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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국이라해서 문화까지 후진적이진 않다

  • 김형효
  • 조회 3063
  • 2005.09.05 21:37
- 말달리는 고구려 장수가 나타날 듯한 광활한 벌판, 장춘(長春)

   
 
 
사진은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선집 중 시선집표지입니다.
또한 소수민족으로서 그들이 생존을 위한 체제에 순응하는 의미로 읽혀지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헌례 도서라는 것은 고개를 갸웃이게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중국내 소수민족들의 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 입니다.

나는 짙게 깔린 안개가 걷히고 비구름 속으로 스며든 비행기에서 여전히 낯선 대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한다. 한치 앞의 하늘도 보이지 않는다. 참담한 시야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찔함, 그 자체였다. 옆 좌석에 앉은 이와 한참을 침묵하며 바라보다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고 함께 있는 사람과 침묵하고 길을 가거나 함께 오랜 시간 버티고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미가 발동한 것이다.

간단한 통성명을 하고 난 뒤부터 예상하지 못한 깊은 대화를 이어간다.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의 말을 듣는다. 김진호 선생은 이미 여러 차례 외국 여행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근무한 경험까지 풍부한 분이었다. 또한 중국도 수차 방문한 경험이 있는 사업가였는데, 낯설음에 대한 편차 혹은 편견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특히 인상적으로 들렸던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동남아권의 후진국들이 문화적인 부분까지 꼭 후진적이지는 않다는 말씀이다. 경제적으로 낙후할 지언정 그들이 간직한 문화적 구조가 결코 후진적이 아니며 그들의 생활관습 속에서 훨씬 더 성숙된 문화적 자양이 자라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또한 문학적 측면과 문화예술의 다양한 범주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고통과 억압의 현실적 어려움을 능히 극복해나가며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더욱 풍부한 문화적 사유를 누리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문화 속에 깊은 사색과 통달한 사유의 경지조차 엿보이는 부분까지도 독서를 통해서 체험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들이 객관적인 증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근거 있는 이야기라 생각되었다.

선생께서는 인도네시아 언어를 배웠고 인도네시아에서 다년간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특히 인도네시아의 문학작품들은 뛰어난 사유를 던져 주었다한다.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원서(原書)를 읽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통변하였다. 두 시간 여의 비행 끝에 만주벌의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끝없이 펼쳐지는 비행기 안에서의 바깥 풍경, 도리질치는 내 가슴에 격정적으로 밀어 올려지는 뜨거운 심장, 말달리는 고구려적 장수가 어김없이 나타날 듯한 광활한 벌판, 나란하게 줄지어선 민가들, 긴 이랑 같은 도로들, 잘 경작된 듯 보여지는 푸른 밭들, 그 한가운데 평원 속으로 비행기가 착륙한다.

대지를 만끽할 수 있는 모습을 보며 왕룽일가의 처절한 농토의 입가 눈물 속의 깊은 침묵 안으로 비행기가 착륙하고 있구나! 탄성을 지르게 된다.

그렇게 비행기는 무사하게 착륙하였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환승절차를 밟고 있던 바로 그때 문제가 생겼다. 검색대를 통과하자마자 공항의 안전요원들이 날 불러 세운다. 짐 가방을 개봉하라는 것이다.

책은 다행스레 시집(詩集)이라고 한자로 써서 필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컴퓨터를 두고 우리 돈으로 15만 원 상당 <중국돈 960위엔>의 관세를 지불하라는 것이다. 참으로 허망하게 큰 액수다. 연길에 있는 시인들을 믿는 구석이 많아서 여유있게 금전을 준비하지 못했으며 실제 그럴 처지도 못되는 것이다. 참으로 걱정이다. 사실 인천공항에서 20만 원을 환전해서 1,200위엔을 가지고 중국 땅을 밟았는데 이건 날벼락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진호 선생의 도움으로 짐 값을 추가로 지불하지 않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세계화를 부르짖고 빠른 속도의 경쟁 시스템에 익숙한 것도 중요할 지는 모르지만 주변과 함께 어우러지지 못하면 그것도 별반 무소득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환승 과정에서 공항이용권을 두 번이나 지불해야 하는 까다로움, 그리고 100위엔의 지출, 2인 평균 60㎏미만이면 무료란 사실을 알고 있는 김진호 선생의 도움을 받아 일부 짐을 김진호 선생 짐이라고 해서 함께 실은 것이다. 참으로 믿을 것은 동족 밖에 없나보다.

무거운 가방을 가벼운 마음으로 들고 타기로 했다. 실은 책가방이라 무겁기가 한정 없었다. 다행히 바퀴가 달린 여행용 가방이니 끌고 탈 수 있어서 좋았다. 다시 검색대를 통과한다. 조심스럽다. 검색대 위에 올려진 가방! 재차 검색대를 통과시키란다. 또 무슨 트집인가? 긴장한다. 그러나 그냥 무사 통과다. 지은 죄(?)도 없이 안도의 한숨이다. 실은 경제적 여유가 없는 탓인 것을…

이곳 장춘은 잠시 지나가는 길이다. 이곳은 리삼월(본명 리경희)이란 시인이 출생한 곳이다. 그는 1933년 출생하여 1954년부터 창작활동을 시작해서 시집으로 <황금가을>, <두 사람의 풍경> 등이 있고 현재 연변작가협회 이사이며 중국내 소수민족작가협회 상무이사를 역임한 바 있다. 세계시인대회와 세계한민족문학인대회 참석차 한국에도 수 차례 다녀간 적이 있으며 <천지문학상> 등의 문학상을 10여 차례 수상한 중국내 조선족 시단에 널리 알려진 분이다.

그럼 여기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로 하자.


천지의 물


에서 머나먼 천리밖
백두산 천지에서 길어온 물을
꽃병 하나 가득 채우고
망울진 나리꽃 한송이 꺾어 꽂았네

꽃병의 물은 줄어들고
꽃은 망울을 터쳤네

선인들 정화수 한그릇 떠놓고
신령님께 소원성취 빌었듯
망울이 꽃으로 필 때까지
몇날 며칠을 줄곧
나도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렸네

끝내 천지에서 길어온 성수는
목이 긴 정교한 꽃병에서
백두산의 혼불이 타고있는 듯
우리 민족의 얼을 꽃으로 피웠네


1998년작


갈대 4


쌀쌀한 가을이 오면
갈대는 나무처럼 잎을 떨구어
몸을 흩뜨리지 않고
마른 잎을 흔들면서
여름의 몸짓대로 서걱거린다

말라서 빛깔이 변한 잎은
목청이 더 높아지고
죽음으로 가면서
성숙되는 갈대는
온몸이 뼈로 굳어져
가을에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1994년


체온


빈자리에 앉으면
갓 떠난 사람의 체온이
온몸에 스며든다

약수로 전해진 것도 아니고
부부간에 나누는 것도 아니고

썰렁한 무궤도 전차안
따스하고
감미로운
생소한 사람의 체온

몽롱한 알의 꿈을 깨치고
덥혀진 마음의 둥지속에
색다른 야릇한 인정을 낳는다


1991년 10월 12일


순박한 안목으로 쓰여진 시편들이다. 그의 눈매가 느껴지는 것은 특별한 수사를 동원한 작품이 아니라, 한결같이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메신저의 모습을 하고 잇다는 것이다. 순박하게 이야기 하고 차분하게 느끼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그는 장춘 출생으로서 유일하게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인으로 지난해 간행된 시선집에 이름을 올린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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