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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식 활동을 마감했다. 짐을 정리하고 그동안 가깝게 지내온 고려인 집에서 머물며 작별의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세르게이(40세)네 집이다. 그동안 필자가 허물없이 지내온 벗이며 가족과도 같은 고려인이다. 그는 2000년 예빠토리야로 이주해오기 전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며 고려인 협회 일도 해왔던 사람이다.
멀리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필자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었던 친구다. 당초 계획은 그의 집에서 1박 정도 한 후 수도 키예프로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22일 아침 갑자기 문화국 고문 역할을 담당하는 아르메니아인 시인 알렉산드라(61세, 애칭:사샤)씨로부터 문화국으로 와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시내를 둘러보고 인터넷 검색이나 하며 낮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는 세르게이 가족과 석별의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다.
예빠토리야 시청 표창장 수상
초대를 받은 필자는 약속 시간에 맞춰 문화국을 찾았다. 문화국에는 몇몇 지인들이 와 있었다. 고려인협회장인 김플로리다씨도 와 있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졌다. 물론 인사를 위해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었으나 사무국 직원들까지 함께 자리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궁금증은 잠시 후 해결되었다.
당초 24일 있을 예정인 예빠토리야 소수민족언어 축제에서 표창장을 주려고 했으나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필자를 위해 시문화국 인사들이 조촐히 자리를 마련해 표창장을 준 것이다. 마지막 인사를 준비한 필자에게 예빠토리야 시청의 문화업무를 전담하는 인사들이 친절하고 좋은 인연을 이어주기 위해 배려를 한 것 같아 참으로 고맙기만 하다. 떠나는 이가 웃음을 간직하고 갈 수 있도록 해준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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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장은 "예빠토리야에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소개하고 이해를 증진시킨 데 대해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시 인사들과 다과를 곁들여 차를 마신 후 작별의 인사를 마쳤다. 사실 표창장을 받고 함께 나오는 길에 김플로리다 고려인 협회장은 표창장의 액자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 마음도 고맙지만, 이 표창장을 낯선 나라의 작은 도시 인사들로부터 받아들며 또 한 번 생각이 많아진다. 내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소개로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 인사들에게 표창장을 받아든 기분이 참 낯설고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필자가 함께 했어야 할 자리를 남겨두고 온 느낌이다. 그러나 내가 있었던 그 자리에 20개월 전 우리의 정체성에 맞는 자랑거리로 나서지 못했던 나의 어린 학생들이 서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동요를 부르거나 시를 읽을 것이다. 필자는 예빠토리야와의 인연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떠나왔다. 모두가 안녕하길 바라며 '안녕'하고 인사를 건넸다.
민족의 정체성 회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수 없이 예빠토리야에서 이틀간의 일정을 더 늘려 잡았다. 그리고 좀 더 천천히 떠나왔다. 한 사람, 한 사람 인사를 다시하고 그동안 동무가 되어주었던 산책길을 다시 걷는 시간을 가졌다. 김플로리다 고려인 협회장과도 따로 이야기하는 시간들을 가졌다. 그것은 오랜 과거의 이주역사에 대해 다시 듣는 시간이었다. 이어서 저녁 시간에는 유 세르게이의 가족 이주역사에 대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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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플로리다 가족은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카프카스에서 1960년대 예빠토리야에 왔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던 유 세르게이는 1997년 장인인 이 아르춈(61세)씨가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2000년에 이주해왔다. 처음 그의 가족이 왔을 때만 해도 허허벌판이던 자리에 집을 짓고 살기까지 5년이 걸렸다고 한다. 허허벌판에서 농사일을 하며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그들이 제대로 된 집을 짓고 산지가 이제 7~8년째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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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고려인들의 이주역사란 생각이다. 아직도 우크라이나에 수많은 고려인들은 정처없이 떠돌고 있다. 지난 여름 동안 각지의 고려인을 찾아다녔다.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고려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 길에서 정처를 정하지 못한 고려인들이 아직도 많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격하며 바라볼 수 밖에 없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유 세르게이의 장인인 이 아르춈씨는 곧 아제르바이잔을 향해 떠난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 그의 아우인 알렉세이(55세)씨가 일자리가 있다고 해서 아제르바이잔으로 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리가 잡히면 세르게이 가족도 이주할 것이라고 했다. 예빠토리야에 고려인은 2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고려인으로 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못한 상태로 살고 있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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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에서 살던 세르게이가 처음 예빠토리야에 왔을 때만 해도 고려인들끼리 만나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며 서로 남남이 되었고 오가는 횟수도, 만남의 기회도 줄었다고 한다. 필자가 와서 조금은 어색한 만남의 기회라도 늘렸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하기엔 안타까운 만남들이다.
새로운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대화를 가졌던 김플로리다 고려인 협회장과 세르게이의 바람인 '한 민족의 정체성 회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기대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면 한다. 기약 없이 왔던 곳이다. 기약 없이 가도 좋다면 좋겠지만, 이럴 땐 사람에게 생각이 있다는 것이 하나의 족쇄를 즐겨 차도록 하는 것만 같다. 다시 찾아올 것이란 기약을 조심스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