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고려인 협회 회관 및 문화센타 개관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에 대한 나의 관심은 최소한의 것이란 생각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면서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가족과 이웃 그리고 동족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모두에게 일상적인 것이리라. 지난 추석 때 우크라이나에서 열렸던 <2010 까레야다>소식을 전했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분명 의미 있는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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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시적으로 보고 판단하는 필자의 눈길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그들 입장에서 또 다른 불만의 요인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동족으로서 같은 문화적 전통을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열망이 그들에게 있다. 그렇게 그들이 원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결코 나의 불만족스러움은 무시될 일도 아니란 생각이다. 또한 그 내용들을 유관기관이나 동족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지난번 까레야다 행사가 열리는 날 낮에도 우크라이나 전체 고려인 사회에 큰 의미를 갖는 행사가 열렸다. 우크라이나 전체 고려인의 구심이 되는 수도 키예프에 고려인문화회관과 고려인협회 사무실이 생긴 것이다. 우크라이나 각지의 고려인협회 지부장들이 참석했고 대사관의 주요 인사들과 국내기업의 지사장 및 법인장들도 함께한 자리였다. 필자도 전체 우크라이나 고려인을 대표하는 강정식 교수와의 인터뷰를 한 인연으로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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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협회는 국내 기업의 관심과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흐밀린쯔까야 거리(ул, хмилнцкая)10번지의 한 아파트 1층을 수리하여 입주했다. 명칭을 고려인협회가 아닌 한인협회라 칭한 것이 다소 생소한 느낌을 주었다. 간단한 개소식 행사에서 세 사람이 어우러진 부채춤 공연도 있었고 주요 참석자들의 인사말도 있었다. 간단한 개소식이 끝나고 모두가 어우러져 이야기를 나누며 준비된 뷔페식을 먹고 와인을 곁들였다. 모두가 반가운 웃음으로 함께한 자리였다. 그러나 필자의 마음에는 또 다른 아쉬움이 있었다.
사무실은 시청각실 혹은 소규모 강당으로 쓰이는 공간과 도서관, 주방, 사무실, 회장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비는 우크라이나 남성이었고 사무직원 세 사람은 우크라이나 여성이었다. 더구나 텔레비전과 사무실 집기는 갖추어졌지만, 나머지 시설은 아무 것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대사관에서 협조하여 곧 500여권의 도서가 기증될 예정이라고 한다. <한인문화센타, 한인협회>라는 현판이 걸려있지만, 사무실 직원 구성이나 분위기에서는 전혀 그런 것을 느끼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우크라이나 유일의 한글학교 하리코프 정수리 학교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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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모자란 동포 사회의 역량 탓인가 싶다. 어쩌면 우리가 그만큼 고려인 동포사회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탓도 있으리라. 그로부터 며칠 후 우크라이나 유일의 민족학교라 알려진 하리코프 정수리학교를 찾았다. 밤기차를 타서 아침 일찍 하리코프에 도착하였다. 하리코프에는 초행길이었다. 하리코프 역에서 길을 물어 전철을 탔다. 마르샬라 주까바(маршала жукова)라는 지하철역까지는 15분 정도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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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등교하는 학생들을 만나볼 생각으로 곧 학교를 찾아 길을 재촉했다. 리발까 거리(ул. рыбалко)181번지라는 주소를 가지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다. 물어 물어 어렵게 학교를 찾아냈다. 시 외곽의 아담한 학교였다. 운동장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정원은 잘 조성되어 있었다. 등굣길에 학생들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등교 시간이 이른 것 같았다. 필자는 8시 10분경 도착했으나 대부분의 학생들이 등교를 마쳤다.
학교 모습을 촬영하고 있는데 지난 까레야다 행사에 참석했던 한 학부형이 필자를 알아보고 안내를 해줬다. 우크라이나인 남성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길으며 우크라이나에 정착한 여성이었다. 언어소통도 능숙하여 필자의 확실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곧 그녀의 안내를 받은 필자는 교장 선생님을 만나려 했다. 그러나 몸이 불편하여 출근하지 못한 선생님의 수업을 대신하는 교장 선생님의 사정으로 인사만 나누고 면담 시간을 미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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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형의 안내를 받아 가까운 빵집에서 아침 커피를 마시며 하리코프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 다시 정수리학교를 찾았다. 필자는 먼저 김류드밀라(현 고려인협회장, 58세)고려인 교장선생님에게 학교 설립과정을 물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정수리학교는 1998년 이전 유치원이었다고 한다.
1998년 9월 1일부터 현지명칭은 181번 학교이고 우리말로는 학교명을 정수리학교로 하는 쉬꼴라(12년 초중고 과정)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당시 시의원이었던 김류드밀라의 여동생인 김릴야 안토노브나(ким лиля антонавна, 57세)와 당시 시장 등이 협의하여 우크라이나에서 한국어강좌를 정규교과목으로 채택한 유일한 학교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현재 전체 교사 수는 24명인데 한국어 선생으로 코이카의 진보영(한국어교육) 선생이 수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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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곳에서 배출된 학생은 78명이고 현재 재학중인 학생은 188명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배출규모가 적은 듯해 그 이유를 물었다. 78명은 순수 졸업생만을 말하는 것으로 더 큰 도시로의 전학과 인구감소를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현재 졸업생 중에는 수도 키예프에 대학 동양어학부 한국어 전공학과에 다니는 학생이 13명 있고 한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도 7명이 있다고 했다. 학생 수가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 학교가 만든 희망이라는 생각이다.
학교는 전체 10개 교실로 이뤄져 있었다. 그 외에 컴퓨터실, 태권도 교실, 강당, 한국문화관, 우크라이나 문화관 등으로 비교적 잘 갖추어진 학교란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돌아본 정수리학교는 기존에 인식한 형태의 민족학교는 아니었다. 그래서 다소 실망스런 마음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필자의 기대가 큰 것이었을 뿐 결코 교육이 소홀히 되어서는 아니다. 그곳의 현실 속에서 분명 의미 있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규모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우리의 관심을 더욱 키워야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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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댈 것 없이 살며 하나의 길을 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우리의 동포인 고려인들이다. 지금 그들이 닦아놓은 좋은 터전을 우리가 잘 지켜나가려면 우리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하나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노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어렵게 닦아놓은 것을 잘 지켜내는 것도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일이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