모, 개혁당 등에서 무언가를 도모해 보지만 여전히 대책없이 빠져드는 그런 느낌은 답답하다. 전망할 창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그런 느낌 속에서 스스로 절망하다, 그래서 개혁과 진보를 생각하는 사람들 틈에서 관중처럼 구경하다,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그런 꼴이다.
자기를 버리면 일원이 되는 것은 쉬우나 자신을 버리면 모든 것이 버려지는 그런 일은 없는가? 생각하게 된다. 개혁과 진보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까지 논리의 사슬 속에서 자기를 세우려고 억지 논리를 세울 때는 없는가?
내가 구세력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잣대를 나에게는 적용시켜 보았는가? 신주류로 편입해 들어가는 동지들, 아니 이미 신주류화된 동지들, 그대들은 또다른 소외의 한축이 보이지 않는가? 그대들의 어깨를 꼈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사라진 사람들을 보기를 기대하며...
오늘 추미애 의원의 <무명>이란 시를 접하며 그 답을 보낸다. 추미애 의원과 사랑하는 나의 동지들, 그리고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게으름없이 살아야만 가능한 것을>이란 나만의 독백처럼...
무명
無明 세상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잘 들을 수 있는 도구가 많은데도
잘 볼 수 있는 기계가 많은데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고
無明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들을 줄 아는 지혜가 부족하고
볼 줄 아는 眼目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빛의 속도를 달리는 첨단문명 시대라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無明 세상이라 할 것입니다.
無明을 깨고 싶은 여러분과
마음과 생각이 통하는 공간을 열어가고자 합니다.
(추미애 의원 홈페이지 인사말)
게으름없이 살아야만 가능한 것을,
바쁜 세상
변화가 빠른 세상일수록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지혜로운 것을
변화에 잘 적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을
사람들은 변화가 빠르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움직여 일어난 변화에는
안주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일으킨 변화에
오래도록 기쁨을 나누고 있다보면
또다른 변화에 적응해야할
자신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는 듯합니다.
그 정점에서
또다른 변화의 부름을 읽어내고
길 가려는 사람이
오늘에도 여전히
외롭고 가슴 시린 아픔을 경험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어느 시기에는 지켜야할 가치가
더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어느 시기에는 자신이 올려세운 것을
부정해야만 더욱 가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저 억지와 진정이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답답해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무언가?
혼란스럽다.
쉽게 말하지 그러는가?
그러나 우리 스스로 쉽지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개혁국민정당 그 후에는
현대 우리의 역사 그것도 1980년 이후의 역사적 과정을 보면 정말 눈코뜰새 없는 세월이었던 것 같다. 역사적 과정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던 그렇지 않은 범인이건 어느 누구라도 한국 땅에서 살아가기에 역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고 그렇기에 역사와 정치에 무관하다고 하는 범인들의 정치적 관심도가 어느 나라보다도 월등히 높은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렇듯 눈코뜰새 없는 상황이야말로 우리 스스로를 옥죄는 이유 중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남과 북, 영남과 호남, 세대와 세대간, 주변국들과의 불협화음 등.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야말로 어쩌면 그 불화로 같은 상황을 잘 살아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바쁜 일상을 바르게 보는 것 또한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다지 많은 허수를 두고 살고 있지 않은 듯하다. 참 다행하고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와중에서 필자도 간간히 현장을 따라 살다보면 스스로 무슨 역사적 사명에만 충실한 때를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때도 많다. 그러나 돌아보면 여전히 평범 이하의 삶에서 허우적 거리는 자신을 돌아다 보게 되는 순간, 긴 한숨을 쉬게 된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할라치면 금세 어떤 특정한 운동단위 혹은 역사적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간 순간 놀라서 뒤돌아선다. 평범 이하의 삶이라도 지켜내기 위해서는 정점의 블랙홀 같은데 너무 깊이 빠져들까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그 블랙홀 같은 상황에서 몰래 도망치듯 빠져 나오다가 그때마다 그 단위의 새로운 면면들을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더러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더러는 기쁨에 넘쳐 왜 내가 돌아서려는가 안타깝기도 하다.
그런데 여전히 자문하는 것은 아래 추미애 의원과 같은 사유 때문이다.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이 진실을 향하고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이지만, 여전히 전면적으로 옳은가, 전면적으로 타당한가에 대한 질문은 부재한 듯한 상황들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민의정부 탄생을 위해서 몇몇이 모여 <희망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단체 아닌 단위의 사람들이 모여 잠시 잠깐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을 자임할 만큼 큰 역사적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네티즌 단위의 최소한의 역할은 <노사모> 이전 경험의 한 축은 된다고 생각한다.
후일 잠시 스쳐가듯 참여했던 몇몇은 지금도 여러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아는 사람들만 알고 또 당시 구성원들 조차 무의미하게 잊어버렸는지도 모를 그런 불안한, 아니면 끈이 없는 단위였던 모양이다. 오늘날 <노사모>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눈에 띄게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는 대비되는 부분이 있다.
아무튼 그후로도 안티조선 활동, 노사모, 개혁당 등에서 무언가를 도모해 보지만 여전히 대책없이 빠져드는 그런 느낌은 답답하다. 전망할 창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그런 느낌 속에서 스스로 절망하다, 그래서 개혁과 진보를 생각하는 사람들 틈에서 관중처럼 구경하다,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그런 꼴이다.
자기를 버리면 일원이 되는 것은 쉬우나 자신을 버리면 모든 것이 버려지는 그런 일은 없는가? 생각하게 된다. 개혁과 진보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까지 논리의 사슬 속에서 자기를 세우려고 억지 논리를 세울 때는 없는가?
내가 구세력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잣대를 나에게는 적용시켜 보았는가? 신주류로 편입해 들어가는 동지들, 아니 이미 신주류화된 동지들, 그대들은 또다른 소외의 한축이 보이지 않는가? 그대들의 어깨를 꼈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사라진 사람들을 보기를 기대하며...
오늘 추미애 의원의 <무명>이란 시를 접하며 그 답을 보낸다. 추미애 의원과 사랑하는 나의 동지들, 그리고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게으름없이 살아야만 가능한 것을>이란 나만의 독백처럼...
무명
無明 세상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잘 들을 수 있는 도구가 많은데도
잘 볼 수 있는 기계가 많은데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고
無明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들을 줄 아는 지혜가 부족하고
볼 줄 아는 眼目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빛의 속도를 달리는 첨단문명 시대라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無明 세상이라 할 것입니다.
無明을 깨고 싶은 여러분과
마음과 생각이 통하는 공간을 열어가고자 합니다.
(추미애 의원 홈페이지 인사말)
게으름없이 살아야만 가능한 것을,
바쁜 세상
변화가 빠른 세상일수록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지혜로운 것을
변화에 잘 적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을
사람들은 변화가 빠르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움직여 일어난 변화에는
안주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일으킨 변화에
오래도록 기쁨을 나누고 있다보면
또다른 변화에 적응해야할
자신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는 듯합니다.
그 정점에서
또다른 변화의 부름을 읽어내고
길 가려는 사람이
오늘에도 여전히
외롭고 가슴 시린 아픔을 경험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어느 시기에는 지켜야할 가치가
더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어느 시기에는 자신이 올려세운 것을
부정해야만 더욱 가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저 억지와 진정이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답답해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무언가?
혼란스럽다.
쉽게 말하지 그러는가?
그러나 우리 스스로 쉽지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