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다.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도 절망을 하소하는 것도
날마다 날마다
그렇게 나에게 속삭였던 지난 날을 아우성치던 나를 본다.
내가 나를 보며 낯설은 이날
이날 나는 진정으로 나를 볼 여유를 조금 갖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들여다 본다는 것
참으로 조심스럽다.
스스로를 들여다 보는 것이 형벌일 수도 희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희망이라고도 절망이라고도 하지 않으리라.
난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40이 되고 41세를 목전에 두고 낯설은 나를 용서한다.
낯설은 나를 용서하고 나는 나를 끌고 나의 뒤를 조용히 뒤 따르며 살고자 한다.
웃음을 찾았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나를 들여다 보는 횟수가 늘었으니 즐거울 법도 하다.
그러나 웃음보다 그늘진 사색이 나를 거느리고 있다.
그늘진 사색속에서도 그 어느때보다 많이 웃고 있다.
쓸쓸한 거리의 낙엽처럼 흩날리는 웃음기를 보여주고 있다.
깊은 산중의 암중모색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하늘을 날고 있는 새처럼 고독한 평화, 고요로운 날개짓을 세차게 세차게
저 바다 깊이 헤엄치는 물고기떼,
그들의 자유와 그들의 끈기처럼 주도적이며 점진적으로 나를 찾아야 하리.
오늘이나 어제나 나의 나에게 나를 용서하라 말하고 싶다.
어제의 그늘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오늘이 그늘이라도 그렇게 살고 싶다.
천천히 천천히 속박 속의 나를 해체시키며 아니 절로 해체되기를
그렇게 자유롭기를 바란다.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도 절망을 하소하는 것도
날마다 날마다
그렇게 나에게 속삭였던 지난 날을 아우성치던 나를 본다.
내가 나를 보며 낯설은 이날
이날 나는 진정으로 나를 볼 여유를 조금 갖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들여다 본다는 것
참으로 조심스럽다.
스스로를 들여다 보는 것이 형벌일 수도 희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희망이라고도 절망이라고도 하지 않으리라.
난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40이 되고 41세를 목전에 두고 낯설은 나를 용서한다.
낯설은 나를 용서하고 나는 나를 끌고 나의 뒤를 조용히 뒤 따르며 살고자 한다.
웃음을 찾았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나를 들여다 보는 횟수가 늘었으니 즐거울 법도 하다.
그러나 웃음보다 그늘진 사색이 나를 거느리고 있다.
그늘진 사색속에서도 그 어느때보다 많이 웃고 있다.
쓸쓸한 거리의 낙엽처럼 흩날리는 웃음기를 보여주고 있다.
깊은 산중의 암중모색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하늘을 날고 있는 새처럼 고독한 평화, 고요로운 날개짓을 세차게 세차게
저 바다 깊이 헤엄치는 물고기떼,
그들의 자유와 그들의 끈기처럼 주도적이며 점진적으로 나를 찾아야 하리.
오늘이나 어제나 나의 나에게 나를 용서하라 말하고 싶다.
어제의 그늘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오늘이 그늘이라도 그렇게 살고 싶다.
천천히 천천히 속박 속의 나를 해체시키며 아니 절로 해체되기를
그렇게 자유롭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