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드는 관광지인 예빠토리야지만, 우크라이나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광활한 벌판이 펼쳐졌다. 필자와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 누님과 게오르기 형님은 오늘 중으로 내가 머물 곳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잠깐이지만, 바닷가에 해수욕을 가기로 했다.
|
생면부지의 낯선 우크라이나 흑해연안의 소도시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해수욕을 한다. 일상에서 경험하기 힘든 정말로 낯선 풍경이다. 그 낯선 풍경의 주인공인 나는 서글픔보다 기쁜 마음으로 함께 그들과 어울렸다.
서로 갖지 않아도 되는 경계심이라니, 얼마나 좋은가? 그가 내 민족이든 아니든 사실 경계심을 갖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참 행복하다 믿는다. 더구나 아픈 역사적 상처의 흔적을 가득 품고 사는 민족으로서 낯선 곳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고 있는 동족과 만난다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다.
|
그 기쁨 너머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손짓하는 고대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계시리라. 엉뚱한 상상은 우리를 더욱 가깝게 한다. 여전히 직선으로 뻗은 왕복 한 개 차선의 좁은 고속도로지만, 운전을 하는 게오르기 형님과 뒷좌석에 앉은 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 누님은 모국어, 조국어를 배우려는 학구열이 부담스러울 정도다.
나는 순간 슬픔이 젖어온다. 몇 가지 급하게 가르쳐주고는 반복할 틈을 이용해 창 밖을 바라보면서 몰래 눈물을 흘렸다. 더 말을 이으면 서럽게 울어버리게 될 것 같아 꾹꾹 눌러 참으며 창 밖을 응시했다. 넓은 농토 사이에 수박밭에서 수박을 따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먹음직스럽게 열린 수박을 따서 가슴에 품어 나르고 있다. 그렇게 20여분쯤 달려 도착한 곳은 농가주택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저택이다.
|
집 앞 양옆으로 화단이 조성되어 있고 옥수수가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조금 걸어 들어가서 대문이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금방 작은 꼬마 아이가 깡충깡충 토끼 걸음으로 뛰어나온다. 게오르기 형님에게 잠시 안기는가 싶더니 펄쩍펄쩍 뛰며 좋은 웃음을 웃고는 뛰어다닌다. 벌써 서로를 잘 알고 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다정한 인사인지를 아이의 움직임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그렇게 단방에 고려인을 소개해주기 위해 왔음을 짐작했다. 곧 희끗한 흰 머리가 귀밑머리에 돋은 장년의 남성이 나타나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또 다른 여성이 곧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먼저 인사를 나눈 남성은 게오르기(60세), 그리고 여성은 이랴(59세) 그의 부인이었다. 이름으로는 알 수 없다. 러시아인인지, 우크라이나인인지......, 그 둘은 고려인 부부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앉은 곳은 큰 집 마당에 넝쿨포도가 그늘을 내려주고 있는 그늘막에 앉았다. 넓은 마당에도 고추가 심어져 있었다. 곧 먼저 만났던 김 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 누님이 내 소개를 한다. 그리고는 잠시 후 이랴(59세)라는 분이 포도주를 한 잔 하겠느냐고 묻는다. 초면에 사양하고 싶지 않은 반가움으로 응했다.
남편인 게오르기(60세)형님이 포도주를 가져왔다. 이랴는 잔을 들고 왔다. 그렇게 낮 시간에 우크라이나의 휴양도시 예빠토리야에서 난생 처음 만난 분의 집에서 술잔을 나누었다. 이랴가 내게 맨 먼저 꺼낸 말은 남에서 왔느냐? 북에서 왔느냐? 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
곧이어 언제쯤 통일이 되느냐? 당황스럽고 가슴 아픈 질문이었다. 그러면서 뒷말은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왜 통일을 못하느냐? 질문이라기보다 보채는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그 아픈 질문에 우회적으로 곧 될 거다. 곧 되리라 믿는다. 허망한 답이지만, 부정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던 이랴는 가끔씩 눈시울을 붉혔다. 잠시 후 이랴는 자신의 개인사를 말해주면서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1937년에서 38년 사이에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제빠르타세로 브셀례니예 되었다고 했다. 대강 짐작으로 이해를 한 후 나중에 나는 게오르기(54세)형님에게 물어 그 정확한 의미를 알았다.
제빠르타세 브셀레니예란 강제로 버려진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강제 이주라는 것인데 짐을 싸게 하고는 그냥 갔다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 다큐멘타리에서 가끔 아주 조금 볼 수 있었던 내용이다. 그런데 그 버려진 자식들이 지금 이렇게 살아서 내 앞에서 조국의 아픔을 이야기 하고 있다. 생명이 있는 한 죽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한참을 눈물 맺힌 가운데 우리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개의 이야기는 우리말 배우는 이야기다. 이랴는 벌써부터 배우려고 애를 썼던 모양이다. 파키스탄 종교인들이 영화를 가져온 것이 있었는데 그 영화를 보고 배운 적도 있다고 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북한 영화였던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알고 하는 몇 마디는 대부분 연변말투였다.
특히, 나는 운전을 해주던 젊은 게오르기 형님에게 운전을 "천천히 하세요" 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때마다 게오르기 형님은 "근심하지 마오"라고 말해서 서로 웃고는 했다. 게오르기 형님도 배워서 아는 말 몇 마디가 전부다. 나중에 한국의 문화와 한국 말을 천천히 배우시자고 하면서 이랴의 눈물을 달랬다. 그리고 문밖까지 배웅을 나온 그들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려고 사진을 찍었다.
|
이제는 해수욕을 하러 바다로 가는가 했는데 가던 길에 또 다른 대저택이 나타났다. 근처에서 저 집도 고려인 집이란다. 커다란 집이 두세 집이 되어 한 집인 줄 몰랐다. 집에 들어서니 마당은 작은 운동장만 하고 식구들도 참 많았다. 먼저 젊은 남성이 나와 게오르기 형님과 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 누님과 인사를 나눈 후 내게도 악수를 건넸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흥부네 아이들처럼 어느 방안에 있다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첫 대면한 사람 앞에서 눈물로 인사를 나눈 이랴(59세)의 사연?
잠시 후 짧은 흰 머리의 남성이 나타났다. 모두 고려인이다. 집 마당에 들어서 보니 집은 세 채인데 안으로 한 채는 한국의 원룸처럼 무수히 많은 방들이 있었다. 아마도 휴양도시인 이곳에서 근처 바다를 찾는 사람들에게 임대업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이 집의 주인은 아르쫌 그레고리에비치(60세)이다. 나중에 그와 닮은 남성이 또 있었는데 그는 지금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동생 알렉세이 그레고리에비치(56세)인데 휴가를 맞아 형님네 집에 찾아와 지내고 있다고 했다.
|
우리는 그 자리에서 또 한참을 수박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중, 알게 되었는데 아르쫌 그레고리에비치(60세)에의 한국 이름은 대춘이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말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서툴렀다. 내가 알아듣지 못할 때마다 나는 내가 불편해졌다. 하지만, 그들의 의지는 몇 번씩 되풀이하는 질문으로 꺾이지 않고 되살아났다.
필자는 그곳의 아이들과도 함께 어울려 수박을 먹어가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중에 수업 때 보자고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짧은 하루였지만, 며칠을 산 것 같다. 아르쫌 그레고리에비치(60세) 형님과 우리는 함께 바다에 갔다. 흑해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파도의 결을 따라 출렁거렸다. 내 몸도 마음도......, 이제 그들과 이 파도에 내 몸을 맡기고 그 리듬에 맞추어 파도 춤을 추던 것처럼 어우러지고 싶다.