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위에 아기가 그림 그리는 평화가 있는 풍경을
작은 것에 대해서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행복할 것이다. 아니 그 감동의 물결을 느끼며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주변조차 행복해질 것이다.
낯선 땅,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보고 낯선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이 사는 모습 그리고 다른 언어들, 낯설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관습적인 것들에 대한 낯설음 말이다.
필자가 처음으로 김경희 시인을 본 것은 2000년 여름, 심양에서 연길로, 연길에서 다시 용정을 거쳐 북녘의 회룡을 지척에 두고 있는 두만강을 따라 택시로 이동해가며 두만강변에 도착했을 때다. 그때 필자는 두만강 중국 쪽에서 내 마음을 모아 돌 하나를 북녘 두만강가로 던져 보냈다. 나는 돌 하나를 우리의 통일 조국 북녘 땅에 보탠 것이다.
강가에서 소를 모는 어린 북녘 동무를 보며 말 한마디 건네고 싶었지만, 안내를 맡은 시인들이 주의를 주어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고 그만 두었다. 바로 그때쯤이다. 두만강 대교가 있는 국경에 두 여성 시인이 나와 있었다. 특별하게 차려 입지는 않았지만 너무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물론 이 두 여성 시인은 앞서 소개한 김영춘 시인과 김경희 시인이다. 두 시인을 가르쳐 주신 조용남 선생과 권철 교수님, 같은 문우인 권순진 시인 등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더없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도무지 어디가 중국이고 북한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 갈라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답답해왔다. 하지만 어쩌랴! 사실 그 동안 작품으로 김경희 시인을 만나보았지만, 그렇게 긴밀하게 아는 바는 없었다. 두만강 주변의 다실에서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여름날의 무더위를 식혔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일 년 만에 만나는 시인이 너무나 바쁘다. 김경희 시인이 바쁜 것은 우리네 한국의 어머니들이 바쁜 이유와 다를 바 없다. 대학에 진학할 학생을 둔 어머니의 마음이다. 중국은 9월에 학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7월에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른다.
그런데 김경희 시인의 딸이 매번 작문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았었는데 이번에는 그 자신이 독창성을 발휘해서 인정받으려는 욕심을 부렸는데 선생님들이 그것을 이상하게 해석한 모양이라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의욕이 화를 불렀다면 안타까워한다. 중국에서도 내신성적에 따라 주요 대학에 응시할 자격을 준다고 했다.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는 시인이지만, 항상 그의 차림새에서는 그런 빛을 찾아볼 수 없이 검소하다. 생활의 검소함을 따라 시적 서정도 검소한 것일까?
<눈 내리는 겨울 밤>을 읊조리는 시인은 은연중 사랑을 뽐내고 있는 듯하다. 가슴 속 깊은 사랑을 간직한 그녀의 남편을 자랑삼은 것인지 아니면 친구나 동료의 옛사랑의 그림자를 추적하다 잡힌 기억인지 알 수 없으나 분명 이 사랑의 주인공은 부러움에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다. "눈 내리는 겨울 밤/난/사랑을 배워요"라고,
눈 내리는 겨울 밤
어둔 밤
하얀 옷깃의 사나이는
말 없이 날 스쳐가요
사락 사락 내리는 눈
감미로운데
바람은 자는데
이러면 안되지
사나이는 그랬어요
겨울이 추울수록
눈은 따스하다구요
사랑이 머무는 곳에
잔디는 푸르렀어요
가지마다 탐스런
눈 뜨는 소망 보았어요
어쩌면 세상엔
저처럼 속 깊은 사나이도 있나요
저토록 폭 넓은 가슴도 있나요
눈 내리는 겨울 밤
난
사랑을 배워요.
시 <락조를 보며>를 읽고 필자는 농담을 한 마디 던지고 싶어진다. "락조를 보며//아름다운 여인은/쉽게 수줍음을 탄다네" 아니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이라니, 사실 김경희 시인은 무늬만 여성(?)인지 모를 정도로 외형상 거칠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는 그런 거친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면 모성으로 무장된 깊이만큼 거칠어 보이지만 깊은 그런 사랑을 보여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수줍음이란 단어가 사전에서 사라져 갈지도 모르리 만큼 오늘날 여성의 수줍음은 대면하기 힘들다. 오히려 당당하고 힘이 넘치는 것이 미덕인 사회가 아닌가?
그런 탓에 연길에서도 점차 수줍은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어질 듯하다. 그러나 아직 연길에서는 그 수줍은 붉은 얼굴을 볼 수 있다. 연길에 나이든 어른들의 입에서 요즘 누가 수줍어할 줄 아는가 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 사는 여성과는 다른 것이 사실이다.
김경희 시인은 그런 수줍음을 아름답다고 노래하고 있으니, 페미니즘의 물결을 이루고 있는 관점에서 보면 구태의연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명과 문화의 변화 과정에 맞추어 보면 그냥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으리라. 그것을 순박한 미덕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중국을 다녀오는 여행객이든 사업가이든 이제 그들의 순박하고 수줍은 미소를 더 이상 더럽히지 않기를 바란다.
락조를 보며
아름다운 녀인은
쉽게 수줍음을 탄다네
예로부터 미녀는
박명하다 했다네
그녀가 돌아져간
빈 자욱마다엔
수줍음이 꽃잎처럼 돋혀있다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아름답다고 한다네
먼 먼 날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네.
죽음을 목전에서 체험한 시인의 모습을 잘 투영해주고 있다. 바로 아버지의 죽음이다. 그 모습을 담담하게 써낼 수 있는 시인 김경희, 바로 그 담담하고 굳센 마음가짐을 통해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지는 꽃이 왜 아름다운지 인제 알겠다"는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담담하게 죽어가는 아버지 곁에는 담담하게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시적화자(시인)가 있는 것 아닌가?
지는 꽃 앞에서
지는 꽃이
왜 이토록 가슴치는지
인제는 알겠네
살아오는 동안
아름다웠던 속사정이
이슬처럼 꽃잎에 돋히네
사라지는 그날까지
웃는 모습이네
한점 그늘도 없다네
떠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담담했다네
지는 꽃이 왜 아름다운지
인제는 알겠네.
눈 내리는 날이다. 연길에는 얼마전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한 치 앞을 편안하게 걸음 걸어갈 수 없는 폭설이 내린 그날도 시인은 <풍경>을 보았을까? 눈 위에 아기가 그림 그리는 평화가 있는 풍경을, 갈라진 조국의 남·북에서 외세의 거친 입 때문에 조바심치는 민족을 생각하며 동심의 세계 속에 자신이야말로 참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풍경의 잔혹함>을 떠올리며 그의 눈 길이 하늘 가로 향한 것은 아닐까?
눈 내리는 날
하얀 눈이였다
눈위에
아기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얀 꿈이였다
아기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있었다
머리위로
새들이 날아가고
아기의 눈길이
하늘가로 비껴가고 있었다
하얗게 비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쳐서 어머니를, 어머니를 떠올렸을까?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목이 말라서 시인은 그렇게 갈라진 조국과 흩어진 민족의 환영을 떠올리며 오늘도 하루를 아프게 살고 있지는 않을까? 필자는 그에게 편지를 쓰듯 말하고 싶다. 강하든 약하든 일단은 건강하게 살아주는 것이 그 아픔을 잘 달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그것이 바로 시인이 찾는 잔디밭이고 행복한 그림자가 아니겠느냐고,
어머니
아프면 떠올리는
하늘이 있다
목마른 이에게
청신한 아침처럼
지치면 시름없이
누워도 좋은
잔디밭이 있다
해빛하나 넘겨주고
대신 젖어있는
행복한 그림자가 있다.
그렇게 잘 견디고 살다보면 하루 하루 동면의 잠에서 깨어나는 것들이 있듯이 우리의 삶에도 희망의 <봄 바람>이 찾아 불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언 가슴이 녹아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찾아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이제 시인은 <봄 바람> 안에 있다. 그래서 그의 눈 가득이 "맑은 것이 고이리라" 믿어 보는 것이다. 우리 민족과 우리의 조국이 밝은 희망의 <봄 바람>에 깃드리라고!
봄 바람
새벽 단잠이 든
아기 어깨를
살랑살랑 흔들다가
귀에 대고
살며시
이름 부르다가
꼬옥 품어 안아 일으키는
녀인의 입가엔
미소가 어리고
손 내미는 거지 흘겨보았다고
여린 아기 종아리 아프게 치는
녀인의 눈가엔
맑은 것이 고인다
언가슴 녹이는
바람이 불어오고
나무를 나무로 키우는
바람이 불어온다.
김경희 약력 : 중국 길림성 도문시에서 출생,61년 생,97년도에 단편<허공멜로디>가 <은하수>잡지에 발표되면서부터 작품활동을 시작, 시 수필 소설 80수 발표,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국조선족 여성 시인회 회원, 도문시 두만강 시회 회원, 도문시 국가 세무국 공무원.
작은 것에 대해서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행복할 것이다. 아니 그 감동의 물결을 느끼며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주변조차 행복해질 것이다.
낯선 땅,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보고 낯선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이 사는 모습 그리고 다른 언어들, 낯설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관습적인 것들에 대한 낯설음 말이다.
필자가 처음으로 김경희 시인을 본 것은 2000년 여름, 심양에서 연길로, 연길에서 다시 용정을 거쳐 북녘의 회룡을 지척에 두고 있는 두만강을 따라 택시로 이동해가며 두만강변에 도착했을 때다. 그때 필자는 두만강 중국 쪽에서 내 마음을 모아 돌 하나를 북녘 두만강가로 던져 보냈다. 나는 돌 하나를 우리의 통일 조국 북녘 땅에 보탠 것이다.
강가에서 소를 모는 어린 북녘 동무를 보며 말 한마디 건네고 싶었지만, 안내를 맡은 시인들이 주의를 주어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고 그만 두었다. 바로 그때쯤이다. 두만강 대교가 있는 국경에 두 여성 시인이 나와 있었다. 특별하게 차려 입지는 않았지만 너무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물론 이 두 여성 시인은 앞서 소개한 김영춘 시인과 김경희 시인이다. 두 시인을 가르쳐 주신 조용남 선생과 권철 교수님, 같은 문우인 권순진 시인 등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더없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도무지 어디가 중국이고 북한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 갈라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답답해왔다. 하지만 어쩌랴! 사실 그 동안 작품으로 김경희 시인을 만나보았지만, 그렇게 긴밀하게 아는 바는 없었다. 두만강 주변의 다실에서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여름날의 무더위를 식혔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일 년 만에 만나는 시인이 너무나 바쁘다. 김경희 시인이 바쁜 것은 우리네 한국의 어머니들이 바쁜 이유와 다를 바 없다. 대학에 진학할 학생을 둔 어머니의 마음이다. 중국은 9월에 학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7월에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른다.
그런데 김경희 시인의 딸이 매번 작문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았었는데 이번에는 그 자신이 독창성을 발휘해서 인정받으려는 욕심을 부렸는데 선생님들이 그것을 이상하게 해석한 모양이라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의욕이 화를 불렀다면 안타까워한다. 중국에서도 내신성적에 따라 주요 대학에 응시할 자격을 준다고 했다.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는 시인이지만, 항상 그의 차림새에서는 그런 빛을 찾아볼 수 없이 검소하다. 생활의 검소함을 따라 시적 서정도 검소한 것일까?
<눈 내리는 겨울 밤>을 읊조리는 시인은 은연중 사랑을 뽐내고 있는 듯하다. 가슴 속 깊은 사랑을 간직한 그녀의 남편을 자랑삼은 것인지 아니면 친구나 동료의 옛사랑의 그림자를 추적하다 잡힌 기억인지 알 수 없으나 분명 이 사랑의 주인공은 부러움에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다. "눈 내리는 겨울 밤/난/사랑을 배워요"라고,
눈 내리는 겨울 밤
어둔 밤
하얀 옷깃의 사나이는
말 없이 날 스쳐가요
사락 사락 내리는 눈
감미로운데
바람은 자는데
이러면 안되지
사나이는 그랬어요
겨울이 추울수록
눈은 따스하다구요
사랑이 머무는 곳에
잔디는 푸르렀어요
가지마다 탐스런
눈 뜨는 소망 보았어요
어쩌면 세상엔
저처럼 속 깊은 사나이도 있나요
저토록 폭 넓은 가슴도 있나요
눈 내리는 겨울 밤
난
사랑을 배워요.
시 <락조를 보며>를 읽고 필자는 농담을 한 마디 던지고 싶어진다. "락조를 보며//아름다운 여인은/쉽게 수줍음을 탄다네" 아니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이라니, 사실 김경희 시인은 무늬만 여성(?)인지 모를 정도로 외형상 거칠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는 그런 거친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면 모성으로 무장된 깊이만큼 거칠어 보이지만 깊은 그런 사랑을 보여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수줍음이란 단어가 사전에서 사라져 갈지도 모르리 만큼 오늘날 여성의 수줍음은 대면하기 힘들다. 오히려 당당하고 힘이 넘치는 것이 미덕인 사회가 아닌가?
그런 탓에 연길에서도 점차 수줍은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어질 듯하다. 그러나 아직 연길에서는 그 수줍은 붉은 얼굴을 볼 수 있다. 연길에 나이든 어른들의 입에서 요즘 누가 수줍어할 줄 아는가 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 사는 여성과는 다른 것이 사실이다.
김경희 시인은 그런 수줍음을 아름답다고 노래하고 있으니, 페미니즘의 물결을 이루고 있는 관점에서 보면 구태의연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명과 문화의 변화 과정에 맞추어 보면 그냥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으리라. 그것을 순박한 미덕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중국을 다녀오는 여행객이든 사업가이든 이제 그들의 순박하고 수줍은 미소를 더 이상 더럽히지 않기를 바란다.
락조를 보며
아름다운 녀인은
쉽게 수줍음을 탄다네
예로부터 미녀는
박명하다 했다네
그녀가 돌아져간
빈 자욱마다엔
수줍음이 꽃잎처럼 돋혀있다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아름답다고 한다네
먼 먼 날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네.
죽음을 목전에서 체험한 시인의 모습을 잘 투영해주고 있다. 바로 아버지의 죽음이다. 그 모습을 담담하게 써낼 수 있는 시인 김경희, 바로 그 담담하고 굳센 마음가짐을 통해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지는 꽃이 왜 아름다운지 인제 알겠다"는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담담하게 죽어가는 아버지 곁에는 담담하게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시적화자(시인)가 있는 것 아닌가?
지는 꽃 앞에서
지는 꽃이
왜 이토록 가슴치는지
인제는 알겠네
살아오는 동안
아름다웠던 속사정이
이슬처럼 꽃잎에 돋히네
사라지는 그날까지
웃는 모습이네
한점 그늘도 없다네
떠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담담했다네
지는 꽃이 왜 아름다운지
인제는 알겠네.
눈 내리는 날이다. 연길에는 얼마전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한 치 앞을 편안하게 걸음 걸어갈 수 없는 폭설이 내린 그날도 시인은 <풍경>을 보았을까? 눈 위에 아기가 그림 그리는 평화가 있는 풍경을, 갈라진 조국의 남·북에서 외세의 거친 입 때문에 조바심치는 민족을 생각하며 동심의 세계 속에 자신이야말로 참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풍경의 잔혹함>을 떠올리며 그의 눈 길이 하늘 가로 향한 것은 아닐까?
눈 내리는 날
하얀 눈이였다
눈위에
아기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얀 꿈이였다
아기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있었다
머리위로
새들이 날아가고
아기의 눈길이
하늘가로 비껴가고 있었다
하얗게 비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쳐서 어머니를, 어머니를 떠올렸을까?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목이 말라서 시인은 그렇게 갈라진 조국과 흩어진 민족의 환영을 떠올리며 오늘도 하루를 아프게 살고 있지는 않을까? 필자는 그에게 편지를 쓰듯 말하고 싶다. 강하든 약하든 일단은 건강하게 살아주는 것이 그 아픔을 잘 달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그것이 바로 시인이 찾는 잔디밭이고 행복한 그림자가 아니겠느냐고,
어머니
아프면 떠올리는
하늘이 있다
목마른 이에게
청신한 아침처럼
지치면 시름없이
누워도 좋은
잔디밭이 있다
해빛하나 넘겨주고
대신 젖어있는
행복한 그림자가 있다.
그렇게 잘 견디고 살다보면 하루 하루 동면의 잠에서 깨어나는 것들이 있듯이 우리의 삶에도 희망의 <봄 바람>이 찾아 불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언 가슴이 녹아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찾아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이제 시인은 <봄 바람> 안에 있다. 그래서 그의 눈 가득이 "맑은 것이 고이리라" 믿어 보는 것이다. 우리 민족과 우리의 조국이 밝은 희망의 <봄 바람>에 깃드리라고!
봄 바람
새벽 단잠이 든
아기 어깨를
살랑살랑 흔들다가
귀에 대고
살며시
이름 부르다가
꼬옥 품어 안아 일으키는
녀인의 입가엔
미소가 어리고
손 내미는 거지 흘겨보았다고
여린 아기 종아리 아프게 치는
녀인의 눈가엔
맑은 것이 고인다
언가슴 녹이는
바람이 불어오고
나무를 나무로 키우는
바람이 불어온다.
김경희 약력 : 중국 길림성 도문시에서 출생,61년 생,97년도에 단편<허공멜로디>가 <은하수>잡지에 발표되면서부터 작품활동을 시작, 시 수필 소설 80수 발표,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국조선족 여성 시인회 회원, 도문시 두만강 시회 회원, 도문시 국가 세무국 공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