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베체슬라브씨는 2박 3일 동안 한 집에서 잠을 이루지는 않았으나 3일 동안 정성을 다해 먼 친척이나 고향 후배를 대하듯 편하게 해주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낯선 땅에서 새 길을 만들며 살아온 그의 아버지 세대에 이어 본인과 아들까지 여전히 낯선 얼굴로 살아가야하는 또 다른 조국 우크라이나다.
1945년 광복 이전에 캄차카라는 곳으로 이주했던 아버지 정인영이 그곳에 살던 우크라이나인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어머니는 바이칼 인근 끄라스노야스코의 플랜트 건설(завод строи)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다.
1955년 결혼한 그들 가족은 1959년까지 어머니 가족과 그곳에서 살았다 한다. 그곳의 고려인들은 1970년대 본격적으로 이주를 시작했는데 90%에 이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했고 나머지 10% 정도는 독립국가연합(CIS)의 다른 나라들로 이주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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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빠로쟈 드네프르강의 전투장면 오랜 과거 자빠로쟈를 흐르는 드네프르 강변의 전투장면을 형상화한 미술작품이다. 자빠로쟈 민속촌 인근의 박물관. | ⓒ 김형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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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의 보그단 흐멜린스키 장군 우크라이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러시아와의 형제동맹은 1991년 러시아에서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300년 동안을 러시아의 반식민지 상태를 가져왔다. | ⓒ 김형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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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단 흐멜릿스키
1846년 쉐브첸코 |
우리는 왜 보그단을 사랑했을까?
왜 모스크바 놈들은 그를 잊었을까?
바보 같은 독일 놈의 구두짝
위대하고 현명한 게티만이여.
*키예프 쉐브첸코 대학 한국어 학과장 김석원 교수 번역시
보그단 흐멜릿스키는(1595~1657년) 게티만이라 불리는 군대의 위대한 장군이라 한다. 그는 폴란드 대군을 격파하고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독자 독립이 어렵다고 판단 1654년 러시아 알렉세이 황제와 형제동맹 체결 후 300년 반식민 상태를 가져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쉐브첸코는 이 시에서 그를 경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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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의 2차 세계대전도 우크라이나의 어느 곳을 가도 전쟁의 아픈 상처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이다. 지방도시 외곽의 박물관에도 자신의 조국의 아픈역사를 기록한 미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크라이나 어디를 가도 잊지않고 기억하는 아픈 역사가 있었다. 우리의 강토에 일제의 아픈 흔적이 지워진 것과 참 비교되는 장면이다. | ⓒ 김형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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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빠로쟈 지역에는 당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어림짐작으로 2000여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는 텐베체슬라브씨도 사실 정확한 인원을 모른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빠로쟈(한국식으로 하면 광역자치도)라는 지역이 워낙 광범위하게 큰 지역이기 때무이다. 그도 자빠로쟈(소재지)시 거주인구를 중심으로 2000여명을 예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일에 종사하지만, 현지 우크라이나인들은 물론 다른 소수민족들도 고려인은 매우매우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평을 한다고 했다.
텐베체슬라브씨의 이야기는 개인사에서 자빠로쟈 지역의 고려인 문제로 이어졌다. 그는 고려인협회장으로 15년을 일해온 사람이다. 그래서 자빠로쟈에 살고 있는 고려인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현재가 절름발이처럼 불편스러운 것도 알고 있었다.
언어적 소통, 문화적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3년 동안 자빠로쟈 지역의 고려인들을 교육할 한국어 선생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코이카에도 요청하고 다른 방법으로도 지원요청을 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일이 성사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필자에게 어떻게 하면 코이카 한국어교육 선생이 올 수 있는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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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네프르강이 흐르는 자빠로쟈 댐 자빠로쟈 댐! 멈추지 않고 흐르는 드네프르강, 자빠로쟈의 동서를 잇는 주요 교량이다. | ⓒ 김형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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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최초의 민속촌 우크라이나 최초의 민속촌이라고 한다. 쉐브첸코라는 민족시인이 신을 믿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현실의 괴리일 뿐 진정 그가 신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인간의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신이 있었다. 오래된 성당이다. | ⓒ 김형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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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최초의 민속촌 민속촌 아래쪽으로 드네프르강이 흐른다. 저 멀리 자빠로쟈 댐이 보인다. | ⓒ 김형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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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받은 필자는 안타까운 생각만 들었다. 왜냐하면 우크라이나에서의 코이카 활동은 2011년 8월로 종료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로 두 달 전 대사관을 찾았을 때 대사관 최아무개 영사님의 고민을 들은 적도 있었다. 이곳의 고려인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이 지속될 필요성이 있는데, 코이카처럼 국가적인 차원의 프로그램이 종료되어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들을 어찌할 것인가? 국가가 내 동족이 실존하는 곳을 두고 바라만 보는 조국이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하니 더욱 안타깝다. 필자는 아쉬움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텐베체슬라브씨에게 질문했다. 정말 원하는가? 무엇을 어찌 답해야할지 주저하는 그에게 답을 내듯 질문을 만들어 제시했다. 문화, 언어를 배울 의지가 있느냐? 그는 주저 없이 그렇다는 답을 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대책 없는 제안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학생을 모아두면 장거리(기차로 6시간, 버스로 7시간)지만, 사무소에 허락을 받아 강의할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했다. 필자의 눈에도 자빠로쟈나 다른 지역 고려인들의 고충은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극심한 생활고는 없다. 민족이라는 연결고리를 놓고 생각할 때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언어, 문화, 풍습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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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라 신의 비서 올야(21세) 그녀는 대학을 갓 졸업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라 신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와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필자가 느낀 우크라이나 그리고 한국에서 보는 우크라이나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 ⓒ 김형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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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빠로쟈 지역 알렉산드라신(Александр Син, 49세)전 시장 자빠로쟈 지역의 자빠로쟈 시 전시장이다. 현재는 율랴티모센코블록(지역연합)의 지역당대표를 맡고 있다. | ⓒ 김형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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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이야기를 나눈 둘째 날 오전이었다. 텐베체슬라브씨의 안내에 따라 오전 11시 인근의 한 박물관을 구경한 후 우크라이나 민속촌을 찾았다. 그곳은 우크라이나 역사상 가장 먼저 생긴 우크라이나 민족을 대표하는 민속촌이라고 했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정말 협소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바라본 자빠로쟈의 댐은 정말 거대했다.
민속촌을 둘러본 뒤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고려인 중 주요 직위에 오른 고려인 중의 한 사람인 알렉산드라 신(49)씨를 찾았다. 그는 현재 자빠로쟈 광역자치 지역의 율랴 티모센코 블록(율랴 티모센코가 속한 지역연합)의 당대표다.
그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그는 주요 인사를 만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그의 사무실에서 비서 올야(21)와 지난 대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간 오마이 뉴스에 소개한 우크라이나 정치상황에 대한 기사를 보여주기도 했다.
알렉산드라 신은 율랴 티모센코 전 총리가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패배한 후 시의 요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현재 자빠로쟈에 지구당 대표로서 오는 10월 1일 실시되는 지방자치선거에 대비하고 있어 매우 바빴다. 알렉산드라 신(Александр Син)은 자빠로쟈 지역의 전 시장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