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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북방에서 민족이 아프다

  • 김형효
  • 조회 3279
  • 2005.09.05 21:45
- 조선족이 조선말을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건설은행 초대소에도 어둠이 짙어간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는 장춘에서 온 한족출신 전기공들 대 여섯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연변텔레비전방송국을 시청한다. 요청한마당이라는 청소년퀴즈대결프로그램을 시청하였다. 중간중간 어린 시절에 불리던 민요풍의 노래가 귀에 익숙하게 들려온다. 방송이 끝날 때 들려지는 애국가와는 다른 느낌이다. 마치 애국가 보다 더 깊이 심중을 울리는 민족적인 느낌의 노래란 생각이 든다.

<진달래 피고 새가 울면은 두고두고 그리운 사랑~, ~>, 일기예보 도중에 연주되는 <나에 살던 고향은> 또한 얼마나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서정적인 노래인가? 참으로 은은한 곡조란 생각을 하게 된다. 노래하는 가수의 간드러지는 자태에 그의 음성이 덧보태지는 탓(?)이다. 연변방송국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은 참으로 낭랑하다. 곱게 차려입은 한복을 입은 가수들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다.

잠시 후 자리를 비웠던 로바 최아무개 선생이 돌아왔다. 여관비를 아직 정산하지 않은 상태여서 여관비를 정산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로바(지배인)로 일하는 조선족 최아무개 선생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낮에 마신 술 탓인지 머리가 멍하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말을 붙이고 사무실에 함께 앉았다. 그가 다니던 학교이야기며 그 동안 살아온 인생역정을 편하게 이야기 나누었다. 그는 한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말을 잘 못한다며 조금은 미안하다는 투다. 지금 조금씩 배우고 있으며 일부러 학원에 가서도 배웠다고 했다.

조선족이 조선말을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가 하는 말이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독립운동, 해방운동은 흩어진 겨레의 자기정체성을 살려주는 우리말 회복하기부터인가 생각되었다. 과연 나의 이런 생각은 비약일까? 그래서 그는 하나뿐인 아들은 조선족 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다행히 그의 아내는 조선말과 글을 잘 이해하고 읽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들의 공부도 돌봐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나이는 42세란다. 그의 동생들은 한국의 여행사에 근무하고 있기도 하고 다른 직종에서도 일한다고 했다.

그는 오늘이 건군80주년, 중국 공산당80주년 기념일이라고 말하며 중국의 체제에 대해서 지나치듯 그 나름에 믿음과 확신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모택동에 대해 말했다. "그의 마음이 좋다. 가난했어도, 가난해도 지금 서른 이상이 된 사람들은 그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를 존중하고 존경한다. 그의 사상은 좋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북한도 개방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재 국경의 현실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두만강변에 수많은 북한인들이 강을 넘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하고 그들이 강을 건너와 하는 일들이란 몸을 팔거나 음식점에서 일을 하거나 해서 야반도주의 세월을 살고 있는 이야기를 세세히 해주었다. 참 예쁜 얼굴들이란다. 우리의 가요방과 다른 변형된 가요방(한국의 단란주점)에서 돈을 벌어간다는 것이다.

잠시 후 사천성에서 와 건축자재를 판매하는 일을 한다는 중국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중국 땅에서 왔고 중국인이라지만, 실상은 흡사 아랍인과 같은 모습을 하였다. 그는 최 선생과 내가 서로 이야기를 하는 데 대해 어떻게 알아듣느냐고 최 선생에게 묻는다고 했다. 최 선생은 내가 하는 말을 천천히 하면 알아듣는다고 말하고 자신과 같은 민족이란 사실을 이야기 해주었다고 다시 내게 일러준다. 이제 최 선생이 그 사천사람과 나의 통역이 된 것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사천성에서 온 사람에 말에 의하면 이곳 도문에 사는 한족 사람들은 자신의 말도 잘 못 알아듣는다고 했다. 사천성 사업가와 짧은 필담을 나누었다. 사실 필담이 아니라 한자체에 대해 서로 이해하는 수준이었다. 간체와 우리가 쓰는 한자어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간체자가 일반화된 중국에 대한 것, 그리고 사천의 상인은 최 선생에게 간체자가 세 차례나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내게 전해줄 것을 청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통도(通道)라고 쓰며 자신이 도로건설 하는데 자재를 파는 사업가임을 밝혔다. 내가 시인(詩人)이라고 쓴 것에 대한 화답이다.

밤 12시 30분이다. 최 선생에게 두만강변에 함께 나가보자고 청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옆방에 한족들이 술을 마시러 간 상태라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사양했다. 하는 수없이 잠을 청해야 했다.

아래 시는 두만강 일대를 안내해준 김영춘 시인의 시입니다. <여름날의 독백>의 의미를 함께 생각하면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최근 개설한 두만강 시회 홈페이지에 보내준 원고 중 한편의 시를 먼저 소개합니다. 두만강 시회는 중국내 조선족 시인들이 새롭게 결성한 시회(동인회)입니다. 홈페이지는 지금 공사중입니다.(http://www.sisarang.com/dumangang/yeonb)

여름날 독백


머리 빗다 흰머리 발견한 아침
뜨락에 나서서 한식경 서성거렸다

믿을수 없는건 꿈인가
꽃밭의 풀이나 뽑아야지

무지개에 오르려 허둥지둥 뛰는동안
가슴 가득 풀만 자랐구나

뽑아도 또 자라나는 흰머리처럼
하늘 향한 환상도 새에 대한 미련도
지울수록 생생히 살아나겠지만

이제는 꽃을 피워야 하는 때
누구보다 더 많은 눈물로 땀으로
여름날의 향기 빚어야 하는 때
허리 굽히고 머리 숙여
꽃밭의 풀을 뽑아야 하는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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