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이스크라씨 가족 이주사
김 이스크라(58세)씨는 3남 1녀 중 장녀로 1952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의 리타티아나(예명:타냐, 82세) 할머니의 이주사를 먼저 정리해야 할 듯하다. 할머니는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지팡이 신세를 지고 있지만, 지금도 정정하시다. 그래서 된장을 담그거나 고추장도 담가 먹기 때문에 우리네 식사 습관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필자가 방문했던 첫날 된장국을 차려준 것을 기억한다. 묵은 된장 맛이 일품이었으며 그곳에는 두부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에서 두부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먹어 본 사람도 있었으나 필자가 직접 먹어본 것은 우크라이나에 온지 16개월 만에 그날이 처음이다. 식사습관이 같다는 것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친근감을 더하게 하였다. 오로지 된장국 하나로도 만족스런 식사가 되었음은 두 말 할 나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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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남편 김형구(일명 행구)는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고향이 강원도 압다치인지 앞대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1929년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나 아홉 살 되던 해인 1938년 스탈린 치하의 강제 이주로 인해 타슈켄트로 이주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 이스크라씨와 3남을 낳아 길렀다고 한다. 김이스크라 씨가 첫째 딸이고 두 번 째 아들은 병들어 죽고 셋째 아들은 김게나(49세)씨로 김이스크라 씨와 함께 농사를 하고 있고 넷째 아들은 46세로 인근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1979년 50세에 홀로 되셨다. 그러나 할머니의 친형제들은 모두 의사로 모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 오빠들이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녀의 자랑이었다. 특히 그녀의 오빠 리 보리스표토르비치씨는 대학교수를 지냈다 한다. 러시아에서 의사가 되었고 나중에 한국가 수교가 된 후에는 한국인에게 침을 배운 또 다른 오빠는 침술에도 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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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자빠로쟈에 와서 침을 배워 많은 사람을 치료해주었던 또 다른 오빠 리 블라디미르 표트르비치(1935~2008년)라는 분에 대한 자부심이 큰 것으로 보였다. 그는 7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빠로쟈 시에서도 존경받던 인물이라고 한다. 그녀는 그가 살면서 많은 고려인들에게 힘을 주었으며 구심점이 되었음을 수차례 강조하였다. 특히 뽀치게(?)라는 병을 앓아 위기에 처한 자신도 오빠의 치료로 나았다고 한다.
그녀가 1998년 70세의 나이로 혼자 타슈켄트에 살기가 싫어 우크라이나 중남부 자빠로쟈로 이주해올 때 오빠의 도움으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대우자동차 자빠로쟈 공장이 들어서고 그녀의 오빠에게 대우자동차에서 누비라 자동차를 선물로 주었음을 자랑하였다. 82세의 할머니의 얼굴에서 어린 아이(?)의 오빠 자랑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야기 중 뜻밖의 동화 같은 아픈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 이야기는 김 이스크라 씨도 함께 앉아 듣고 있었다.
개 한 마리와 리타티아나 씨의 손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의 큰 아들이 아들을 낳았는데 정말 똑똑하고 영리하던 아이라고 한다. 그가 네 살 되어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져 생명을 잃었는데 그가 태어나던 해, 개 한 마리를 샀다고 한다. 아파트를 사서 아파트 4층으로 이사한 지 4년 째 되던 해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그 해는 누비라 자동차를 받은 지 4년째 되는 해이기도 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4자가 네 번 겹치는 일이라서 나중에 김 이스크라 씨가 한국에서 살면서 4자를 기피하는 이유가 그래서인가라고 물었다.
우연한 일이라고는 하나 예사로 들리지만은 않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그 아픔에 이어 그의 큰 아들도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홀로된 며느리가 고려인 농부들이 많이 살고 있는 헤르손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사실 할머니는 자신의 장녀인 김 이스크라 씨가 의사 공부를 하고도 농사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에 많이 마음 아파했다. 하루는 필자가 농사일을 쉬며 할머니와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하소연은 듣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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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김 이스크라가 소련 체제 붕괴 이전만 해도 의사로 일을 하였는데 이제 자식들을 바라보면 농사일만 하고 있음을 탄식했다. 지금도 많은 고려인들이 향수에 젖는 구소련체제를 필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 이민족인 고려인들이 어깨 펴고 살았었다는 사실을 이곳에 고려인들의 입을 통해서 확인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 김 이스크라 씨는 의사였다. 그녀의 외삼촌들이 의사였고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그녀도 그 길을 가고자 했었다. 그러나 그 길에서 벗어나 그녀는 지난 2006년부터 약 2년을 한국에 강남의 한 부잣집에서 일을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고급 식당에서 일을 도우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가 그곳에서 경험한 한국은 필자와도 다른 괴리감을 줄만큼 그녀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을 자랑삼는 것이 나쁠 일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이른바 강남 부자의 사고로 단단히 굳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여러 차례 강남에서 식모살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도 가정을 이루고 살며 자식을 키운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녀의 인식은 그 강남 부자에 대한 환상에 가까운 사고로 가득했다. 안타까웠지만 강제하여 의식을 교정할 수는 없다. 모두가 안락한 삶을 사는 것처럼 이해하는 그 단순함을 나쁘다고도 할 수 없었고 그곳에 한 부자가 그녀에게 베푼 정성이나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다.
그녀가 생각하는 핵심은 한국 사람은 모두가 잘 산다. 필자가 어려운 사람을 설명하는 짓(?)은 옛날식이라고 그녀에 의해 매도되었다. 그래도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필자의 답답한 심사가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치 계급교육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여지도 있었을 테니까? 모처럼 대화가 통하던 고려인 김 이스크라 씨와 필자의 대화는 때로 서로에 대한 배려를 위한 억지웃음으로 포장되는 아슬아슬함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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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어느 순간 필자는 말문을 닫기로 했다. 그리고 화제를 돌려 그녀가 원하는 아버지 고향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강원도 압대치인지, 앞대치인지 모를 그녀 아버지의 고향은 어디일까? 그녀는 그녀의 수첩에 홍범도 장군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함께 싸웠다며 해준 이야기를 기억하는 한 자락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란다. 홍범도 장군 부대에서 함께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증거할 것은 없다고 한다. 필자는 과거 연길에 갔을 당시 찾았던 봉오동 전적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의 딸은 캐나다 교포와 결혼하여 한국에서 살고 있다. 흩어진 가족이 먼 훗날 서로 만나 이제 고국에 돌아와 살아간다. 먼 거리를 돌아서 말이다. 그녀는 막 한국에서 전해온 손자의 사진을 받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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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얼마 전 경주 김씨, 김행구와 강원도 압대치인지, 앞대치인지 모를 그녀 아버지 고향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강원도에 경주 김씨 집성촌들은 있었으나 필자가 원하는 압대치는 없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을 이야기 해주었다. 훗날 한국에 돌아가면 경주 김씨 종친회에 러시아로 떠난 경주 김씨 김행구의 행적을 의뢰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