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떠난 12일간의 유럽여행 4] 폴란드 끄라코프에서 오시비엥침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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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라코프에 도착하고 유스호스텔인 마마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대학생들의 배낭여행과 같이 저렴한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버스와 기차로 국경을 넘고 한국 돈으로 2만 원 이내의 숙소를 잡는다. 그렇게 숙소를 잡고 1~2박을 한 후 숙소 근교를 중심으로 도보 여행을 하며 여행지의 분위기를 탐색한다.
늦은 오후에 도착한 마마하우스는 세계인들이 끄라코프를 찾을 때 많이 이용하는 유스호스텔 중의 하나였다. 특히 필자처럼 저렴한 여행객에게는 안성맞춤인 곳으로 저렴한 숙박비에 아침 식사 포함이다. 가는 날이 장날(?)로 즐거운 이벤트가 준비되었다. 유스호스텔에서 투숙객을 위해 준비한 와인파티였다. 금방이라도 주변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지만, 이틀을 머물기로 하여 마음이 한결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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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같아서는 유스호스텔에 머문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와인을 마시고 싶지만, 짧은 눈인사, 손인사가 전부다. 가끔 몇 마디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흡족하다. 유스호스텔에서 제공한 맛있는 폴란드 와인을 마신 후 도보로 근교를 둘러보기로 했다. 해가 저문 끄라코프의 야경이 볼만한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는 짐작에 기대가 크다. 사실 텔레비전 화면에서나 보던 이국의 특색 있는 건축물에 빛나는 조명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오늘은 바벨성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폴란드 역사의 중심은 바르샤바가 아니라 끄라코프다. 1596년 끄라코프에서 바르샤바로 수도가 이전 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18세기까지 왕의 즉위식을 끄라코프에서 거행할 정도로 끄라코프는 폴란드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곳이다.
폴란드 발전의 3요소는 교육, 종교,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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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후로도 폴란드의 역사와 유럽사회, 세계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되는 곳이 끄라코프와 인근 오슈비엥침(Oshwiecim)이다. 오시비엥침은 아우슈비츠(Auschwitz)로 더 알려져 있다. 나치즘에 반기를 든 독일인은 물론 많은 유럽인들 그리고 러시아인, 유태인 등이 집단 학살당한 곳이 아닌가?
끄라코프는 세계인으로부터 존경받던 종교지도자 요한 바오로 2세가 공부한 야길론스키 대학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폴란드는 125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지만, 조국 독립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해왔다.
나치가 유럽을 지배할 때도 그랬고, 소련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었을 때도 동유럽 국가 중 가장 먼저 소련에 대항하였다. 폴란드는 구 소련의 붕괴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자유화 이후 실시된 시장경제 도입, 국영기업의 민영화, 화폐개혁 등을 통해 발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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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발전에는 오래된 교육적 전통이 큰 역할을 해왔다. 교육을 통해 훌륭한 인재를 양성해내고 있다. 또한 종교가 도덕적인 뒷받침을 하고 있다. 현대 사회 종교적 모순이 극심한 한국 사회가 유심히 살펴볼 부분이란 생각이다.
특히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폴란드에서의 종교의 역할은 특별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가톨릭 신자가 아닌 세계인에게도 존경을 받았던 교황 요한 바오로2세(Karol Wojtyla)도 폴란드인이다. 폴란드의 교회가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나 동요를 억제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평화의 상징이 되지 못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부러운 일이다. 폴란드의 민주적 전통과 종교적 공동선은 도덕적 억제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민족과 사회 분열에 동인이 되는 일부 한국의 종교인들이 귀감을 삼아야 할 일이란 생각이다.
1795년 폴란드가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완전 분할되어 유럽에서 사라질 때까지 폴란드는 민주공화국이었다. 왕위조차 세습이 아닌 선거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 폴란드 국민에게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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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이 흘린 역사적 아픔의 눈물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모르는 이가 없지 않은가? 사색이 깊은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9시 끄라코프 역으로 향했다. 악명 높은 곳, 인류의 재앙과도 같은 유물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찾기 위해서다.
가는 길에 포즈난이란 곳에서 사는 한국인 엄마들이 아이들과 함께 오시비엥침을 가기 위해 빠른 걸음을 옮겨 딛고 있었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따 보자며 '안녕'이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