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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기 싫은 민족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만남, 만남들

  • 김형효
  • 조회 4346
  • 2005.09.05 21:51
- 연길로 돌아와서 여행은 계속되었다
 

 
화룡 버스정류장에서 나는 버스를 갈아탔다. 대부분이 조선족 승객들이었다. 나는 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고·중학생들이 대화를 나눈다. 여학생과 남학생이다. 여학생은 이제 고·중학교 2학년이며 곧 3학년에 진급한다고 했다. 그의 친구는 한국의 안양예고에 다니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전해왔다고 말했다. 곁에 있던 남학생은 지금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위해 학교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연길역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내렸다.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나는 연길역에 도착하자마자 곧 조용남 선생님 댁을 향했다. 김문회 선생과 나눈 이야기, 그리고 선생의 안부를 전한 후 곧 밖으로 나왔다.

연변일보사에 김인선 문화부장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연변일보에 갔더니 김인선 부장이 이임원 편집국장을 소개하였다. 석화 형과 삼총사처럼 지냈던 옛적을 회고하였다. 셋이서 이야기를 잠시 나누며 명함을 교환한 뒤 식사를 함께 할 것을 청하였다.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연변일보사 앞에서 방문 기념촬영을 하였다.

문화부의 김화 기자까지 넷이서 양고기구이(뀀)집을 찾았다. 한국에서는 꼬치라고 불리는 음식점이다. 요리대나 음식의 종류가 좀 색달라 보였다. 특히 난생처음 맛보는 양고기는 참으로 부드러운 감칠맛이 감돌았다. 빙주라고 하는 빙천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금세 친숙한 분위기에서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여전히 우리의 대화에 중심 화두는 민족문제였다.

우리가 서로 대단한 민족운동가도 아니었지만, 민족간의 만남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도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하기 싫은 민족문제는 민족 내부 구성원간의 갈등에 문제였다.

한참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던 언론사 세무조사 문제와 연관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연변일보 이임원 편집국장이 전하는 조갑제 씨를 만난 나눈 이야기는 인정하기 싫은 민족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그가 전하는 데 따르면 '만약 김포국제공항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내린다면 특공대를 투입해서 그를 체포하여 구금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서로가 동의하는 민족적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한참 시간이 흘렀다.

간간히 석화 시인과의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내가 만난 연변사람들과 석화 시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벌건 얼굴을 한 채 나는 권순진과 만났다. 우정호텔(체신호텔) 커피숍, 한참을 이야기 나누며 일정에 대해 고민하다가 권순진이 정한 백운호텔로 숙소를 옮기고 다시 조용남 선생 댁에 들러 짐을 정리한 후 백운호텔에 머물 준비를 하고 짐을 풀었다. 호텔 길로 오가며 나는 연길 시내를 관통하며 흐르는 부르하통(버드나무)이라는 하천을 연결짓는 다리를 건넜다.

시내의 좋은 시설들의 바깥을 둘러보며 여러 모로 감회에 젖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숙소를 정한 후 서울과 연길시내 권철 선생님 등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식사는 우의스넥이라는 곳에서 떡국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서 여러 가지를 공상하며 지친 피곤함 속에서 잠을 청했다.

오늘은 이야기가 길어 한편의 시를 소개하고 다음 차례에 김문회 시인의 시편을 여러 편 소개하도록 하기로 하자.

아침의 동산

하늘가에
휑뎅그레
밋밋이
누워있는 동산에

하나 둘... 나타나는
사람의 그림자
귀뚜라미 우는 소리
잦아들고
소들의 새김질소리

어느 짐승의 목에 단
방울소리
들려오고...

해뜨면
분주스레 움직이는
풀가지들의 긴 그림자

바람이 시골현성의
검은 연기를 몽땅 실어온다.

아래 글은 화룡에 살고 있는 김문회 시인에 대한 감회를 적은 <시와 술과 선생님>이라는 석화 시인의 수필 중 일부이다. 김문회 선생님은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장사 등 갖은 어려운 일을 하셨던 분이다. 필자는 지난해 김문회 선생을 통해 러시아에서의 생활을 직접 이야기 들었다. 그리고 연변일보에 연재하였던 선생님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오마이뉴스 독자를 위해 그 글을 선생님께 청하였고 그 글을 써도 좋다는 답을 받았다. 나중에 따로 기회를 마련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단편적이 이야기를 그의 제자인 석화 시인의 글을 통해 보도록 하자.

"지금도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그 날 그때의 선생님 모습, 가뜬하게 깍은 머리 발에 넓은 이마와 하얀 얼굴에 맑고 그윽한 정서가 가득 고여 넘쳐 날 듯 한 커다란 두 눈, 그리고 스포츠맨처럼 균형이 잘 잡힌 미끈한 몸매, 그것도 그럴 것이 당시 선생님께서는 37세의 젊은 나이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한 글자 한 구절씩 나의 습작 시들을 찬찬히 보아주시었으며 그 사이 사모님께서는 따끈한 두부 모가 데워져 있는 주안상을 차렸습니다. 시와 술,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된 선생님의 가르침은 20살이라는 연령의 차이를 지워버리며 따스한 망년지교로 그리움에 그리움을 더하며 지금까지의 20년 세월을 넘어 오늘에 이어왔습니다.

조기천의 《흰 바위에 앉아서》와 뿌쉬낀의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그리고 장편서사시《백두산》과 《깝까즈포로》, 《예브게니 오네긴》… 당시 문화대혁명시절에는 어데서 듣지도 보도 못하던 주옥같은 시편들을 선생님께서는 가르쳐주시었으며 때로는 자신이 쓰신 시편들을 읊어주시었습니다.

70년대 중반기 당시의 중국은 주은래, 주덕, 모택동 등 나라의 수령들이 연이어 세상을 뜨고 이러저러하게 시국이 대단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나와 마주 앉아 시를 읊다가도 술잔을 잡으시고 한없이 깊은 우려와 근심을 토로하시었으며 인생과 사회와 시대에 대한 견해들을 구김 없이 이야기하여 주시었습니다.

시와 술과 인생과 시대… 선생님의 모든 것은 당시 17,8세 소년이었던 나의 가슴에 커다란 의미로 안겨왔으며 그 후의 나의 인생관, 가치관, 심미관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어느 하루 나는 신문사에서 일하는 친구 김인선 시인의 집에 갔었는데 그 친구가 매우 무겁고 침통한 어조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에게 어떻게 전해줄가 고민했는데… 선생님께서 모스크바에서 그만…》《아니 무슨 말이냐. 그러잖아도 요즘 쉬쉬한 소문 때문에 나도 속이 탄다. 쏘련에서 일이라 어디가 확인할 방법도 없고 나 참.》《그게 정말이라더라. 어제 출판사의 최사장님이랑 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분께서도 너무 훌륭한 동창생을 잃었다고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셨단다.》

《뭐야, 그래 그 소문이 정말이란 말이냐.》《그러기에 말이 아니냐, 옆에 있던 <청년생활>잡지사의 전 주필도 그렇다고 하더라.》《그렇다고. 그럼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어이구 선생님, 선생님…》이쯤 되어 인선이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팡팡 쏟으며 그의 집에 있던 BC맥주 한 상자를 몽땅 비워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야 임마, 더 가져와 더 가져오란 말이다. 그분이 그렇게 좋와하시던게 이 술이다!술! 더 못 가져올 테냐. 아이고 》라고 하면서 그의 집에 있던 백주, 포도주 아무튼 술이란 술은 다 털어 버리며 도대체 얼마까지 마셨는지도 모르고 꼬꾸라졌습니다.

며칠 후 작가협회 시분과에서 후사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토의하다가 이 모든 것이 헛소문이라는 것이 다시 알려졌고 또 그 며칠 후 전화에서《허 참, 내가 자네들 덕분에 방법없이 오래 살게 되었군. 그간 자네들이 나의 추도식이랑 준비하느라 바삐 보냈다면서 하, 하, 하》하는 명랑하고 통쾌한 선생님의 목소리를 직접 육성으로 듣게되어 최후로 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은 철저하게 깨끗이 끝나버렸습니다.

20여 년 전 그처럼 젊고 씩씩하시던 선생님도 세월의 비바람만은 어찌 할 수 없어 이젠 머리발이 하얗게 바래어졌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젊은 시혼 만은 그대로 타올라 처음 선생님을 만나던 날 나의 머릿속에 새겨진 그 깨끗한 모습처럼 언제나 맑고 넘치는 정열로 미끈한 시구를 엮어내고 계십니다.

선생님께서는 고맙게도 그 후 《겨울의 나무》 등 시 원고들을 나에게 보내주시어 문학방송프로그램으로 편집하여 방송하게 하셨으며 여러 문학지나 신문 등에 늘 기고하시어 자주 선생님의 글들을 읽게 하셔서 가슴은 언제나 뜨겁습니다.

선생님, 나의 선생님 이 은사님이 바로 지금 화룡시 문화국 창작실에 계시는 시인 김문회 선생님이십니다.

오늘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꽃과 별과 선생님》 이 노래의 후렴 구를 이렇게 바꾸어 불러봅니다.

아, 꽃과 별과 선생님
우리 선생님
선생님 고맙습니다

아, 시와 술과 선생님
우리 선생님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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