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군 병사는 밭에 김을 메고, 나는 봉오동전적지를 찾고
소낙비가 쏟아졌다. 두만강 건너 북녘산하, 산봉우리마다 먹구름과 안개가 뒤덮여 있었다. 북한쪽 두만강 다리 밑에서는 북한군 병사들이 줄지어 늘어선 채 밭에 김을 메고 있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시내구경을 하기로 했다. 계속 소낙비가 쏟아져 백화 상품점에서 우산을 구입했다. 김영춘 시인이 한사코 우산 값을 치르겠다고 해서 그리했다. 미안한 일이다. 사실 백화상품점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의 평범한 수퍼마켓 수준이다.
잠시 후 도문에 있는 신화서점을 찾았다. 서점 풍경이 궁금해서 일부러 서점을 찾은 것이다. 한참을 둘러 구경을 했다. 두만강 근처라서 그런 것인지 아무래도 한글로 된 책이 유난히 많았다. 김영춘 시인이 한사코 김성휘 시인의 시집을 선물하겠다고 책을 들이밀어 계산대에 값을 치렀다.
지난해 한국에 찾아왔던 두 여성 시인을 장급 여관을 잡아주고 안내를 해준 적이 있다. 그 품앗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인 것 같아 감사히 받았다. 도문에서 처음 맞는 점심시간이다. 계속 특별한 대접을 하고 싶어하는 시인을 보며 필자는 어쩔 줄 몰라한다. 내가 너무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닌가 안타까운 것이다.
김영춘 시인은 도문 사람이면서도 도문 길이 어둡다. 오늘도 여전히 길눈이 어두운 시인을 보면서 천상 시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시인은 잡스런 기억에서 자유롭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길눈이 밝은 필자는 아직도 여전히 먼 시인인 것 같다. 마침 식당을 찾아 불고기에 45°배갈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45°배갈은 난생처음 맛보는 것이다. 더구나 낮에 마시는 술이다. 거나하게 취기가 돈다.
붉은 얼굴을 한 채, 먼저 숙소를 정해놓고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적비를 찾아 길을 떠나기로 했다. 점심식사도중 연길 조용남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잃어버렸던 멜가방을 찾았다는 것이다. 냉면집에 식사하러 갔을 때 식당의자에 단단히 묶어두었다고 했다. 너무 기뻐서 웃음도 나고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다시 없던 기쁨이 되어왔다.
식사가 끝나고 인터넷 방에서 그 동안 찾지 못했던 홈페이지를 검색하고 이메일을 검색하였다. 또한 몇몇에게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문명의 성공이 이런 것인가 하는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인터넷 방에서는 커피한잔 값으로 3위엔을 받았다. 인터넷 한시간 사용료는 2위엔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치면 330원 정도 하는 돈이다. 허름한 여관의 숙박비는 15위엔이란다. 그러나 낯선 여행지에서의 불안함은 허름한 여관에서 마음놓고 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게 걱정하는 것을 아는 것인지 여관 종업원은 다른 곳을 안내해 주었다. 값싼 여관을 찾는데도 여전히 길눈이 어두운 김영춘 시인 덕을 본다. 도문시내를 샅샅히 훑고 지나게 되는 것이다. 목적지가 나올 때까지 정처없이 걷는 것이다. 간간히 사진촬영을 해가면서.
그곳은 참으로 깨끗했다. 이제는 요금이 비싸다. 한국돈으로 3만원 정도, 그러나 중국의 화폐가치로 치면 식당 종업원 한달 월급의 30% 수준이다. 200위엔에서 80위엔으로 숙박비를 흥정하여 깎은 다음, 숙소로 정했다. 중국의 건설은행 초대소다. 우리나라에 시중은행의 연수원이라고 생각하면 될법하다. 그러니 규모나 시설면에서 그런 대로 괜찮은 곳이다. 이번에도 김영춘 시인이 여관비를 계산하겠다고 해서 이번 만은 안된다고 말렸다. 중국에 사는 시인으로서는 너무나 큰 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 김 시인도 동의하여 계산을 마치고 봉오동으로 향했다.
봉오동은 도문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편이 좋지 않았다. 대로변에 버스길까지 거리가 있어서 타고 간 택시기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목적지까지 함께 가게 되었다. 가는 길 오는 길 시내구간과 달라서 40위엔을 지불하였다. 봉오동 전적비가 있는 곳은 아늑한 공원 같은 풍광을 보여주었다. 전적비가 있는 앞쪽으로는 넓다란 호수가 있었다. 사실 호수라기보다 공원에 정원수같이 낮은 곳에 고요한 모습으로 발아래 놓여져 있다.
마치 상위에 접시물 같이, 다시 도문으로 돌아왔다. 숙소를 향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 수박을 한 통 샀다. 5위엔 80각 그러니까 한국돈으로 900원 정도다. 돌아와서 수박을 잘라 한 조각씩 나누어 먹고 김영춘 시인은 오늘 내내 안내원 노릇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고, 필자는 이내 한국 집에 전화를 걸었다.
시간은 오후 네 시가 조금 지났다. 샤워를 하고 잠을 청했다. 오후 일곱 시쯤에 깨어 저녁식사를 한다. 소고기국물에 밥한공기, 배추김치, 노란 좁쌀이 섞인 쌀밥을 먹었다. 음식마다 금액이 따로 지불된다. 일종의 주문식단제라고 할까? 반한공기(米飯)2원, 소고기국 5원, 합이 7위엔이다. 우리 돈으로 1000원이 조금 넘는다. 우리나라에 소고기국밥쯤 되려나, 한국에서는 1000원으로 엄두도 못낼 일이다.
맑은 소고기 국물에 밥공기 가득 담겨진 밥그릇을 비웠다.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는 조선족, 그의 부인도 조선족이다. 어려운 처지임에도 고국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 반기면서 식사비를 5위엔만 받는다. 로바도 그의 부인도 조선족으로서 긍지를 갖고 있음을 느낀다. 아주머니는 그의 남편인 로바보다도 더 우리말을 능숙하게 했다.
소낙비가 쏟아졌다. 두만강 건너 북녘산하, 산봉우리마다 먹구름과 안개가 뒤덮여 있었다. 북한쪽 두만강 다리 밑에서는 북한군 병사들이 줄지어 늘어선 채 밭에 김을 메고 있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시내구경을 하기로 했다. 계속 소낙비가 쏟아져 백화 상품점에서 우산을 구입했다. 김영춘 시인이 한사코 우산 값을 치르겠다고 해서 그리했다. 미안한 일이다. 사실 백화상품점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의 평범한 수퍼마켓 수준이다.
잠시 후 도문에 있는 신화서점을 찾았다. 서점 풍경이 궁금해서 일부러 서점을 찾은 것이다. 한참을 둘러 구경을 했다. 두만강 근처라서 그런 것인지 아무래도 한글로 된 책이 유난히 많았다. 김영춘 시인이 한사코 김성휘 시인의 시집을 선물하겠다고 책을 들이밀어 계산대에 값을 치렀다.
지난해 한국에 찾아왔던 두 여성 시인을 장급 여관을 잡아주고 안내를 해준 적이 있다. 그 품앗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인 것 같아 감사히 받았다. 도문에서 처음 맞는 점심시간이다. 계속 특별한 대접을 하고 싶어하는 시인을 보며 필자는 어쩔 줄 몰라한다. 내가 너무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닌가 안타까운 것이다.
김영춘 시인은 도문 사람이면서도 도문 길이 어둡다. 오늘도 여전히 길눈이 어두운 시인을 보면서 천상 시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시인은 잡스런 기억에서 자유롭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길눈이 밝은 필자는 아직도 여전히 먼 시인인 것 같다. 마침 식당을 찾아 불고기에 45°배갈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45°배갈은 난생처음 맛보는 것이다. 더구나 낮에 마시는 술이다. 거나하게 취기가 돈다.
붉은 얼굴을 한 채, 먼저 숙소를 정해놓고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적비를 찾아 길을 떠나기로 했다. 점심식사도중 연길 조용남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잃어버렸던 멜가방을 찾았다는 것이다. 냉면집에 식사하러 갔을 때 식당의자에 단단히 묶어두었다고 했다. 너무 기뻐서 웃음도 나고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다시 없던 기쁨이 되어왔다.
식사가 끝나고 인터넷 방에서 그 동안 찾지 못했던 홈페이지를 검색하고 이메일을 검색하였다. 또한 몇몇에게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문명의 성공이 이런 것인가 하는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인터넷 방에서는 커피한잔 값으로 3위엔을 받았다. 인터넷 한시간 사용료는 2위엔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치면 330원 정도 하는 돈이다. 허름한 여관의 숙박비는 15위엔이란다. 그러나 낯선 여행지에서의 불안함은 허름한 여관에서 마음놓고 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게 걱정하는 것을 아는 것인지 여관 종업원은 다른 곳을 안내해 주었다. 값싼 여관을 찾는데도 여전히 길눈이 어두운 김영춘 시인 덕을 본다. 도문시내를 샅샅히 훑고 지나게 되는 것이다. 목적지가 나올 때까지 정처없이 걷는 것이다. 간간히 사진촬영을 해가면서.
그곳은 참으로 깨끗했다. 이제는 요금이 비싸다. 한국돈으로 3만원 정도, 그러나 중국의 화폐가치로 치면 식당 종업원 한달 월급의 30% 수준이다. 200위엔에서 80위엔으로 숙박비를 흥정하여 깎은 다음, 숙소로 정했다. 중국의 건설은행 초대소다. 우리나라에 시중은행의 연수원이라고 생각하면 될법하다. 그러니 규모나 시설면에서 그런 대로 괜찮은 곳이다. 이번에도 김영춘 시인이 여관비를 계산하겠다고 해서 이번 만은 안된다고 말렸다. 중국에 사는 시인으로서는 너무나 큰 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 김 시인도 동의하여 계산을 마치고 봉오동으로 향했다.
봉오동은 도문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편이 좋지 않았다. 대로변에 버스길까지 거리가 있어서 타고 간 택시기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목적지까지 함께 가게 되었다. 가는 길 오는 길 시내구간과 달라서 40위엔을 지불하였다. 봉오동 전적비가 있는 곳은 아늑한 공원 같은 풍광을 보여주었다. 전적비가 있는 앞쪽으로는 넓다란 호수가 있었다. 사실 호수라기보다 공원에 정원수같이 낮은 곳에 고요한 모습으로 발아래 놓여져 있다.
마치 상위에 접시물 같이, 다시 도문으로 돌아왔다. 숙소를 향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 수박을 한 통 샀다. 5위엔 80각 그러니까 한국돈으로 900원 정도다. 돌아와서 수박을 잘라 한 조각씩 나누어 먹고 김영춘 시인은 오늘 내내 안내원 노릇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고, 필자는 이내 한국 집에 전화를 걸었다.
시간은 오후 네 시가 조금 지났다. 샤워를 하고 잠을 청했다. 오후 일곱 시쯤에 깨어 저녁식사를 한다. 소고기국물에 밥한공기, 배추김치, 노란 좁쌀이 섞인 쌀밥을 먹었다. 음식마다 금액이 따로 지불된다. 일종의 주문식단제라고 할까? 반한공기(米飯)2원, 소고기국 5원, 합이 7위엔이다. 우리 돈으로 1000원이 조금 넘는다. 우리나라에 소고기국밥쯤 되려나, 한국에서는 1000원으로 엄두도 못낼 일이다.
맑은 소고기 국물에 밥공기 가득 담겨진 밥그릇을 비웠다.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는 조선족, 그의 부인도 조선족이다. 어려운 처지임에도 고국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 반기면서 식사비를 5위엔만 받는다. 로바도 그의 부인도 조선족으로서 긍지를 갖고 있음을 느낀다. 아주머니는 그의 남편인 로바보다도 더 우리말을 능숙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